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면 넌 나의 N이 되어줘
지금은 다소 한물간 느낌이 있지만 한때는 두쫀쿠와 버터떡보다 뜨거웠던 MBTI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ESTJ다. 키워드로는 '엄격한 관리자' 형이라고 불린다. 각 항목의 비율로 보자면 E, T, J는 대부분 절반보다 조금 더 넘긴 정도여서 때에 따라 다른 유형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실제로 나는 상대에 따라 활달함이나 문제 해결 방식, 즉흥성의 정도가 그때그때 달라지기에 처음 만난 이들이 나의 MBTI를 단번에 맞춘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다만 결과 그래프에서 지나치게 치우친 유형이 딱 하나 있다. 현실성과 가능성을 가르는 감각 지표다. 나는 오직 사실과 경험에만 의존하며 상상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 즉 '파워 S'다.
MBTI 논쟁이 한창이던 시절, 미디어에서는 대부분 F와 T의 차이를 대비하고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유머 콘텐츠를 수없이 다양하게 만들어내곤 했다. F는 감성이 충만하고 공감을 잘하며 T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는, 단순화하기 쉬운 요소를 가지고 있어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MBTI에 잠깐이라도 과몰입을 해봤던 자들이라면 두 항목의 차이가 그토록 납작하게만 논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여기에 더해, 상대와의 차이를 더욱 깊게 체감할 수 있는 항목은 다름 아닌 S와 N이라는 사실도 이해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망의 독서 모임 첫 날, 준비해 온 책에 대해 설명을 마친 뒤 첫 번째로 받은 질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진 님은 이 사람의 MBTI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네?
나는 난해한 면접 질문을 받은 지원자처럼 꿈벅꿈벅 두 눈을 깜박였다.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내 표지를 한 장 넘겨 작가의 사진과 이력이 적힌 부분을 다시 한번 읽어 내려갔다. 그날 가져간 책은 보니 가머스의 <레슨 인 케미스트리>였다. 그 부분에는 보니 가머스가 출판사로부터 98번의 거절을 당하고, 99번째 계약에 성공해 이 책을 내게 되었다고 적혀있다. 그녀의 나이 65세 때의 일이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투지와 늙지 않는 열정에 감탄하며 더 나아가 (한 번도 떠올려본 적 없는 작가의) MBTI를 궁리해 본다.
원고를 8번도 아닌 98번이나 퇴짜 맞고도 포기를 모르는 성격이라면 분명 타인을 대하는 데 막힘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외향형일까? 아니다, 그렇게 단편적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내향인들, 특히 내향형 예술가들의 무궁무진한 잠재적 에너지를 알고 있다. 아울러 소설가는 어쩔 수 없이 대부분 N이라고 들었다. 문체를 보았을 땐 감상보다 팩트에 기반한 이야기를 시원시원하게 나열하는 스타일로 느껴졌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대충 때려 맞춰보다 입을 연다.
글쎄요, 작가는 INTJ...가 아닐까요?
그러자 모임장님이 웃으면서 '아니요, 작가 말고 주인공이요. 책의 주인공'이라며 질문을 정정한다. 나는 또 한 번 토끼 눈이 된다. 어쩌면 아까보다도 더 놀란 표정이다. 주인공이요?
모임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날, G는 간단하게 모임원들에 대한 소개를 해주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모임원 전원의 MBTI가 상상과 공상을 즐기는 'N'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엉뚱한 얘기를 하면서 우리끼리 즐거워하는 경우도 좀 있다고 덧붙였다. 책 속 주인공의 MBTI를 묻는 말 덕분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제법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나와는 정반대의 독서가들이다.
지독한 현실주의자로서, 독서 중 가장 힘든 순간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장면들을 읽을 때다. 이를테면 가본 적 없는 나라의 풍경이나 살아본 적 없는 시대의 모습, 더 나아가 어느 먼 미래 초인류적 세계관이 등장할 때 나는 절로 시야가 아득해진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은 까만 화면뿐, 텍스트의 표현들이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MBTI를 떠올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책에 적혀있지 않은 내용을 퍼즐처럼 짜맞추는 부분에 있어 남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든다. 그래서 한때는 SF소설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장르 자체가 장벽이어서다.
그래도 나는 오늘 처음 만난 모임원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무리에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비치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레슨 인 케미스트리의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조트를 떠올려 본다. 그녀는 여성의 역할이 가사노동으로 한정 지어지는 1950년대, 비상한 두뇌와 우수한 능력을 갖고 화학자로써의 길을 택하는 용감한 인물이다. 동료들은 그녀의 역량을 인정하지 않고, 상사는 공을 빼앗으려 하지만 굴하지 않고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모종의 사건들로 남편과 직장을 잃고 생방송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는 처지에 이렀을 때도, 조트는 계속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기다움을 지켜나간다.
대답을 기다리는 모임원들을 잠시 뒤로하고, 머릿속으로 주인공의 삶을 빠르게 반추해 보았지만 MBTI를 추측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머쓱한 웃음과 함께, 또 한 번의 근거 없는 때려 맞히기로 위기를 모면해 본다. 솔직히 이런 질문을 처음 받아본다는 말도 덧붙인다. 모임원들은 아까 나보다 더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런 생각을 안 해봤다는 게 오히려 신기하다고 대답한다. 소설 속 주인공의 MBTI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은, 이 모임의 단골 게임이라고 했다.
주인공의 MBTI를 말했지만, 사실 대답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 화제가 자연스럽게 다른 내용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모임원들은 무언가를 상상해 보고 서로 공유하는 행위만으로 즐거움을 얻는 듯했다. 책에는 적혀있지 않은, 그녀의 또 다른 면들에 대해 상상하는 그 잠깐의 순간이 꽤 오랜 잔상으로 남는다. 조트가 책 속의 글자로부터 뛰쳐나와 좀 더 생동감 있는 인물로 기억된다.
모임원들을 만난 후, 나는 책 속의 주인공들과 친해지며 인물들을 좀 더 사랑하는 법에 대해 배우고 있다. 과거에는 책에 나와 있는 장면을 억지로 떠올리고, 서사를 완벽하게 파악하고자 부던히 애를 썼다면 이제는 그런 부담에서 한발짝 물러난다. 대신 인물들에게 말을 걸고 곁에 머무르듯 있어보려고 한다. 상상이 완벽하게 되지 않아도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대신 그런대로 계속 읽어 나간다. 그렇게 그들의 삶을 마음으로 느낄수록 머릿속의 풍경화는 다채로운 빛깔로 서서히 채색된다. 독서 모임의 첫 번째 효능을 발견한다. 그야말로 '내가 S면 넌 나의 N이 되어달라'는 아이돌 그룹의 노래 가사 같다.
요며칠, SF계의 수작으로 평가 받는 작품이자 최근 영화로도 재탄생한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읽고 있다. 한동안 의도적으로 피해 온 책이기도 하다. 7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벽돌책'에 인간의 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우주의 세계가 펼쳐진다고 전해들어서다. 하지만 상상력 대장들에게 배운 대로 읽어 보니 한 번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볼 일 없을 외계 행성과 그 속을 유영하는 헤일메리호가 어설프게나마 떠오른다. 물론 외계 생명체 '로키'의 MBTI를 맞춰 보는 일도 예전만큼 어렵지 않다. 인류애가 충만하고, 때론 바보 같을 정도로 용감하며, 무엇보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것으로 봐서, ENFP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