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가 아니라, 지구적인 관점으로 봐도 지금 내 문제는 너무 사소한걸>
24. 9/13(금)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며 살기 어려운 세상이다.
한 밤중도 대낮처럼 밝아 시계를 봐야 겨우 때를 인지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감각은 시간을 인지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밤에도 잠을 못 이루고 아침이 되었는데도 눈을 뜨기가 무척 힘들다.
생체리듬의 자연스러움을 잃게 됐다.
어두워지는 순간에 하늘을 보며 어둠을 관찰할 시간이 없다. 정신 차리면 ‘밤이구나.’ 또 정신 차리면 ‘아침이구나.’ 시간의 흐름을 대략 짐작만 할 뿐이다.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하고 있지만 밤의 길이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여름이 끝나고 있다.
계절의 변화는 온도보다 밤의 길이를 통해 깨닫곤 한다.
점점 출근길이 어두워지는 느낌이다. 퇴근길도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다.
일단 출근을 하고 나면 퇴근할 때까지 건물 밖에 나갈 일이 거의 없다. 낮이 어떻게 지나가버리는지 모르겠다.
현대인들은 실내생활로 대부분의 하루를 시간을 보낸다. 자연의 흐름을 몸으로 느낄 수가 없다. 우리는 시계만 바라보며 사는 것에 익숙하다.
해가지고 해가 뜨는 과정을 느긋하게 기다리고 바라볼 여유가 없다.
대학시절 한 선배의 고향 시골집에 MT를 간 적이 있다.
어설픈 농활(농촌 봉사활동)을 끝내고, 이른 저녁을 맞이했다.
옥상 평상에 앉아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해가 점점 지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때까지도 야외에서 해가 지고 어두워지는 것을 몸소 느껴볼 일이 별로 없었다. 하늘이 채 어두워지지 않았는데 아직 하늘 끝에 어스름 빛이 남았는데 세상은 캄캄했다.
시골의 밤에는 인공 빛이 거의 없다. 사방의 거리를 알 수 없을 만큼 세상에서 가장 까만 캄캄함을 느꼈다.
대화 중에도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과 수없이 많은 별들에 자꾸만 눈이 갔다. 시골의 밤은 별과 달이 가로등만큼 밝다는 걸 느꼈다.
어두움 속에 몸을 맡기는데 이유 없이 참 포근하고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시시콜콜한 대화, 따뜻한 밤이었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인 거 같다.
그 후 나는 해가 지는 것을 느낄새 없이 살아왔다. 내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도 세상은 알아서 밝아지고 어두워졌고 더워졌다 추워졌다.
한 번은 대학 친구와 캄보디아에 여행을 갔다.
나는 처음으로 해가 뜨기도 전부터 부지런히 일어나 앙코르와트 사원에 앉아 일출의 시간을 기다렸다. 그 기다리는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일출이 다가오자 아직 해가 보이지 않았지만 세상은 점점 밝아지는 기운이 느껴졌다. 사실 그전까지는 태양이 눈앞에 나타나야 세상이 밝아지는 줄 알았다.
더운 나라였지만 해뜨기 전이라 조금 쌀쌀했다. 사원의 동쪽 상단 가파른 벼랑 끝 계단에 앉아 태양을 기다렸다.
어제도 떴고 오늘도 뜨고 내일도 뜰 평범한 태양의 시간을.
그렇게 숲에서부터 앙코르와트 건물에 비정형적으로 금색으로 물들이며 천국 같은 빛줄기 형태를 자랑하며 해가 떠 올랐다. 햇살이 정말로 빛줄기 모양이었고, 빛에는 반짝이는 가루를 포함하고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현실이었다.
건물의 굴곡들과 노란 흙땅, 그리고 나무들의 유기적인 형태에 따라 빛이 스며드는 모습이 너무나도 신비로웠다.
사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서 내가 아는 일출은 바닷가에서 떠오르는 수평선의 태양뿐이었다.
물 위에 선형으로 떠오르는 태양만 보다가, 온갖 숲과 건축물의 모양대로 구석구석 빛이 움직여 채우는 느낌을 보니 벅차오르는 기분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 같은 냉혈한이 눈물을 흘리고 싶을 만큼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그 순간 살아있는 모든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태양이 떠오르고 지는 시간을 몸소 겪는 순간에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세상 속 인간의 문제는 너무 사소한 것들이라는 것을.
그 순간의 감동은 우리 일상의 고민들을 별것 아니게 느껴지게 했다.
그래서 너무 힘들 때는 삶의 스코프를 좀 넓게 해서 멀리 떨어져서 크게 보라는 것 같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너무나도 미미하고, 지구적인 관점에서 봐도 나의 사소한 고민 따위는 자연 앞에 별거 아닌 일들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괴로워하고 힘들게 살고 있다.
왜일까?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못 본 지 너무 오래됐다.
나의 시선은 너무도 옹졸하게 나만 바라보고 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고 내 속에 갇혀 더욱 괴로워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는 더 크고 대단하고 웅장한 힘이 있는데, 그걸 잊고 살다 보니 자꾸 사소한 인간사에 목매어…죽니사니 하고 있다.
알고 보면 이건 전부 별거 아니고, 최대 50년 이내로 우리 모두 죽고 나면 하나같이 없었던 일이 될 건데 말이다.
오늘도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
추석을 앞두고 오랜만에 긴 연휴가 이어지겠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여 방구석 ‘슬픔이’가 될 듯하다.
우주적 체감 시간으로 겨우 1초도 안 살면서 뭐 하러 저리 발버둥 치나 하겠지만, 나는 이 인간사 현실에서 벗어날 방법 따윈 전혀 모르겠다.
그래도 적극 날씨를 느껴보기 위해 오늘은 서쪽 창가에 앉아, 밖에 해가 지는 것을 눈으로 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추석이라고 회사에서 조금 빨리 퇴근시켜줬다.)
비가 오는 흐린 날이라 일몰을 보기는 힘들지만 세상이 핑크로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있다.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