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는 천천히 오래 유흥처럼 즐깁니다.>
평소에 나는 크게 배가 고프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먹는 걸 싫어하지는 않는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아주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매 한 끼가 중요하다. 메뉴에서부터 함께 먹는 사람까지…
허기져서 아무거나 밀어 넣지 않는다는 말.
솔직히 의식 없이 식사를 건너뛰면 하루이틀 굶기도 가능하다. 크게 배가 고픈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에.
음식 앞에 인내력이 강해 보이지만 그저 남들만큼 배가 안 고프기 때문일 거다.
나에게 식사는 배가 고파서 하는 게 아닌, 그저 맛있는 것이 먹고 싶어서 하는 유흥이다.
남편이 내가 좋아하는 배달음식을 주문했다. 보통은 부부가 함께 먹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때도 많다.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할 일을 먼저 하고 식사를 뒤로 미룬다.
남편은 당장 먹어야 하는 사람이므로 식사를 따로 하기도 한다.
가령 낮잠을 자려고 했다면 잠을 자고 일어나서, 요가를 하려고 했다면 수련을 마치고 나서, 샤워를 하기 직전이라면 말끔하게 씻은 뒤에 혼자 남은 식사를 한다.
차려진 음식을 외면하는 절제력 대단한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당장 먹겠다는 큰 의식이 없다.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밥상머리 교육 욕할지도 모르지만, 워낙에 입이 짧아 어머니께서는 내 식사 방식에 대한 자유로움을 이해해 주셨다.(포기했다가 맞을지도.)
어머니가 밥을 차려놓고 먹으라고 해도 하던 일에 집중하다 보면 먹어야겠다고 의식을 전환하지 못했다.
티비 만화에 빠져있으면 소파 앞에, 공부를 하고 있으면 책상 앞에 밥을 따로 차려줘야 밥을 먹어야겠다는 것을 깨닫곤 했다.
어머니는 항상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다고 재촉하지만... 나는 늘 할 일이 우선이었다.
사실 식욕이 없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어머니는 내게 어떻게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풍기는데 낮잠을 잔다고 들어가는지 그게 신기하다고 했다.
회사에서 오전 근무 중 10시만 되어도 사람들이 배가 고프다고 한다.
나는 "아~배고프다."는 말이 그냥 날씨 좋다는 말처럼 할 말 없는 직장동료에게 건네는 아이스브레이킹 같은 문장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배가 고팠다.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진짜 배가 고프다고 했다.
사실 회사에서 점심시간이 되어도 나는 배가 거의 고프지 않다.
아침을 챙겨 먹는 스타일도 아니고 전날부터 이어진 16시간 가까운 공복상태다. 아침엔 더욱 입맛이 없기 때문에 뭘 먹기가 거북하다.
거기에 출근을 하면 아예 식욕이 사라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직장생활 20년 가까이했지만 여전히 회사에 오면 예민해져서 그나마 휴일에는 약간 있던 식욕마저 없어진다.
맛이 없는 걸 먹어야 한다면 굳이… 뭘 먹지 않아도 좋다.
굶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보통 사람들이 굶는 걸 어려워한다는 것을 잘 몰랐다.
눈치 없이 내내 굶고 일에 집중하다가 주변 사람들이 배가 고픈지 돌아보지 못한 적도 많다.
촬영장에서 스탭들과 한참 촬영을 하는데 내가 그만 끊고 식사하자고 안 해서 혹은 다 끝내고 식사하자고 말해서 눈치를 보다가 굶게 되고 그게 힘들었다고 뒤늦게서야 말해주던 실장님도 있었다.
촬영 중 식사라면 배달된 도시락 혹은 중식일 뿐, 배가 고프다고 그걸 먹고 싶지 않았다.
촬영을 빠르게 끝내고 밖에 나가 맛있는 걸 먹고 싶었다. 보통 촬영은 청담에서 이루어지므로 그 근방 맛집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요즘은 타인을 위해 촬영 중 식사를 꼭 챙기기로 했다. 누군가는 맛보다 허기 달래기가 중요할 수도 있다.
실장님 말로는 쫄쫄 굶고 지친 촬영을 끝내고 나가는 내 발걸음이 어쩐지 늘 행복해 보였다고 한다.
그게 청담 맛집 탐방이었다는 것을 알고 촬영 중 한 번은 꽤 비싼 해목 장어도시락을 시켜줬다. 엄청난 웨이팅에 배달도 안되던 상황이라 스탭 한 명이 직접 가서 포장으로 받아왔다. 감지덕지다.
배가 고프지 않은걸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맛있는 것을 좋아하므로 입에 맞는 음식이 있으면 상당히 폭식을 하는 스타일이다.
천천히 오래 많이~즐기며 먹는 건 나만의 식사유흥이다.
대체로 배가 안 고프므로 허기져서 챙겨 먹기보다는 의식적으로 때가 되어서 먹어야 할 때도 있다.
사회화가 탑재된 식욕. 주변에서 불편해할까 봐 열심히 먹는 척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늦잠을 자거나 운동을 안 해서 배가 안 고프냐 물을 수도 있지만.
주말에도 아침 6시쯤 기상해서 운동하고 집에 와도 오후까지 쭉 굶는 게 그냥 일상적인 패턴이다.
이 세상에는 딱히 배가 안 고픈 사람도 있는 것이다.
마음이 편안해도 배가 안 고픈 나인데,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있다면 백 퍼센트 아예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나는 늘 공복이었다.
하다못해 이삿날에도 내가 짐을 옮기는 것도 아니면서 신경 쓰느라, 음식점에서 밥을 시켜놓고 한두 입 대고 내려놓고 말았다. 도저히 목구멍에 안 넘어가서.
내 성격상 안 먹으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하도 밥 먹으러 가자고 재촉해서.
힘들고 괴로워도 잘 먹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내 정신적 고통은 식욕 감퇴와 동반되니 상당히 힘들다. 억지로 먹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