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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인미D Mar 31. 2024

76.결혼 12년 만의 첫 여행을 취소하다.

<여보, 우리 인생은 길어. 고양이 인생은 짧고.>


우리 집에는 세 마리 털복숭이(고양이)들이 있다.

결혼 후 여행을 가야 한다면 혼자 떠났다. 남편도 혼자 가거나 친구들과 다녀왔다.

둘 중 하나는 집에 있어야 했다.

내가 출장을 갈 때나, 남편이 출장을 갈 때 서로가 집에서 고양이를 돌보기 때문에 안심하고 다녀올 수 있었다.


우리 부부가 함께 여행을 떠난 게 언젠가 생각을 해봤더니 신혼여행이 마지막이었다.

사실 여행을 별로 안 좋아하기는 한다. 그래도 아주 가끔 낯선 곳에서 새로운 음식과 시선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근래 회사 업무에 신규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되며 정신없이 바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조금 더 여유가 생길 때 가자는 마음으로 숙제처럼 여행을 미루고 있었다. 

매번 이런 마음으로 여행은 다음으로 기약되곤 했다. 

그러나 늘 바빴고 어제도, 지난달도, 작년에도 항상 이 상태였다. 이러다가 평생 여행 한번 못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과감하게 여행을 결정했다.


한 번도 휴양지에 가보지 않아서 하와이로 결정했다. 게다가 하와이면 휴양과 쇼핑 모두가 가능한 만능 도시 아닌가? 맛집 천국, 따뜻한 바다, 명품 쇼핑. 나는 설레기 시작했다.


고양이를 돌봐주는 방문 탁묘 서비스도 알아보았다. 하루 1시간의 방문케어. 괜찮아 보였다.

일주일 정도는 우리 없이 남이 챙겨주는 밥을 먹고 정리된 화장실을 쓰고, 빈집 생활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문제1> 6종의 다른 사료를 각각의 그릇에 정확하게 채워줄 수 있을 것인가? 고양이들 입맛이 까다롭고 건강 상태에 따라 다양한 사료를 급여해야 한다.-> 이것은 그릇과 사료봉투에 같은 색상의 북마크로 급여매칭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제2> 매일 수액 주사를 맞는 고양이는, 미리 주사를 놓고 일주일 휴지기로 두면 된다.


문제3> 그러나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 고양이가 두 마리.

그중 한 마리는 매일 무려 5종의 약을 먹어야 한다. -> 이건 약을 미리 일주일치 소분하여 매일 한포 분량으로 종이 약포에 넣어 1회에 츄르에 섞을 수 있도록 가루로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 가루약을 먹는 냥이다. 

나머지 알약 먹는 다른 고양이는 먹을 수 있는 가루약이 따로 있기 때문에 괜찮다. (탁묘 와서 약까지 챙겨줄 수 있을지는 궁금하지만 츄르에 약 한포 섞는 것 정도는 부탁 가능하겠지? 추측임.)


문제4> 합사가 안 되는 두 마리 고양이가 있다. (7년 전 구조된 고양이를 기존 냥 한 마리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

세 마리가 함께 일주일을 함께 있다면 외로움이 덜 하겠지만, 한 마리는 다른 방에 혼자 있다. 

우리가 집에 있을 때는 중립냥 한 마리가 양쪽 영역을 오가며 혼자 있는 냥과 놀아준다. 하지만 우리가 없다면 일정 시간 간격으로 문을 열어 두 고양이를 만나게 할 수가 없다. 한 마리는 일주일 내내 혼자 방에 갇혀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마음이 아파져서 슬슬 지친다. 여행? 꼭 필요한가!!!!???


문제5> 게다가 하필 요새 너무너무 바쁘다. 여행을 위해 비우는 5일의 휴가가 부담스럽다.

심지어 휴가 가기 전까지 야근을 불사해도 이 일들을 다 끝낼 수 있을까 확신이 안 간다. 5일간의 공석을 위한 업무리스트를 정리하다 보니, 기가 찬다.

최대한 동료들에게 업무가 넘어가지 않게 내 선에서 끝내고 싶다. 공석 중간에 생기는 업무 변수들은 어떤 협력사에 보낼 것인지 분류도 완벽하게 마쳤다.

나는 이제 하와이에 가서도 수많은 이슈를 전화와 문자로 마칠 수 있는 사전 준비를 마쳤다. 완벽하다!!!


그러나 준비가 진행될수록 피곤해지고 기가 빨린다.

즐겁다기보다 벌써 걱정스럽고 괴롭다. 

진행 중인 업무리스트를 보다 보니 아득하다. 남에게 업무로 신세 지고 싶지도 않고 아쉬운 소리 하기도 싫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냐옹이들. 일주일이나 못 보다니.


슬쩍 남편을 떠봤다.

"업무 많지? 괜찮겠어?"

남편도 일이 좀 몰려있는 상태라고 했다. 그럼, 가지 말까??

쐐기 박는 나의 마지막 한마디.

"여보, 우리 인생은 길어. 고양이 인생은 짧고."


그렇게 우리는 여행을 취소했다.

일도 많지만 고양이들 어떡하냐며. 어찌 감히 아픈 애를 남의 손에 맡기냐며.


냥때메 집순이가 된 건지 집순이라 냥을 모시게 된 건지.

아마 두 가지 상황이 서로 시너지가 되어 나는 '프로 집순이'가 되었다.


그렇게 결혼 12년째 여행은 불발이 되고, 결혼 20년 차 여행을 기약한다.



반려동물 죽음을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이미 13세, 12세, 9세(추정)의 냥을 모시는 중이다.

세마리 중 마지막 나옹이가 무지개를 건너는 해, 우리는 펫로스를 달래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여행이 기대되기보다 생각만 해도 너무 슬프고 두렵다.


그래서 슬쩍 다시 한번 남편을 떠봤다. 지금 냐옹이 조합이 1세대라면, 나중에 2세대로 또 모셔보는 건 어때?

남편이 씨익 웃는다. (아마 동의일 것이다.)

20년을 꼼짝없이 붙잡혀 사는 것이 쉽지 않지만, 매일 그들이 주는 기쁨이 어마무시하기 때문에...

기대도 걱정도 된다. 

1세대가 끝나는 것도, 여행을 해볼 수 있게 되는 것도, 2세대가 시작되는 것도.

2세대를 모시게 된다면 3세대는 없을듯 하다.

2세대가 시작되는 시점은 50대 초중반 일테고, 끝나는 시점에 이미 우리 부부는 70대가 되어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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