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를 거절한다고 손해는 아닐..오히려 이익일지도?>
덤을 거절한다는 건 왠지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덤이라는 건 원래 내 소유 계획에서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게 없다고 해도 큰 손해는 아니다. 그걸 가져야 이익으로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사실 덤이라는 게 일확천금 같은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가벼운 것들이 덤이라는 이름으로 오갈 뿐이다.
덤은 받는다고 인생에 큰 이익이 되거나, 안 받는다고 삶이 흔들릴만한 손실은 아니기 때문에 덤의 필요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불필요한 서비스나 물건을 거절하면서 오히려 여유와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덤 하나 받는 걸로 뭐가 그렇게 깐깐하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상의 사소한 덤을 획득하는 것이 기본 성정으로 굳어질 때, 남들이 보기 불편한 상황을 자주 연출하게 된다. 공짜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그 행동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반복된 행동은 성향으로 굳혀진다.
한마디로 본인만 모르지 주변에서는 눈살을 찌푸릴 인성으로 변해간다.
덤이 당연하게 되면, 살면서 늘 공짜를 바라고 지불가치 이상의 이익을 챙기기에 혈안이 된다.
지속된 덤이 오히려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덤은 주는 쪽에서 선택하는 일이며, 안 줘도 그만인데 습관적으로 요구하는 뻔뻔함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들은 덤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자주 잊는다. 심지어 맡겨놓은 듯 덤이 없다는 것에 분노하기도 한다.
우리는 살아가며 항상 본전 치기나 이익만을 얻을 수는 없다.
손해를 봐도 양보해야 할 때가 있으며, 남을 배려해서 내 몫을 포기해야 할 순간이 많다.
그러나 덤이 가치관으로 박힌 사람은 남을 생각해 볼 겨를이 없다. 그 순간 본인이 얼마나 탐욕적이고 질 떨어지는지 느끼지 못하고 그저 눈앞의 이익을 다 갖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단 하나의 손해도 허용하지 않기에 남을 배려하거나 양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어떻게든 덤을 획득해 만족스럽고 탐욕적인 미소로 승리의 브이를 그리며 자리를 떠난다. 공짜 물건에 대한 집착은 타인 배려라는 사고방식마저 붕괴시킨다.
이들에게 배려나 양보는 손해를 의미하므로 모든 순간에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한다.
점점 염치조차 모두 증발한 인격이 되어간다. 공짜 물건을 탐하는 행동이 반복되며 그것이 사고방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짜 좀비의 정체성으로 고착되니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물건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조차 그렇게 바뀐다는 게. 오로지 나만 이득이면 세상이 망해도 상관없다는 극단의 이기심.
사실 공짜나 덤이 없다고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물질은 그냥 1:1의 교환 등가를 누리는 것이 기본이다.
뭘 더 가지려고, 심지어 남의 것을 빼앗고 남에게 손해를 끼쳐서라도 본인의 작은 욕망을 충족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다.
이들의 본능적인 자기 이익 챙기기는 삶의 중심기조가 되어 아무것도 타인을 위해 배려할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간다. 아예 그 성향에 메몰 되어 스스로 부끄러운 줄 모른다. 공짜 쟁취와 타인 착취의 반복은 스스로를 저급한 인간으로 전락시킨다.
덤을 거절하면 우아하고 담백한 성정을 유지할 수 있다. 물건을 사양하는 단순한 행동에서 이타심과 배려심이 자라난다.
정말 무엇이 필요하다면 덤이나 남의 것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당당하게 구입해서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우리들은 대체로 멀쩡하게 사회생활 하고 경제력을 갖고 있으니 그 소소한 것도 못 살만큼 찢어지게 가난하지가 않다.
사소한데 집착하여 자아를 하격으로 떨어트릴 필요가 전혀 없다.
스스로 조금만 경계를 게을리해도 공짜 바라기, 남의 이득 빼앗기가 체득될 수 있다. 이들은 공짜는 모두 내 거라는 인식이 정신에 너무 당연하게 박혀있어 자신을 검열할 객관성을 상실했다. 반복된 행동은 무의식을 지배하고 그 행동 자체가 자신이 되는 것이다.
상사가 시키는 업무 메신저에는 답을 안 하지만 공짜나 나눔 공지에는 1등으로 지원 메시지를 보내는 선택적
답장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오죽하면 업무 요청 시 첫 문장을 '공짜~! 무료로 나눕니다.'로 작성할까도 생각해 봤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뭔가 덤으로 얻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나중에 그 빚을 갚아야 할 일이 있다.
일상에서 대체로 사소한 것들을 거절하는 습관을 가지면 굳이 남의 것이 내 것처럼 보이지 않고 공짜를 못 얻었다고 억울하고 배 아플 일이 없다.
원래 내가 소유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담백하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대체로 그 덤들은 내게 필요 없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정말 필요했으면 진작 돈을 주고 샀지 언제 얻어걸릴지 모를 횡재를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니.
사소한 것에 불같이 눈 뜨고 이득을 챙기기 위해 온 정신을 곤두세우고 아등바등해서 얻어봐야 긴 인생의 관점에 있어서 유의미한 이익은 아니다.
그 악착같은 쟁취의 에너지를 다른 의미 있는 것에 쓰는 편이 낫다.
나를 발전시키는 노력이나 새로운 공부에 힘을 쓰면 공짜 개이득 보다 더 중요한 멋지게 성장하는 자신을 얻게 된다.
그다지 필요 없는 물건 하나가 아니라 나에게 꼭 필요한 능력을 스스로 함양하는 것이 낫다.
사소한데 힘 빼는 사람들 보며 참 안타깝다. 일을 그렇게 열정적으로 했다면 좋았을걸.
직접 노력해서 만드는 성취보다 타인 착취라는 불로소득이 쉽긴 하다. 삶을 그냥 쉽게 살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성취는 영원히 나의 소유지만, 공짜 물건은 잠시 나를 스쳐가 없어지는 것이다.
공짜를 바라며 아등바등 애쓰는 모습이 근검절약과는 다르게, 못나고 격이 떨어져 보이는 이유가 있다.
근검절약은 스스로를 절제하는 능동적인 움직임이라면, 공짜를 얻어내려는 행동은 타인을 압박하여 취하는 착취다. 공짜에 집착하다가 손버릇이 나빠지는 사람도 종종 봤다.
이건 능력을 바탕으로 경쟁하여 얻는 취득도 아니며 그냥 못난 자아를 그대로 노출하여 욕심부리는 흉한 모습의 전형일뿐이다.
공짜로 얻은걸 근검절약이라는 자기만족의 착각 속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또한 본인이 그 공짜 이득을 얻음으로써 누군가는 손해를 입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된다.
요즘 배달음식 앱을 사용하는 일부 소비자들의 공짜 서비스 요청은 도가 지나치단 생각이 자주 든다. 그들이 공짜 1개를 얻을 때 자영업자들은 손해가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서비스를 주는 건 사업자의 투자라고 합리화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공짜를 노린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니다. 서비스는 주는 입장에서 선택하는 것이지 받는 사람이 먼저 요구하는 게 아니다.
필요 없는 건 거절하고 덜어내는 삶.
덤을 거절해 보는 것으로 시작은 충분하다.
어린 시절 시장에서 악착같이 흥정하며 물건을 더 담아내는 어른들 모습들을 보며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다행히 나는 그럼 중년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세일 상품 호객행위에 현혹되지 않고 내가 살 상품을 선택하고, 1+1 증정 상품도 거절하는 고지식한 사람이 되었다.
공짜와 품위는 양립하기가 힘들다.
품위는 양보와 덜어냄에서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담백하고 정직하게 내가 선택한 것을 스스로 얻는 삶에서 더 많은 가치를 얻을 수 있다.
내가 못 내려놨던 덤이 있었다.
비행기를 타면 기내식을 줄 때까지 눈을 부릅뜨고 식사를 챙겨 먹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바꿔준 것은 남편이다.
남편은 기내식을 잘 먹지 않는다. 휴식이 중요하면 밥 보다 잠을 선택했다.
10시간 이상의 비행 중에 단 한 끼도 안 먹고 잠만 자기도 한다.
사실 기내식을 다 챙겨 먹으려면 자다깸을 반복하며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계속 섭취를 해야 한다.
오히려 몸이 붓고 속은 불편하고 수면도 부족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깔끔하게 휴식을 선택한 남편은 속도 편하고 숙면으로 몸도 가볍게 도착할 수 있다.
물론 비행기 삯에 식대가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꼭 기어이 무조건 챙겨 먹어야 이익이 아니다. 내 몸이 원하는 방식으로 선택하는 것이 더 이익인 것이다. 기내식을 다 챙겨 먹으려면 피곤하다. 남편은 늘 하차할 때 가벼워 보인다.
불필요한 서비스를 거절하면서 오히려 여유와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마치 호캉스에서 모든 식사와 서비스를 제대로 즐기면 몹시 피곤한 것처럼 기내식을 악착같이 다 챙겨 먹으면 피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