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한 도피>
나는 요즘 9시 언저리쯤 잠자리에 들고 있다. 요즘 초등학생도 이 시간에는 안 잔다고 한다.
여기저기 힘 빠지는 일이 동시다발로 발생하니 기운이 쫙 빠진다. 내 손으로 바꿀 수 없는 일들을 겪어야 할 때는 작은 공처럼 웅크리며 그 시간들이 지나길 바랄 뿐이다.
힘든 일을 겪을 때 조용히 숨죽이며 삶의 형태만 유지하면 언젠가 기회는 다시 온다는 말이 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피할 방법이 잠 밖에 없어서 나는 잠을 아주 많이 자고 있다.
숨죽이며 삶의 형태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깨어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나를 해치거나 우울한 감정에 빠질 상황이 길어질지도 모른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야 끝나는 괴로움이라면, 겨울잠처럼 잠이라도 푹 자고 이 시간을 보내보면 괜찮지 않을까?
그저 현실에서 잠으로써 건전하게 도피하며 이 시간들이 흘러가길 바라고 있다.
영화 '클릭'처럼 힘든 지금 이 시간을 빠르게 감아 미래로 가기가 가능하다면 '앞으로 가기 버튼'을 눌러 버리고 싶지만 인생에 그런 기능은 없다.
그러나 비슷한 방법은 있다. 잠을 아주 많이 자고 나면 빨리 가기 버튼을 살짝 누른 기분이 든다.
퇴근하고 요가를 하고 샤워한 뒤 저녁 겸 주전부리를 맥주와 함께하면 벌써 잘 시간이다. 다른 일을 할 틈이 없다. 9시에 잠을 자기 위해서는 퇴근 이후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
자칫하면 10시, 11시를 넘기기 쉽기 때문이다.
도피를 위해 나는 더욱더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었다.
퇴근 후 이른 수면은 속.도.전이다. 요가복, 속옷, 잠옷을 거실에 던져놓고 순서대로 할 일을 빠르게 마친다. 다음날 입을 옷까지 준비해 둔 뒤 잽싸게 잠자리에 들어간다.
물론 나는 기혼 여성이라 9시 수면을 위해 남편의 협조와 설득이 필요했다. 이 도피생활을 인정받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인간은 습관의 동물 아닌가.
처음에는 버럭 화를 내던 남편도 요즘은 10시만 되어도 졸린다고 알아서 미리 잠자리에 들고 있다.
보통 이 정도 스트레스였다면 병원을 다니거나 약을 먹어야 했겠지만, 오히려 이 건전한 도피를 통해 생각보다 건강하고 멀쩡해 보이는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
꼭 현실과 맞서 싸울 필요는 없다. 사실 나는 늘 현실을 이겨먹기 위해 온몸으로 부딪히며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힘들면 도망가거나, 쉬어도 괜찮다. 인생이 전쟁도 아니고.
현실을 마주하여 싸울 힘이 없어서 스트레스를 잠으로 풀고 있다.
전쟁이 아니라 겨울잠을 선택했다.
그렇게 일찍 자서 늦게 일어나는 잠순이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집순이에 잠순이까지 되어서 정말 세상과의 단절 그 자체의 삶이다. 그러나 오히려 클린해진 느낌이다.
많은 자극으로부터 멀어졌고 그냥 조용히 회복의 시간을 가지는 중이니까.
퇴근하고 다른 걸 할 시간이 없다. 빨리 자기 위한 목표로 모든 생활이 조정되었다.
그렇게 일찍 자면 일찍 일어날 것 같지만 그냥 쭉 많이 자고 있다. 평균 9시간 정도.
잠을 많이 자니 피부에서 광이 나고 있다. 좋은 약 다 필요 없다. 정말로 잠이 보약이긴 한가 보다.
사실 살아오며 대부분, 잠을 많이 자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할 일이나 목표를 위해 잠을 줄였고 밤을 샜다. 늘 예민했고 피곤에 쩔어서 날이 서 있었다.
물론 그 시간들이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노력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왔기 때문에.
그런데 너무 힘들면, 이제 좀 쉬거나 도망쳐도 된다.
매번 싸워서 이기고 쟁취해야만 인생인가...
올해를 나는 쉬어가는 페이지로 두고 있다.
솔직히 이렇게 대충 시간을 버리며 사는 내가 한심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지금 이 기분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자는 것 말고는 없다.
시간을 버려본 적은 없지만 늘 효율만 찾을 필요가 있을까.
잠의 휴식이 있기에 겨우겨우 다음 날도 견디며 지내고 있다.
사실 겨우라기보다 요즘 컨디션이 너무 좋다.
이 시간도 잠으로 버려지기보다 회복의 시간으로 의미를 가져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