내 마음대로 중국어 : 费话
브런치에 글을 쓰다가 생각했다. 나 왜 이렇게 쓸데없는 말만 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되도록 쓸데 있는 말을 찾았다. 그때그때 내 마음에 떠오르는 말들보다, 쓸모가 있어 보이는 말들을 찾았다. 이렇게 쓰면 아무도 읽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쓸데없는 말은. 그래서 나름의 목차도 짜 보고 매거진의 제목도 생각해 보고 나름의 순서대로 글을 써나가보려 했다. 문제는, 나의 일상이었다. 일상이 그다지 일상적이지가 않아서 예측하지 못했던 것들이 자주 출몰하곤 한다. 그로 인해 내 마음에 작은 파도가 일렁일 때도 있고 일단 눈앞에 닥친 일상을 일상답게 만드느라 일상적이지 않은 나날들을 보낼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며칠 전 그럴듯하게 기획해 놓았던 글들은 점차 희미해지곤 했다. 그렇게 마음에 다른 것들을 잔뜩 담아두는 날이면 글을 쓰지 못했다. 그런 마음들은 빨리 소비해서 없애버리는 게 상책이었고, 나는 써야 할 말들을 써야 했으니까.
예전의 나는 더 자주 그랬다. 현재 진행형이 되고자 하는 나의 마음은 '언젠가'라는 미래형으로 미뤄두고, 현재 이 상황에서 적절해 보이는 말들을 찾았다. 하지만 마음이 없는 말은 허공에 맴돌았고 해야 할 말만을 떠올리는 말은 길어질 수가 없었다. 풀지 못한 말들이 마음에 쌓일 때는 글로 풀고는 나 혼자 보는 글이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일은 누군가가 보기엔 참으로 쓸데없을 것 같아서였다. 친구의 고민이 아무리 진부해도 결론이 빤히 보여도 동화되어 고개를 끄덕이고 또 진심으로 내 생각을 전달해주려 애를 쓰면서도, 내 이야기를 드러내려 하면 어쩐지 어김없이 말문이 막혀왔다.
회사에서 늦은 밤까지 야근하던 날이었다. 경쟁 피티를 준비하는 전날이나 광고 촬영 날이면 새벽까지 밤을 새우는 일이 잦았다. 평소의 내 체력으론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그런 밤엔 나름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 꽤 버틸만했었다.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는 날이면 잠깐의 자투리 시간에 빨간 눈을 하고는 삼삼오오 모여 평소에 하지 않던 잡담들을 하곤 했는데, 그날의 주제는 '자기 자랑'이었다. 모두들 자뻑 하면 한가닥 하는 이들이었고 자뻑하지 않으면 쉽게 루저가 되는 곳이기도 했다. 자랑이 그렇게도 신나는 일이었던가. 겸손이 미덕인지라 꾹꾹 눌러놓았던 자랑이 심오한 밤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어디 한 번 해보자, 대놓고 자기 자랑하기! 한 명씩 돌아가며 형형한 눈으로 본인만이 알고 있는 스토리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구나. 오, 알고 보니 대단했어. 짜쉭. 사실 학창 시절 1등을 했다던가, 반장을 했다던가 하는 류의 이야기들이었고 어찌 보면 대단히 평범했지만, 그렇게 대단할 것까지 없어 보이는 팩트들에 화자의 신명과 자부심, 배경 스토리 그리고 밤의 분위기 등이 더해져서 밤의 청중들은 곧 각자의 이야기에 홀리고 말았다. 그리고 신나게 홀려서 듣고 있던 나에게도 차례가 왔다. 모두들 흥미진진한 얼굴로 내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게 웬 걸,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랑할 거리가 없었다. 맞아, 중학생 때 전교 1등 했던 거, 아니야 딱 한 번이었고 그다음 폭망 했어. 대입 수능 시험도 한 과목을 폭망해서 입시에 실패했지. 회사에 입사한 것? 같은 회사 직원들에게 자랑할 거린 아니지. 생각할수록 어째 내 인생은 다 실패 투성이인 것만 같았다.
에이 그러지 말고 자랑해봐, 조 대리 자랑할 거 많잖아.
다 들어주겠다는 그들의 눈동자 앞에서도 나는 결국 기억나지 않는 말로 뭐라 쏼라쏼라 얼버무린 채 끝까지 아무 자랑도 하지 못했고, 그리고 끝까지 아무것도 자랑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나는 일부러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 내 자랑을 하지 않는 거라 생각했었는데, 멍석을 깔아줘도 못 하는 거였다. 두고두고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자랑 같은 건 쓸데없는 말로 여겼는지도 몰랐다. 누군가 자기 자랑을 한없이 늘어놓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음속으로 혀를 끌끌 차곤 했었으니. 하지만 그날 밤 내가 들었던 자랑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상대방에 대해, 스스로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자존감의 표출이기도 했다. 어디 자랑뿐이랴. 마음을 담은 말은 내용이 어떻든 상대방의 마음에 닿기 마련이다. 반대로 마음을 외면한 말은 알맹이가 없어서 흩어져버린다. 현재 내 마음에 담겨 있는 것들을 말로 표현해야 진심이 담기고 다른 이의 마음에도 가서 닿을 수 있다.
费话
fèihuà
费는 '쓰다, 소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자체로 '요금'이라는 뜻도 있어서 고지서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水费(물세),电费(전기세)
무형의 뜻을 나타내는 한자어와도 붙여서 쓸 수 있는데, 번역하면 그냥 '쓰다' 정도로 해석이 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费劲 fèijìn(r) (힘들다, 애를 쓰다) : 아이 친구 엄마들로부터 많이 들어봤다. 엄마들의 만국 공통 감정.
费心 fèixīn (마음을 쓰다) : 费心了~ 부탁할 때, 신경 써 달라는 말.
그런데, 费话는 좀 다르다. 앞에 본 대로라면 '말을 쓰다'와 비슷하게 번역되어야 하는데 반대로 '쓸데없는 말'이라는 의미가 된다. 말은 요금처럼 소비해서 사라지는 물성으로 여긴다는 것인지.. 중국 드라마에서 찰지게 '페이화!' 하고 일축하듯 내뱉는 대사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느낌 그대로라면 '쓰잘데기 없는 말 좀 그만해!' 정도가 될 것이다.
아, 이번엔 같은 한자에 오묘하게 반대되는 뜻인 게다. 이리 변신 저리 변신하는 중국어가 나를 녹다운시키다가도 또 문득 글자 하나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게 하니 진정 마다할 수가 없다.
결국, 흩어져버릴 말 한마디에도 마음을 쓴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아무도 진지하게 들어줄 것 같지 않아도, 자꾸만 쓸데없는 말인 것 같아도 말에 내 마음을 한 번 담아 보자. 세상 고민 모두 짊어진 듯 보이고 싶지 않아 억지로 가벼운 척했던 말보다는 무거운 마음을 조금 덜어서 써버리는 거다. 네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말해보자. 알고 보면 나와 마음이 통하는 누군가, 내 마음 같은 누군가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다.
이 세상에 쓸데없는 말은 없다. 그 말이 한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