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는 내 낮은 자존감의 원인을 탐색 할 결정적 트리거가 되어주셨다.
히어로물부터 현대판 멜로까지 극적인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데 있어 빌런의 등장은 필수다.
인생에 나타나는 빌런도 마찬가지다. 어느 집단이든 반드시 또라이가 존재한다는 말이 있는데 마음이 되게 편안하고 그러면 내가 또라이일 수 있다고. 그럴듯한 유머에 깔깔 웃었는데 살펴보면 상당히 과학적인 이야기다. 연령, 문화, 수직과 수평, 날줄과 씨줄로 얽힌 무수한 집단 안에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 번 이상 또는 그보다 훨씬 많은 비율로 또라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자연에는 중간이 있지만 인간은 모두 자신이 상식적이고 중간이라고 생각하기에. 우리 부모님도 밖에서는 교양 있는 사람이지만 나에게는 빌런인 것처럼 말이다.(그렇다면 우리 딸도 나를?)
태어나자마자 맞이 한 제1의 환경을 지나 내가 선택한 제2의 인생,결혼에서는 빌런을 만나지 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남편으로는 따스한 사람을 만날 거라고 다짐했고 실제로 그런 사람과 결혼했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총량의 법칙이 적용될 줄은 까맣게 몰랐거든. 김미경 강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녀들 자랑할 것 없다. 다 잘 됐다고 자랑하는 순간 막내가 오토바이 타고 가출한다고.
그 빌런은 나의 아버지의 딱 여자 버전, '시어머니'였다.
그래도 여성이기에 양상이 매우 다르다. 나의 사고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뜻과 속뜻이 다른 충정도 분이라는 점과 환경과 문화적 측면에서도 매우 달랐다. 남편을 알고 결혼까지의 세월도 1년 1개월이 전부였는데 남편의 부모님은 인생 통틀어 그동안 정말 다른 사람, 모르는 어르신이었지 않나. 그런 사람들이 만나 가족이 되었는데 잘 몰랐던 어르신들이 한국 문화에서 며느리를 대하는 아주 지극히 당연한(?) 방식으로 며느리를 대하는 방식에다가 추가로 시어머니 개인의 성격을 얹어서 며느리를 대하셨다. 시어머니 입장에서 내가 생소할 지라도 내 삶의 방식을 시어머니가 생각하는 삶의 방식대로 바꾸고 싶진 않다. 부끄럽지만 다 큰 성인이 되서야 '나는 누구인가'를 알아가고 있는데 또 다른 누군가의 욕망대로 살 수는 없다. 이제는 자유가 없는 건 죽음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나의 부모님이 깔아 놓은 트랙에 시어머니가 트리거가 되어 내 인생을 송두리 째 바꾸는 대서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시어머니는 내 인생에 있어 진심으로 고마운 빌런이 되어 주셨다. 잘못된 첫 단추를 바로 보고자 눈을 돌려 나의 엄마의 간섭을 그대로 두지 않고 거부할 줄 아는데서 마음 챙김이 시작되었다.
시부모님은 아직 결혼을 안 한 남편의 친구를 두고 걱정하였다. 근데 남편의 고등학교 친구들 중 결혼 안 한 그 친구가 제일 야무지고 건실한 분이다. 건강관리, 정신건강, 공부, 일 등 자신을 저렇게 야무지게 가꾸고 사랑하고 가꿀 수 있을까 싶었다. 2세 문제만 아니라면 50대에 결혼하는 게 딱인 것 같다. 그러면 욕망의 간섭들로부터 좀더 자유로울 나이이지 않을까 하는 웃기는 생각을 출산 후 했었다.
결혼 전 시어머니에 대한 남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시아버지에게서 사리가 나온다는 이야기는 그냥 우스갯소리라 여기며 함께 깔깔 웃었고 시어머니에게서 보이는 욕망하는 인간 심리의 원형이 순백처럼 드러날 때면 귀여우시고 인간적이기까지 했다. 내가 뚜껑이 열리기 전까지만.
"정말? 에이~ 그런 사람이 어딨어. 우리 아버지 빼고."
남편은 어린 시절 시어머니가 학교에 방문하여 치맛바람을 불었던 모습부터 가장 평안함이 깃들어야 할 기도원 등 시어머니에게 벌어진 일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다 한들 괜찮았다. 나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과도 수십 년간 대면해 온 사람이다.
새로운 집단에서 기를 잡으려고 한다거나 세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습기도 했다. 삶을 관조하는 듯한 태도는 자신을 성찰할 줄 모르고 남만 평가하는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 늙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 삶은 그런대로 두고 내 삶만 바라보며 살았다. 어차피 대면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쉽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반대로 더욱 새로운 집단에 온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결혼으로 이어지는 가족이 된다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예상치 못하게 선을 넘어 훅 들어오는 시어머니의 언행에 어안이 벙벙하였다. 안일한 마음으로 가마니 있으니 정말 가마니가 되어버린 내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임산부에게 귀딱지 앉게 독감주사를 맞으라고 전화가 와서 맞았다가 열감에 앓아누웠다가 일어났다. 그 컨디션으로 차례상 앞에 입을 개량한복이 필요하시다는 남편에게 한 말씀에 집에 있던 내가 지하철타고 종로에 가서 한복 2세트를 들고 왔다가 조기진통으로 입원했던 나는 정말 착한아이 콤플렉스에 걸린 바보 병신이다. 미안해 하시는 시어머니는 내게 전화하기보다 우리 엄마에게 먼저 전화하셨다. 부모님에게 어머님 아버님 때문에 그런게 아니라고 나 자신이 선택한거라고 말씀드렸다. 그 때 말했어야 했다. 내 몸에 맞는 약물은 내가 결정한다고.
내 아이가 열이 펄펄 나는 중에도 눈 한쪽 딱 감고 열 나는 애를 데리고 KTX 를 타고 시어머니 체면을 위하여 부산에 시가 일에 나섰다가 앓아누워 있을 때 "그렇게 키우니까 애가 아픈거야." "네가 예민해서 그런거야." 라는 말을 듣고 내 정신은 반 미친년이 되었다. 그래도 버텼던 건 썩은 동아줄이어도 나의 부모님이라는 안전지대를 믿었다. '명절에 스타벅스 간 며느리' 글의 주인공이 나였던 것처럼 친정식구들의 가족 여행에도 끼지 못한 나와는 신뢰가 없으면서 시어머니와는 하하 호호 통화하는 엄마의 모습에 더 이상 마음 둘 곳 없는 마음의 소용돌이는 뭔가 잘못되어도 대단히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시아버님의 가족(그 자리에 시누이 안 계셨음)들 앞에서 시어머니가 나를 칭하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 며느리는 설거지를 안 배워 왔잖아. 그리고 외아들이라 시누이 없으니까 시댁에 왔을 때 행복하지. 시누이 있는게 얼마나 피곤해." 라며 자신이 꾸린 시월드는 행복하다고 시어머니의 시댁에 강조하였다.
누굴 조준한 건지 모를 아무말, 며느리와 시누이 언급에 순간 공기는 쏴해졌고 나는 설거지도 안 가르친 부모와 그들의 딸이 되고 말았다. 시누이의 친형제들은 서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데 저희 시어머니가 시누이 열명 분 해요. 하하." 라고 말했다. 그들의 눈동자는 더 커졌지만 함께 어색하게 웃었다. 이 집에 있을 때 설거지는 내가 제일 많이 한다. 상을 다 차리고 나서야 목욕하고 뿌연 수증기와 함게 욕실문을 열고 나타나시는 옥동자 남편 네가 앞으로 설거지 하라고 했다. 방에 들어가 조용히 가방을 들고 집에 갈까 고민하다가 다음 번 방문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결투 카드를 준비하기로 했다. 그런데 추후 시어머니는 연세 많으신 자신의 시누이와 이미 결투 진행 중 앓아 누우셨다. 시누이 발언이 귀에 안 들어갈 리가 없을텐데 말이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책에서 사회심리 연구에서 승리를 이룬 소규모 집단은 공통의 번영이라는 목표 앞에서 매우 인종차별적이었던 태도를 버리고 일부러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경향이 높았다는 연구들을 소개한다. 그게 총체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능이 높은 국가일수록 다정하고 결국 문화적 번영을 누리는 국가가 된다고 했다. 그런데 문화적인 진보 보다 생존에 가까운 본능적 소유욕이 큰 사람들의 특징인 시어머니들의 공통점은 남편 외 제2의 자원이 될 만한 아들을 빼앗기는 심정으로 며느리를 견제함으로서 아들과의 사이를 간접적으로 훼방놓는다. 말년의 번영은 이루고 싶고 질투는 나기도 하는 이 양가적인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까워지고 싶으면서도 싫어하게 만드는' 말을 내뱉는 것이다.
"저 며느리는 한달에 얼마 버는 며느린데, 자기 시댁에 이렇게 한다더라."
"다른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트로트가수 김호중 좋아한다고 타이머까지 걸어서 시간대 별로 음반순위권 '좋아요' 눌러준다더라."
나도 타이머 걸어 좋아요 누르며 앉아있는 사람 되고 싶다. 디자인 의뢰가 몰려 시가 생신이 있는 주말에 어쩔 수 없이 노트북들고 가서 한쪽에 처박혀 일하다가 순간 머리에 별을 보고 있는 며느리에게 그러신다. 최초로 간보며 한대 칠 때 웃으면서 대응하고 넘긴 바보병신이었던 나도 한몫 했다. 왜냐하면 어른에게는 그 어떤 토도 달지 말고 대들면 폐륜아가 된다는 지금 당장 갖다버려도 시원찮은 그놈의 유교사상 때문이다.
내가 버는 돈은 내 가정의 경제에 관련이 있고 시가에 잘하고 말고는 별개의 문제다. 언급된 그 며느리는 함께 있으면 편안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시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따로 이야기 들어서 알고 있다. 평생 거의 주부로만 지내셨고 시아버님으로 인한 충분한 연금생활에도 만족하지 못하신다면 더 필요한 만큼 시어머니가 경제활동 하시는 걸 추천한다. 대한민국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인 연령층을 위한 일자리도 많아졌다. 그리고 그렇게 노인도 아니다.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사실 자기애가 크지 않아 자기애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거부당한 경험이 많은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자존감의 뿌리가 매우 미약하다. 그래서 대신 겉을 지나치게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하거나 남을 매우 의식한다.
돈을 왕창 벌고 싶지만 그것에 못 미치거나 할 수 없었던 내면에 자리잡고 있던 돈에 대한 설움, 열등감 등 돈으로 얽혀있던 시어머니의 시댁식구의 장례식 장에서 비교적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고인의 마음고생에 일조한건 아닐까 일말의 죄책감과 짜증스러운 일화들이 떠올라 뒤섞인 감정을 마침 반대편에 있던 자신의 며느리에게 그대로 떠넘기는 방식으로 자신을 안위한다. 한달에 얼마를 버는 며느리가 기분 나빠하거나 괴로워 하면 할수록 시어머니는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다. 감정 쓰레기를 받지 않았다면 걱정할 일 없겠지만 다른 타인이나 나의 자녀에게 같은 방식으로 대물림하지 않도록 인지해야 한다. 경제활동을 통해 시어머니가 직접 벌어 온 돈이 얼마나 되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그런 감정적 대응은 감정유발자를 매우 만족시킨다. 무례한 사람에게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그런 상대와 접촉하는 횟수를 줄이거나 제한해야 한다. 자식이건 가족이건 불사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노력은 할 수 없다. 자기애는 목숨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고양이처럼 치열하게 싸운다. 시어머니의 시가에서의 시어머니는 싫어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시가 눈치를 볼 수가 없다. 아이들 복장이건 기독교인 내가 절을 안 하는 것이든 그 어떤 것도 면이 서네 안서네 전전긍긍 하셨다.
부정성으로 자기애가 큰 사람들은 지루함을 느낄 때 파괴적인 방식으로 해소하는 가학적 사디즘을 일으킨다는 연구가 있다. 그러지 않으려면 관심을 돌릴 수 있는 강력한 취미나 일을 해야 한다. 나의 아버지가 자녀에게 폭력 앞에 울며 괴로워 하고 있는 자녀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느꼈던 자기존재감과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일상은 심리공부를 할 수 있는 실제 자료들이 넘처났다.
동네 마트에서도 지인을 마주치면 갑자기 빠른 걸음으로 치고 들어와 팔짱을 끼고 사이 좋은 고부 코스프레를 하셨다. 그러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당장 며느리한테는 창피하지 않다는 사실에 도데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너무도 막막하여 머리가 지끈지끈하였다. 나는 당신의 가족상과 체면을 위한 장식물, 소유물이 아니다. 형식과 체면은 애도해야 하는 장례식장과 일상 조차 인간이 아닌 껍제기의 삶을 살게 만들었다.
큰마음을 먹고 시어머니와 식탁에 앉아 최초로 웃으면서속에 있던 이야기를 꺼낸 적도 있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시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시더니 (원래 눈물 많으심) 본인의 시어머니께 받았던 서러움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민감성이 매우 높으신 분이고 나는 친자식도 아니기에 귀를 기울여 주셨고 지나친 간섭과 차별 등을 대폭 거두려고 노력하여 주셨다. 그 때 만큼은 뭔가 통하고 있음을 느꼈다.
가끔 늑대 소녀로 변하려는 듯 파란 눈으로 되돌아가 옛날 모습대로 아무 말 대잔치를 하는 때가 있었다. 단호함 보다는 훽 돌아버린 때가 있었는데 화가 나 대응하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매우 화를 냈다) 시어머니는 버릇이 없다며 더욱 맹렬히 화를 내고도 매우 억울해 하셨다.
내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는 게 맞느냐고. 맞다. 필터링 거치지 않고 며느리한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 안 된다. 부모 자식 간에도 어른 대 어른끼리도, 시어머니 대 시어머니의 친구들끼리와도 마찬가지. 원래 그런 것이다.
둘째 출산 이후 몇 주간 산후조리 선생님이 매일 방문하신 때의 일이다.
평생의 관절은 산후조리에 달려 있다는 조언에 귀찮아도 수면 양말을 신고 모유 촉진을 위해 입맛이 없어도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했다. 선생님은 매우 좋으셨고 자신의 딸과 며느리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등 많이 친해졌다. 나는 세대 차이가 많이 나는 어른들과 내외하지 않고 두서없이 이야기를 잘 나누는 등 상냥한 편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았기도 했고 외할머니를 매우 좋아했던 탓이다. 막 붙임성은 없어도 한번 마음이 통하면 원래 알고 지내 온 사람 같다는 말을 종종 들어왔다. 물론 수직관계로 만난 사이가 아닌 서로 간의 존중이 있는 사이끼리 말이다. 그런데 너무 가까워지다 보니 선생님은 직업적 본분을 잊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냉장고에 밥은 나랑 같이 나눠 먹고, 남편분 퇴근하면 새 밥 주면 되겠네요."
선생님의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산모의 회복을 위한 밥을 준비해 주시는 일이다. 잠시 후, 아차 싶으셨는지 선생님은 딸 이야기를 하셨다. (선생님의 말과는 별개로 분명 너무나 좋으신 분이다.)
"아휴, 우리 딸한테도 똑같이 이야기했더니 난리가 났어요. 자기 밥과 사위 밥은 그렇게 나누질 않는다나.
그리고 자꾸 반찬이랑 감치 아들네 집에 갖다 주지 말라고 며느리가 싫어한다고 얼마나 잔소리를 하는지."
차라리 제3의 어머니께 이런 말을 들으니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놓였다. 꼭 따뜻한 밥 문제가 아니어도 한국 어머니들이 자신과 같은 여성을 대하는 속성의 뿌리를 확인하니 오히려 친정엄마와 시어머니에 대한 서운함도 조금은 사그라든 듯했다. 자신을 대하듯 같은 여성을 대하기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거의 막달에 첫째 아이의 태몽을 꾸었는데 새파란 배춧잎 같은 지느러미를 가진 용꿈을 꾸었다.
생각지도 않고 있던 태몽이라 너무나 기쁜 마음에 엄마와 나와 내 딸 모두에게 기분 좋은 일을 공유했다.
그랬더니 대뜸 '그 꿈 준호네 꿈 아니니? (나의 남동생 부부가 둘째 임신 중) '라고 부정했다.
서운함을 표현했더니 '막달에 꾼 꿈이 그런거라서 그렇지! 나는 그럴려 그런게 아니야.' 고 변명하였다.
말이 헛 나왔다고 미안하다고 한 마디 건냈다면 서운함이 사라졌을텐데 참 쉬운 그 한마디를 할 줄 몰라서 백 마디 붙이는 엄마가 대단했다. 정말 딸의 꿈이길 바랐으면 거짓말을 보태서라도 끼워 맞췄을 것이다. 무의식은 평소의 사고회로로 몸을 돌리고 있다.
시어머니는 그래도 외아들의 자녀에 대한 태몽이라고 하니 질투하는 데서 끝이 났다.
" 용꿈 꿨다고 했을 때 사실 그 말 듣고 부러웠다?!"
어머니 상을 그렇게 이상화할 것도 없다는 이야기다. 이게 현실이다.
정신분석 전문가 박우란 박사는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라는 저서에서 어머니가 딸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였다. 가부장적 구조에서 여성은 남성과 자녀를 보살피고 결핍을 메꾸는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하기도 하는데 그 보살핌이 온전히 그들을 위한 것만은 아닌 그저 희생으로만 볼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특히나 성별이 다른 아들에게는 자신이 만들어 낸 사회적 결과로서 존재방식을 취하고 딸에게는 자신과 동일 시 하는 방식으로 남성의 빈 공간을 메우려고 하는 속성이 있다고 하였다. 역할을 떠안은 딸은 어머니 어린 시절의 결핍 안에 일생이 갇혀 있게 되는데 이를 벗어나려고 하면 엄마는 사랑을 핑계로 권력을 휘두르고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탈락되거나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심어 준다고 했다. 그러면 딸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면서 순응하며 살다가 무력감과 공허함에 빠져 '나'로서의 삶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하였다. 여성의 욕망에는 온전히 채워 주지 않는 것으로 그 대상이 나를 지속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속성이 있으며 엄마는 딸에게 온전히 주지 않음으로써 딸을 자신의 주변으로 묶어 두는 것이라고 하였다.
모성 메커니즘을 확인하고 나니 엄마에 대한 미움 뿐 아니라 대한민국 여성의 심리구도적 한계가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인간은 원래 미성숙한 존재니까.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굳세게 서야 그다음에 자녀를 생존시킬 수 있으니까. 배움과 문화를 누리기 보다 먹고 사는게 가장 중요한 삶을 살았으니까. 그게 인간의 한계라고 하니까. 우리 엄마만 그런 게 아니라고 하니까. 그 문화권 안에서 '나'라도 배제 할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렸으니까.
박우란 박사는 그럼에도 '모성'은 본능이라기 보다 학식이나 배움을 떠나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스스로 사색할 수 있는 성숙함과 결연함이라고 말했다.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어떤 걸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인가
나를 잘 알아야 내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고 그걸 표현할 때 상대도 뚜렷하게 상대에게 표현할 수 있고 서로가 나은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무례한 상대를 대면했을 때 어떻게 나를 지켜야 하는지 갓난 아기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더 나이 들어서 폭발해 버리기 싫다. 결론은 내가 시아버님을 존경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시어머니와 잘 지내고 싶었다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더 이상 나의 사적인 가족이야기도 아니고 한국 전통문화에서 그 뿌리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모양과 강도가 다를 뿐 그 심리 원형이 같다. 요즘 Z세대의 예비 시어머니들이라고 다를 수 있을까. 역사를 통틀어 조선시대가 막을 내린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 제사상의 높이와 씀씀이를 드러내는 이유도 이웃들에게 형제들에게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다. 조선에 양반 비율은 조선에 전기 7%에서 후기 70%로 뻥튀기 되는 과정에서 족보를 위조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 살아 온 체면 심리가 사회 곳곳깊숙하게 뿌리 박혀 있다.
남편은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시어머니가 안타깝다고 말했고 반대로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좀 깨어있으라고 하신다. 신랑은 결혼 전 혼자였을 때 막연히 생각했었다고 한다. 자신이 결혼을 하면 2년 안에 고부갈등으로 집안에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런데 생각보다 늦게, 그리고 파도가 그리 높지 않게 왔다고. 그런데 그 파도. 당신 아내 몸과 마음 속에 요동치고 있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가치만큼 남이 나를 그렇게 대우하도록 방치하고 있었다는 점. 남편은 내가 선택했지만 그와 함께 온 가족 앞에서 똑똑히 확인 한 탄탄치 못한 나의 자존감은 그 근원과 원인을 찾아 떠나게 만드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우리 부모님이 깔아놓은 트랙에 시어머니가 트리거가 된 건 사실이다. 올 것이 온 것. 그 뿐이다.
p.s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
-"좋은 부모란 자녀에게 곁은 충분히 내주지만 자녀에 관한 한 무능한 부모다."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