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내 독(讀)료가 돼라!

[프롤로그] 독서가 취미라 답할 때 돌아오는 세 가지 반응

by 안진진

독서를 취미로 삼다 보면, 어디 가서 취미를 밝혀야 할 때 잠깐 머뭇하는 순간이 온다. '저는 책 읽는 거 좋아해요'라고 했을 때 돌아올 표정이나 반응이 경험적 데이터에 의거해 그 짧은 시간 안에 머릿 속에 펼쳐져서다.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두 가지다.


[Case 1] "오...우와, 멋있다.."


어색함이 섞인 칭찬을 건네는 사람. 가끔은 인사 치레로 어떤 책을 좋아하냐는 질문이 덧대어 올 때도 있다. 대답을 하면 '그렇구나' 하는 단조로운 리액션과 함께 대화가 일단락 된다.


[Case 2] "야이씨, 거짓말 하지마!"


호탕하게 웃으며 나의 팔을 친근하게 치는 사람. 상대방이 교양 쌓기와는 어울리지 않다고 부정함으로써 분위기를 띄우려는 농담이다. 이럴 땐 내 쪽에서 은은한 미소와 함께 대화를 멈춘다. 결국 어떤 반응이나 분위기가 머쓱해지는 것은 똑같아서 비슷한 경험을 반복하고 나니 다른 취미를 말하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지금은, 고도의 순발력을 활용해 어떤 태클도 들어오지 않을 무난한 취미를 말하기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다. 회의실 안 직사각형 책상에 띄엄 띄엄 앉은 여섯 명은 어색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며 최대한 누군가와 눈을 맞추려 하지 않고 있다. 그 때 '왕 자리'라고 불리는, 꼭지점 자리에 앉은 한 단발 머리의 중년 여성이 자리의 품격에 걸맞게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ジンジンさんの趣味は何ですか。
진진씨의 취미는 무엇인가요?


이름이 들려오자 가슴이 철렁한다. 허공에서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쳐버린 댓가다. 자, 내취미가 무엇이더라.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을 빠르게 돌아본다. 유튜브 영상 편집 하기, 친구들이랑 맛집 가기 등 이것 저것 떠오르긴 하지만 다른 언어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뇌로부터 번번이 로딩이 걸리거나 퇴짜를 맞는다. 결국 나는 익숙하게 머쓱해질 상황을 택한다.


それは··· 本を読むことです。

그건.. 책을 읽는 것입니다.


하필이면 툭 쳤을 때 나오는 몇 안 되는 일본어 단어가 '本'(책)이고 '読む'(읽다)였다. '하필'이라기엔 히라가나를 떼고 가장 먼저 배우는 기초 명사와 동사이긴 하다. 역시나 장내가 술렁하며 '오' 하는 추임새가 그라데이션으로 들려온다. 괜히 부끄러워져서 입만 웃고 눈은 웃지 않는 애매한 표정을 유지한다. 그 때 맞은 편 대각선에 앉은 G가 반짝반짝,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인사 빼고 말 한 마디 나눠본 적 없는 직장동료에게 그런 시선을 받아본 적이 처음이었을 뿐더러, 기존의 데이터에도 저장되어 있지 않은 반응에 나는 조금 더 고장이 난다. 그 눈빛은 '동지를 만났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일본에 본사를 둔 국내 법인으로 직원들의 대부분이 일본어에 능통하다. 자리에 앉아 일을 하다 보면 동서남북 사방에서 일본어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일상처럼 들려온다. 다행이랄지 나는 일본어가 크게 필요하지 않은 직무여서 히라가나를 모르는 채로도 회사에 입사해 3년 간 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만 점심 시간에 일본에서 몇 년 살다온 지아 씨와 JLPT 1급을 보유한 하린 씨, 그리고 본사에서 파견 온 나오미 씨와 도시락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눌 때면 이상하게 기가 죽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회사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산타 할아버지처럼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인사부 팀장님은 24년 초, 나 같은 변방의 직원들을 위해 대표님을 설득해 일본어 수업을 개설했다. 일명 <JLPT N5 합격 준비반>이었다.


비록 공인 자격증 시험 준비반이라는 이름으로 비장하게 포문을 열었지만, JLPT N5는 수험 등급 중 가장 낮은 단계여서 수업은 기초 회화반과 비슷한 수준으로 진행되었다. 수강생은 열 명 남짓. 우리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점심 시간에 만났고, 그러다 보니 화요일에는 항상 주말에 무얼 했는지 일본어로 세 마디 이상을 뱉어야 했다.


이 수업을 통해 일본어를 빼고 새로 배우게 된 점이 있다면, 낯선 외국어란 존재는 오직 진실만을 말하게 한다는 것이다. 모국어를 사용할 때처럼 체면을 위한 약간의 생략이나 임기응변 등을 쓸 역량이 되지 않으니 오직 날 것의 사실만을 술술 읊게 된다. 그 덕에 수강생들은 화요일만 되면 지난 주말 일과를 상부에 보고하듯이 정직하게 밝히며 서로의 TMI를 차곡차곡 저장해 나갔다.


내가 알게 된 정보는 대략 이렇다. 내성적인 줄로만 알았던(그러나 사실은 나처럼 말하는 게 귀찮은 것이었던) 은성 씨의 취미가 사실 주짓수이며 심지어 대회 경험이 있고, 다연 씨는 금요일마다 새벽 4시까지 이태원 클럽에서 춤을 춘다는 것. 수혁 씨는 여자친구와 싸워 마음이 심란하다는 것. 이런 것 까지는 알고 싶지 않은데, 생각할 무렵에 흥미로운 문장 하나가 귓가에 내리 꽂힌다.


あ。。。 私は週末に図書館に行ってきました。

아...저는 주말에 도서관을 다녀왔어요.


앞전에 취미가 책 읽기라고 밝혔을 때 초롱초롱 고양이 눈빛을 하고 쳐다보던 G였다. 이제 그녀가 아닌 내가 고양이 눈빛을 장착하고, 대답을 듣는 동안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다. G도 그런 나를 보고 고장이 났는 지는 모르겠다. 이어지는 수업에서도 '센세'는 질문 공세를 멈추지 않았고, 그 덕에 우리는 선생님을 중간에 두고 취미를 넘어 각종 라이프스타일까지 공유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나는 G와 같은 취미를 가졌으며 그것도 모자라 좋아하는 작가나 즐겨 보는 유튜브 채널, 하다 못해 인생의 가치관까지 비슷하다는 정보를 수집했다. 인생관은 차치하고, 개인의 취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비슷하다는 것은 정말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처음으로 회사에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생긴 순간이었다.






일본어 수업만 아니었으면 언니가 책 좋아하는 줄 정말 몰랐을 거야.


수업을 제외하고 1년 가까이 오가다 몇 번 인사를 나눈 것이 전부였던 그녀가 맥주 두 잔을 사이에 두고 내 앞에 앉아있다. 24년 12월 첫 주였다. 기억하는 이유는 나라의 형국이 전반적으로 흉흉하기도 했거니와 스스로에게도 꽤나 의미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회식을 제외하고, 회사 사람을 밖에서 자발적으로 만난 건 그 날이 처음이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는 상태로, 편하게 말을 놓은 뒤, 처음으로 밥을 먹었다. 순서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대화는 흔한 업무 이야기에서 시작해 상사 뒷담으로, 수업에서 발견한 취향의 공통점으로 이어지면서 티나지 않게 깊어졌다. 그 과정에서 책 이야기도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술잔을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하며, 우리는 좋아하는 작가부터 인생책, 최근에 읽은 책까지 쉴 새 없이 서로에 대한 독서 취향을 공유했다. 자연스럽게 그녀가 꽤 오랜 시간 독서모임에서 참여해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서모임? 나는 새로운 단어를 배운 사람처럼 읊조렸다.


돌이켜 보면 책을 읽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종종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온 적이 있었다. 책이 재밌을수록 그랬다. 당시에는 한동안 몰입해 읽은 책이 끝나버려서 오는 공허라고 생각했다. 여운을 달래기 위해 인상 깊은 구절, 혹은 책 표지 사진을 SNS에 올려도 보았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봐주는 이는 있어도 특별히 대꾸해주는 이는 없었기에 좀 더 외로워질 뿐이었다. 나는 정확히 무엇을 바란 건지 알 수 없었다.


해답은 그 날 G와의 대화에 있었다. 나는 오가는 핑퐁이 필요했다.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 의견이 다르면 다른 대로 토론하고, 같으면 같은 대로 공감할 수 있는 상대. 그러니까 독서 메이트가 필요했던 것이다. 재미 있는 책일수록 자꾸만 SNS에 올리는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아, 이 책이 이렇게나 감명 깊다고! 그러니까 제발 읽고 나랑 대화해주라고!


그녀도 같은 마음에서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고 했다. 알면 알수록 나와 닮은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그녀 빼고도 4명이나 더 있다는 모임이 궁금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도 해보고 싶다...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가 남은 맥주를 비우며 말했다.


언니, 우리 독서모임 들어올래?


취미가 독서라고 했을 때 돌아올 수 있는 세 번째의 경우이자 최초의 희망편이 저장 장치에 추가된다.


[Case 3] 독서모임에 초대 받는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