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으로 유흥하는 삶>
요즘은 이 나이에 그걸 배워 뭘 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이 줄었다.
어떤 세대에서도 새로운 공부는 삶을 풍요롭게 하기에 주저 없이 시도한다. 30~40대가 악기하나를 배우거나, 미대입시라는 목적 없이 단지 즐기기 위해 그림을 배우는 것은 이상할 일도 아니다.
이미 100세 시대를 예견한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70~80대라도 못해 본 분야에 도전하고 있다. 예전의 노년은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며 남은 생을 견디는 것으로 보내는 모습이었다면, 요즘 시니어는 모든 시간을 풍요롭게 즐기는 느낌이다. 오히려 3~40대보다 더 흥미롭게 살고 있다.
최근 '순천할머니들의 그림일기'를 읽었다.
80대가 넘어서 한글을 처음 배우게 되고 자신의 이름을 쓰고 주소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까진 생활의 필수인 한글을 익히며 삶이 얼마나 편리해졌을까만 생각하게 되었다. 실용성 관점에서 단 1년이 남은 삶이라도 글을 배우게 되면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마지막 일기나 유언장을 쓸 수도 있고, 생활을 정리하고 관리하는데도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많은 이점이 있을 것이다. 실제 할머니들은 글을 배운 이후 관공서나 은행 업무를 스스로 해내며 삶의 주체성을 가진 것에 만족이 컸다.
그러나 할머니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나는 한방 먹었다.
모든 배움은 실용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할머니들은 그림을 배우고 시를 쓰며 소녀처럼 수줍게 웃는다.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 생각들, 주변 친구들과 가족에 대한 마음을 그려낸다.
90이 되어 숙제를 하고 구구단을 외우느라 바쁘다며 오히려 즐거워했다. 배움 자체가 기쁨이 되었다. 시험을 치고 결과를 내야 할 압박이 없다.
아기처럼 너무나 순수한 글과 그림에 남들 보기에 못 배우고 살아내느라 힘들었을 안타까운 사연들이지만, 정작 자신은 이제라도 글을 읽을 수 있다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가슴이 먹먹해지게 됐다.
배우는 것은 어떤 실용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남은 세월의 길이와 상관없이 당장 오늘을 즐겁고 풍요롭게 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글 하나 배웠는데 살아가는 용기가 생겼고, 그림 하나 그렸는데 죽은 남편을 추억하며 고마워하며 자신이 살아온 삶의 행복을 깨달았다. 할머니들은 글과 숫자를 배우고 그림과 시를 쓰며 남은 인생에서 더 따뜻한 하루하루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살아내느라 바빴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즐기기도 모자란 시간을 보내시길 바라게 된다.
80세가 되려면 아직 우리는 살아온 만큼에서 2배 혹은 3배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요즘 주변을 돌아보면 어떤 나이의 배움과 도전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문제는 현재의 시간과 여유가 발목을 잡는다.
한창 경제활동을 할 직장인들은 "바빠서 다음에 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오히려 새로운 공부를 가로막는다.
지금 바쁜 시기만 잘 넘기고 나중에 여유되면 해보자는 마음을 먹는다면 생각보다 그런 시기가 안 올 수도 있다. 통시간 확보만을 생각하면 정말 은퇴 이후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지금 뭔가를 시작하면 80대가 될 때까지 40~50년을 재밌게 보낼 텐데, 하루살이 직장인들은 자꾸만 미루게 된다. 나중을 기약하면서.
80대까지 기다릴게 아니라면 지금 짬이 없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당장 조금씩 해봐야 한다.
일정 시간을 통으로 가져야만 뭔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청장년의 시기에는 '짜투리 시간'을 잘 써야 배우고 즐기는 시간을 만들 수 있다.
나중에 여유될 때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무엇을 배우는 건 '풀타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 '의지와 결심'이 필요할 뿐이다.
매일의 시간에 짬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배우거나 시작할 1~2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10분은 만들 수 있다. 내가 정말 바쁜 시기에도 독서와 요가를 매일 하고 싶어서 쓴 방법이다. 아침에 10분, 야근하고 돌아온 밤에 5분을 투자해 하루 15분은 수련을 할 수 있었다. 출근 전에 종이 책을 한 문단(20~30초)만 읽고 집에서 나섰다. 직장에서는 회의를 기다리거나 엘리베이터를 탈 때 폰으로 전자책을 읽었다. 한 문단의 힘은 컸다. 짬낸 시간도 모으면 상당했던 게 저렇게 한 달이면 한 권정도는 완독 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배우고 시작할 수 있는 타이밍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 계속 미뤘다가는 70대에도 여유가 없다고 안 할 수도 있다. 즐길 수 있는 30~40년의 세월도 놓친 채로.
지금하고 있는 생업과 육아가 바쁠수록 나중을 위해 미뤄두기만 해서는 안된다.
바쁜 중에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들이 마음속에 더 많이 생긴다. 열정의 관성인데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많을수록 더 많은 것을 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시험 기간에 하고 싶은게 더 많이 생기는것 같은 원리)
게다가 지금은 바쁘지만 나중에 해보자라고 죄책감 없이 미루며 정신승리하기도 좋다. 게으름과 무기력에도 관성이 있듯, 분주함에도 관성이 있다. 지금 한창 사회에서 잘 나가고 바쁜 시기일수록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이 시기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나중에 하고 싶은 열정이 없을때도 습관적으로 즐길 취미가 있다면 괜찮지만 열정이 없어질때 평소에 즐기던 유흥조차 없다면 그야말로 무기력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놀아본 놈이 공부할 줄 알고 배운 놈이 잘 논다. 원래 공부와 여가(유흥)은 같은 어원이다. 스콜라scholar의 라틴어는 학문과 여가라는 것을 통칭한다. 우리는 '공부하듯 놀고, 놀듯 배워야'한다.
배움으로 유흥하는 삶을 지속할 수 있다.
청장년의 직장인 시기가 돈 버느라 육아하랴 가장 바쁘겠지만, 그 와중에 하고 싶은 열망도 가장 폭발하는 시기이다.
생각보다 인생은 길다. 더이상 미루지 않으면 좋겠다.
하루하루 쫓겨 아무것도 안 하기엔 인생은 그렇게 짧지 않다.
70대가 되고 나서 생각보다 그 이후 20년이 더 있다는 것을 알면, 그냥 보낼 수가 없다.
우리가 10~30세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성취하고 바삐 살았는지 생각해 보면 20년은 상당히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어떤 나이에도 배움은 늦지 않고 생의 시간은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다.
무언가를 하기에는 시기가 조금 늦다거나 시간이 짧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면 더욱 지루하고 긴 시간을 견뎌야 한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흘러간다.
매일의 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달려가다 보면 별로 남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왜 그때 그걸 안 했지? 돌아보며 후회하게 된다.
그러나 왜 안 했지?라는 생각이 들 때조차도 늦은 것은 아니다. 후회하는 그 순간에도 당장 시작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지금 10년 배워도 나머지 인생 3~40년을 더 즐길 수 있다.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해보는 것이 낫다. 물론 나이 주기별로 새로운 관심사가 생긴다면 그때 역시 미룰 필요가 없다.
관심이 생길 때 바로 시작하면 된다. 나이가 80이라 해도 적어도 10년은 그 배움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10년이 아니라도 단 1년이 남았더라도 무료히 시간을 죽이며 보내기보다 매일을 새로움을 알아가는 설렘으로 보낼 수 있다.
1931년 조지오웰이 잡지에 게재한 에세이 '*스파이크'에 나온 말이다.
(*스파이크는 부랑자, 노숙자 임시 수용소를 말함)
"나는 따분함이야 말로 부랑자 최대의 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허기나 불편보다도 더한 것이지 싶다. ~~ 때문에 삶의 너무나 많은 부분을 아무 일도 안 하면서 보내야 하는 그들로선 따분함으로 인한 고통이 더 큰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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