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납 좀 제때 해주세요!

거북이도 토끼로 만드는 연대책임 독서법

by 안진진

휴대폰 잠금화면을 해제하고 오른쪽으로 한 번 휙 넘겨 빠른 손놀림으로 앱에 접속한다. 마치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라는 듯, 능숙한 터치가 몇 번 이어진다. 이내 무언가를 확인하고 '아' 짧게 탄식한다. 마음이 조금 더 조급해진다. 증권 어플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물론 주식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기는 하다. 슬프니까 그만 말하도록 하자.) 내가 접속한 건 도서관 앱이다.


과거의 나는 도서관과 그리 친한 사람은 아니었다. 독서를 취미로 삼기 시작한 지 초반 몇 해에도 책을 읽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 일은 없었다. 한적한 서점에 들러 카테고리별로 보기 좋게 진열된 신간을 둘러보고, 그 중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운명처럼 발견해 집으로 데려오는, 우아하고 여유로운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독서 속도가 비교적 빠른 편이 아니어서 대출 기한 내에 완독할 자신이 없었다는 점도 도서관을 멀리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나는 소위 말해 출판계의 빛이라 불리는 '도서 수집 아티스트'였다. 독서란 책을 읽는 것 뿐 아니라 책과 관련한 일련의 경험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는 나만의 정의에 동의한다면, 이 행동이 지탄받을 이유는 없다. 문제는 구매한 책들을 한아름 방에 들인 후 병렬독서 기법으로 각각 3분의 1쯤 읽었을까, 또다시 신간으로 눈이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쇼핑 중독자도 아니고, 습관처럼 책을 사다 보니 늘어난 건 독서량이 아니라 책장에 책을 좀 더 밀도 있게 꽂는 법에 대한 기술뿐이었다.


그랬던 내가 요새는 집과 회사 다음으로 자주 구립 도서관을 들리고, 빌려온 책을 순서대로 완독하고 있다. 6년 전의 나에게 미래의 이 이야기를 전해준다면, 아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답을 전해올 것이다. 과거의 내가 비아냥대든지 말든지, 현재의 나는 다급하게 예약한 책의 대기 번호를 확인한다. 책 제목과 내 이름이 적혀 있는 신청인 항목이 보이고, 바로 밑 칸에 대기 번호라는 글자와 함께 '3'이라는 숫자가 뜬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독서 모임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는데 세 번의 차례를 기다려야 책이 내 품에 온다. 사실 웨이팅 3번이라는 점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보름이 넘도록 숫자가 3에서 줄지 않고 있으며, 그 말 인즉슨 누군가 대출 기간을 넘겨 반납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갑자기 단전에서 짜증이 솟구친다. 대체 왜 반납을 안 하는 거냐고!




여럿이 함께하는 독서의 장점 중 하나는 읽게 되는 책의 유형이 굉장히 다양해진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다 보니 좋아하는 책의 장르도, 작가도, 스타일도 모두 다르다. 그렇기에 모임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한평생 읽을 리 없었을 책들이 종종 지정 도서로 선정된다. 취향이든 아니든,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여보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다. 그러나 그 책을 구하는 건 다른 이야기다. 비록 책 한정 지갑을 여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지만, 선호하는 장르가 아니라거나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작가의 책은 어쩔 수 없이 약간 주춤하게 된다. 추후 소장하더라도 먼저 취향이 맞는지 판별하는 과정을 거쳤으면 한다. 기간제로 책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곳, 도서관을 찾게 되는 이유다. 독서 모임을 하다 보면 도서관과 친해질 수밖에 없다.


독서 모임의 지정 도서를 대출해 읽으려면 타이밍을 정교하게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대출하려는 책의 대기 상황을 살펴야 한다. 다독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 한창 인기가 많은 책은 대기가 꽉 차 대출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내가 속한 지역구의 도서관은 예약 허용 인원이 3명으로 한정돼 있어 해당 인원을 초과하면 다른 방법을 알아봐야 한다. 다만 대기가 가능한 상황이라면 모임까지 며칠이나 남았는지, 대기가 얼마 만에 줄어들 것인지, 그 안에 완독할 수 있는지 등을 대략적으로라도 추측해 봐야 한다. 한편, 대기가 걱정스러워 한참도 전에 책을 가져와 버리면 정작 모임도 전에 대출 기간이 만료돼 당일 책 없이 빈손으로 참석하게 될 수도 있다. 생각보다 머리가 아픈 일이다.


그러니 모임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는데 대기가 여전히 3번이라는 점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다.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의 나는 혼자만의 미션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개봉을 기념해 원작을 완독하는 것이었다. 앱을 들락거림과 동시에 헤일메리를 읽기 시작한 시점은 목요일, 영화는 그다음 주 목요일, 독서모임은 영화를 본 다음 날이었다. 참고로 헤일메리의 분량은 692페이지, 지정 도서인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416페이지였다. 한 마디로 나는 도합 1100페이지의 책 두 권을 주5일 업무 시간 제외 일주일 내로 읽어야 했다. 때마침 모임 단톡방에서 알람이 울렸다. 제주도로 여행을 가서도 책을 읽는 중이라는 한 멤버의 독서 인증샷이었다. 그러자 다른 멤버의 인증샷도 올라왔다. 모임이 기대된다는 메시지와 함께. 어깨가 좀 더 무거워졌다.


자꾸만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향한 험담이 튀어나왔다. 안 읽을 거면 그냥 도서관에 갖다 놓으면 될 것이지, 왜 반납을 안 하는 거야. 그 순간 도서관을 이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대출한 사실을 깜박하고 2주가 넘도록 책을 '임보'(임시보호)하고 있던 나의 모습이 스쳤다. 심지어 24년 12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기념해 전국 도서관에서 도서 연체자를 대상으로 특별사면을 해준 적이 있는데, 그 사면 대상자에 속한 적도 있었다.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 그 마음 내가 모르는 건 아니다. 괜히 입맛을 다셨다.


상호대차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왜 이 생각을 이제야 했나 싶었다. 대부분의 도서관에는 상호대차 기능이 있다. 인근 도서관에서 책을 구할 수 없을 때, 소속 지역구의 다른 도서관에서 가져오는 시스템이다. 직접 가지 않아도 된다. 신청만 하면 책이 기존에 있던 도서관에서 원하는 도서관으로 이동한다. 도착하는 데 이틀 정도 소요되지만, 나에겐 로켓배송보다 혁신적이다. 책 이름을 검색하고 범위를 집 근처 도서관에서 '통합'으로 바꾸었더니 아직 대출되지 않은 몇 권의 지정 도서가 나타났다. 이동 시간 이틀을 제외하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5일 남짓. 연체자의 반납을 기다리지만 않았어도 좀 더 여유롭게 읽을 수 있었을 텐데. 또 한 번 주먹이 떨렸다. 하지만 별 수 있나. 빠듯하지만 일단 해보기로 한다. 모임원들의 아쉬워하는 표정을 볼 순 없다.




'프로젝트 천 페이지'를 수행하는 기간 내내 나는 마치 책에 미친 사람처럼 짬이 나는 모든 시간에 책을 펼쳤다. 광활하고 아름다운 우주의 모습이 아이맥스 스크린에 상상한 대로 재현되었는지 누구보다 빨리 확인하고 싶은 욕심, 그리고 모임원들과 풍성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열정과 책임감이 마구 뒤섞인 결과였다. 상황은 달랐지만 두 경우 모두 마음의 기원은 같았다. 좋아하는 것을 더 격렬하게 좋아하고 싶은 마음.


벽돌만큼이나 두껍고 무거운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주로 집에서, 출퇴근길이나 점심시간 등 외출 중 잠깐씩 짬이 날 때는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읽었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창경궁 대온실 보수공사의 백서를 작성하게 된 주인공이 몇 세대에 걸쳐 얽힌 공간의 비밀을 풀어 나가는 이야기다. 데드라인을 맞춰야 한다는 의무감에 숙제를 하듯이 읽던 순간도 있었지만,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한 인파의 지하철에서 동양풍 음악을 틀어놓고 온실의 풍경을 떠올리다 보면 궁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밤이 되면 다시 헤일메리 주인공인 그레이스와 함께 미지 행성의 대기 성분을 분석하며 지구를 구하는 방법에 골몰했다. 아침 저녁 머릿 속은 쏟아지는 사건들로 태양 만큼 뜨거웠다.


창경궁을 거닐다 우주로 떠나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문득 읽기를 멈추고 남은 페이지를 재보았다. 1시간 만에 150페이지를 넘게 읽었다. 벌써 이만큼을 읽었다고? 주의가 산만한 독서 느림보에게는 놀라운 현상이었다. 독서를 훈련처럼 하다 보니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날이 갈수록 빨라지고 있었다. 출퇴근길에 넷플릭스를 키는 대신 책을 꺼내는 습관도 자리잡혔다. 이쯤에서 본의 아니게 집중력 특훈을 받게 해준 익명의 연체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밤마다 어떻게 생겼을지 떠올려보던 헤일메리 호와 로키의 3D 버전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고, 감동적이었으며, 대온실에 대해 이야기 하는 모임은 즐거웠다. 몇 번씩은 오디오가 겹쳐서 손을 들고 말을 해야 할 정도였다. 완독에 실패했다면 인물의 행동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는 모임원들의 말에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소외감은 상상하고 싶지 않다. '프로젝트 천 페이지'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비록 한동안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잠시 책을 멀리했지만 말이다.


독서 습관은 들이고 싶은데 자꾸 책을 사기만 하고 읽는 것을 미루게 된다면 조심스레 도서관 대출과 독서 모임의 조합을 제안하고 싶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사례처럼 모종의 이유를 만들어 기간을 정해서 읽어보는 것도 좋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책임감이 뛰어나며 자신과의 약속은 어겨도 타인과의 약속은 꼭 지키는 성격이라면 더욱 추천한다. 긴박한 데드라인과 함께 읽는 이들의 격려는 책 수집 아티스트도, 도서 연체 특별사면자도 완독을 가능케 한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그래도 가능하면 반납은 제때 해줬으면 좋겠다.



대출한 도서는 반납을 생활화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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