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또 하나의 '존'이 생겼다. 기사를 보고 알았다. 노중년존. 40대 이상은 출입을 금지하는 게스트하우스 등이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마흔이 한 달 남았는데, 한 달 뒤면 들어갈 수가 없다는 얘기다. 한국에서 어딜 가려고 하면, 내가 갈 수 있는 곳인지 아닌지, 아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인지 아닌지 먼저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노키즈존과 노중년존에 제대로 딱 걸려버린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아마도 놀이터가 딸린 키즈 펜션 그리고 키즈카페 정도일 것이다. 분위기 좋은 카페와 젊음과 낭만이 가득한.. 그런 건 이제 바라지도 않고, 나도 아이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이면 땡큐다. 그래도 어딘가에 나와 아이를 차단하는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솔직히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노키즈존이 나타나게 된 배경에 업주들의 고충이 있다는 걸 이해 못 하는 바 아니다. 한 사업체를 운영하며 자금을 투자하고, 수익을 거두려면,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일 수 없다. 동네 사랑방이 아닌 이상 가게를 방문하는 타깃을 설정해야 하고, 그에 맞는 인테리어를 해야 하고, 타깃 손님들의 만족도를 위해 노력해야, 최소한의 승산을 볼 수 있다. 돈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란 거다. 무한 존중과도 같이 느껴지는 그 '고객 만족' 도 마케팅의 일부이기에, 개인 사업체에게 '고객 만족'이 아닌 '인간 존중'을 먼저 들이대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이라면, 업주들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즉, 가게 운영을 위한 브랜딩이나 타깃 마케팅이라는 논리로 적용해서 생각해보면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역시, 노키즈존을 정당화하기엔 무리가 있다. 해당 타깃들을 겨냥하여 같은 공간 안에서 그들끼리의 소속감을 느끼게 하거나 편안한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고객 만족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가게를 방문하는 현재 고객만으로도 충분히 경제적 수익이 나는 상황에서, 다른 층의 고객들로 인한 조금의 손실도 용인하지 않겠다, 혹은 미리 차단해 버리겠다는 입장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본다. 타인에 대한 이해가 '제로'라는 점, 자신의 영역을 조금도 침해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큼은, 진상고객이나 노 키즈존 업주나 별다를 것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이유로 나의 경우엔, '진상 엄마'를 바라보는 마음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저녁 늦은 시간 조금 있으면 아이가 잠들 시간에 굳이 아이와 함께 조용한 식당을 찾는다던가, 대형 마트에서 누워 뒤집어져 우는 아이를 끝까지 다정한 말투로 달래고 있는 엄마들을 보면, 엄마인 나도 기가 찬다. 그 엄마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사실보다, 사람들이 보는 엄마로서의 자신의 모습이 더 중요한 것이다. 물론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 아이가 지지리도 말을 안 들었을 수도 있다. 아기가 한창 예민하다는 마의 한 주 기간일 수도 있다. 그래도 공공장소에서는 아이를 구석으로 데려가든 천천히 일어나서 걷게 하든 들고 안고 업고 가든, 나름의 훈육을 해야 한다. 타이르거나 구슬리거나 화를 내는 것만이 훈육인 시대는 지났고 그 정도는 요즘 누구나 다 안다.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해주는 것만큼 아이에게 좋은 훈육 방법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해주는 게 부모에겐 상당히 진이 빠지는 일일 뿐인 것이다. 진이 빠진다는 말로 표현되지 않을 만큼, '버럭'하지 않는 이상적인 훈육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나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훈육을 해야 하는 상황은 집에서보다 밖에서 더 자주 발생한다. 집에서는 보통 아기가 혼자 놀아도 문제없게끔 환경을 만들어 놓는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통제되지 않는 아이를 보며, 부모들은 '원래 이런 아이가 아닌데 오늘 왜 이러지?' 하며 예외를 용인하는 것으로 난감함을 퉁친다. 결국, 아이의 올바른 식습관을 위해, 위생을 위해, 생활 습관을 위해, 즉 아이 본인을 위해 해야 하는 훈육이 넘쳐나는데,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에티켓도 알려줘야 하다 보니, '내 아이를 위한 훈육' 앞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훈육' 은 덜 중요해지는 것이 아닐는지. 엄마들의 이런 마음 역시 업주들과 같은 선상에 있는 이기심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양쪽 모두에 대한 합리성을 가지고서만 이해하기엔 여전히 껄끄럽다.
한국에서 큰 아이가 5살 때쯤, 둘이 함께 대형 서점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해외에서는 한글 책을 많이 접하기가 쉽지 않아 한국에 들어갈 때면 서점을 자주 찾았었다. 아이들 코너에서 한참 책을 읽어주는데 점심시간 이후라 정신이 몽롱해지고 목이 말라왔다. 그래서 서점 안에 아이들 코너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카페 공간에 가서 커피와 아이 음료를 시켜서 앉았다. 뜨거운 커피와 음료 두 잔을 들고 테이블이 없는 다른 곳에서 읽다가 새 책에 쏟기라도 하면 난감한 일이라 카페 가장 구석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자리는 모두 비어 있었고 우리와 두 테이블 떨어진 곳에 젊은 남자분 한 분이 앉아계셨다. 우리는 음료를 마시면서 책 한 권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남자분이 처음부터 자꾸 인상을 찡그리며 우리 쪽을 노려보셨다. 만약 아이가 울거나 시끄럽게 떼를 썼으면 당연히 그 자리에서 일어났을 텐데, 나도 아이도 그렇게 크지 않은 목소리로 책을 읽으며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터라 설마 했다. 심지어 대부분은 내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 눈빛은 몇 번이나 계속되었고 잠시 후 종업원이 와서 여기는 조용하게 책을 읽는 곳이니 어린이 코너로 가달라고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그럼 어디에서 마실 수 있어요? " (뜨거운 커피, 음료를 들고 아이와 함께..?) 종업원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죄송합니다. 저쪽 손님이 불편해하셔서요."라고 답할 뿐이었다.
상식? 에티켓? 저리 가라면 서러운 사람인데, 그때 내가 요구받은 건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져야 하는 상식이나 에티켓이 아니었다. 조용히 독서하는 장소로는 서점 군데군데 따로 마련된 책상들이 있었고, 스탠드가 켜진 그곳에서는 나도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비집을 생각이 없었다. 잠시 커피나 음료를 마시며 쉴 수 있는 공간에서 잠시 목을 축이며 아이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기를 원했기에 오픈된 카페 공간으로 가서 앉았던 것이다. 음료를 시키면 앉아있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그곳에서 단순히 개인 한 명의 독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타인의 입장을 제한하는 행동은 누군가의 권리가 다른 누군가의 권리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건 내가 알기론 상식이 아니라 권리였으며, 동등해야 할 나의 권리가 제한될 이유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제 아이와 엄마는 우리 사회의 약자로서 동등한 권리를 내세우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리를 갖기 앞서 지켜야 할 의무를 간과한 결과라 애써 받아들여보지만, 세대나 연령 전체의 권리를 차단해버리는 건 엄연한 차별이고, 그런 차별에는 피해자가 따르기 마련이다.
아이가 앵하는 소리만 들려도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보는 혐오의 눈빛, 분위기 좋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중년의 남녀에게 무언의 '꺼져줘'를 외치는 눈빛, 지하철에서 헤어롤을 말든, 화장을 고치든 관심 끄라는 차가운 셧다운. 이 모든 게 거대한 이기심의 말로가 아닐까.
나는 중국에서 두 어린아이를 키우는 동안, 아이들에 대한 배려를 참 많이 받고 살았다. 고급 택시가 아니었음에도 차에서 내릴 때 차 문을 열어주는 기사 아저씨를 만났고, 지하철에서 아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노키즈 존은커녕 어딜 가나 키즈 환영이다. 아이들은 외동이 많아서 버릇없을 것 같지만, 심하게 뛰어다니거나 버릇없이 구는 중국 아이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공공장소의 예절 의식이나 문화 수준이 높아서 그렇다기보다는 아이가 예절을 지키지 않으면 부모 얼굴이 깎인다고 생각해서 그렇다. 그리고 나의 얼굴이 존중받아야 하는 만큼 타인의 얼굴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쉽사리 타인에게 무안을 주거나 험악한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이 둘의 손을 잡고 다니는 내 얼굴을 보며 다들 '저 엄마 고생이 많네.'라는 무언의 따뜻한 시선을 건네주고, 곧 아이들에게 옮겨진 시선에는 더 따뜻한 눈빛이 넘쳐흐른다. 이 나라 사람들은 '아이들'이라는 존재를 언제나 환영하고 예뻐하는구나, 매일 그렇게 느낀다.
어쩌면 세대, 젠더 갈등의 문제는 최근 불거진 문제만이 아닐 수도 있다. 넓은 땅덩이에서 다름을 받아들이며 살아왔던 이곳 사람들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름'에 민감했던 건 어제 오늘 일만은 아니라고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항상 부대끼던 정이 있었고 아름다운 이웃이 있었다. 나는 '나의 아름다운 이웃'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