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여행의 기억은 다시 별이 되고.

한 달간의 태국여행 첫 번째 에세이를 마치며.

by 하임

매일 밤 잠들기 전 동네 마실하듯 걷던 카오산 로드.


오늘의 카오산 로드는 여느 때와 다른 무거움이 있다.

여전히 가게의 불빛은 반짝이고, 신나는 음악의 강한 비트를 배경으로 여행자들과 호객꾼들이 소란스럽게 뒤섞여 있지만, 활기 가득한 이곳 어딘가엔 어둠보다 짙은 쓸쓸한 그림자가 맴돈다. 어쩌면 마지막 산책이 될지도 모른다는 아쉬움 때문일까.

나는 그 특별한 풍경을 가슴에 새기기 위해 발걸음을 늦춘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그 국적만큼이나 각기 다른 모습들, 남녀노소, 여자 같은 남자, 남자 같은 여자, 세월의 흔적이 묻은 오래된 상점들 사이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최근 완공된 세련된 호텔, TV에서나 볼법한 다채로운 길거리 음식들.

한 달 조금 넘는 시간을 함께한 태국은 한마디로 '다양함의 천국'이었다.


흔히들 방콕을 '여행자의 천국'이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조금 더 큰 범위로 '다양함의 천국'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의 한정된 공간 속에서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접할 수 있는 도시가 또 있을까.

정겨운 버스 안내원이 요금을 직접 수납하고, 냉방 시스템이라곤 열린 창문이 전부인 버스와 기차. 반면에 한국의 그것처럼 쾌적한 대중교통 또한 공존하는 도시이다. 대형 쇼핑몰과 명품샵이 즐비한 현대적인 지역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카오산 로드가 함께 존재한다.

여행자는 온탕과 냉탕을 오가듯 자연스럽게 현재와 과거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런 다양함 덕분일까. 어딜 가도 쉽게 마주치는 트랜스젠더도 태국에선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행자의 눈에는 그들도 그저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질 뿐이다.


아마도 태국을 '여행자의 천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러한 다양함이 혼돈 속의 질서처럼 자연스러운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이 독특한 조화는 상실했던 과거의 무언가를 되찾을 영감이 준다.


나는 매끌렁행 기차에서 어린 시절 내 모습을 보았고, 카오산 로드의 라이브 바에선 가슴 한편에 묻어두었던 학창 시절의 꿈을 다시 만났다. 이 모든 다양함의 공존 속에서 다름도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이해를 배웠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이 순간에도 자꾸만 발걸음이 느려지고, 뒤를 돌아보게 되는 건 이런 색다른 경험 때문일 것이다. 혹시 내가 아직 찾지 못한 다른 것이 아주 가까운 곳에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내 것이었지만, 과거의 어디쯤에서 잃어버린-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나의 퍼즐 조각들. 며칠만 더 머문다면 이곳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제는 더 버틸 체력도 여행 비용도 없다.

무엇보다도 해야 할 산더미 같은 일들이 일상에서 대기하고 있다.



짧은 '마지막' 산책을 마친 후, 호텔에서 맡겨 놓은 캐리어를 돌려받고 밖으로 나선다.

나는 짐을 맡아줘서 고맙다고 호텔 직원에게 인사를 했고, 직원은 "See you again"이라고 인사한다.

'씨유 어겐.'

아쉬움을 달래는 마법 같은 인사다.

물론 태국은 다른 여행지에 비해 비교적 쉽게 다시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저렴한 비용과 짧은 비행거리. 여행객을 환영하는 친절한 사람들. 하지만, 여행이라는 건 시간과 비용만 갖춰진다고 쉽게 떠날 수 있는 게 아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중력이란 로켓이 대기권을 뚫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저항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지금까지 많은 여행지에서 아쉬움이 일 때마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고 스스로 달래며 떠나왔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찰떡같은 인연에게 언젠가 다시 꼭 만나자고 약속하고도 결국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씨 유 어겐'은 그 당시의 진실함과는 관계없이 결국엔 '마지막'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한 형식적인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이란 그런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순간, 여행에서의 모든 추억은 불확실한 전생의 기억처럼 까마득해진다. 한 여름밤의 꿈처럼.


호텔 직원의 인사에 습관처럼 나오려던 '씨 유 어겐'을 억누른다.

"I hope so"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헛된 약속 대신, 나도 그렇게 되길 원한다는 간절한 희망을 담아 옅은 웃음으로 답했다.




표현하기 힘든 심란한 마음을 캐리어에 담아 수화물로 부친 후, 나는 수완나품 공항의 활주로에서 대기 중인 비행기의 창가에 앉았다.

이제 '여행이라는 별'을 떠나 '일상이라는 별'로 돌아간다.

공항은 일상이라는 별의 대기권이다,

여행자의 옷은 대기권의 압력에 의해 다 흩날려지고, 나는 여권에 인쇄된 이름으로 존재한다.

여행의 설렘은 기내의 차가운 공기처럼 빠르게 식어가고, 나는 벌써부터 한국에서 부재중이었던 시간만큼의 해야 할 일들을 걱정한다.

내일부터 해야 할 일을, 결정해야 할 사안을, 반복될 일상을 떠올린다.


드드드드드득.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린다.

나는 눈을 감는다.

기체의 진동이 점점 거세진다.

마치 내 두발이 활주로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그 질감이 신발 바닥 전체에 전해지는 듯하다.

비행기는 땅의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여행의 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함께 도움닫기 한다.


커다란 바퀴를 쥐고 있던 활주로가 손을 놓는다.

나를 감싸던 여행의 기억이 손을 놓는다.


시간이 멈춘 듯.

기체의 떨림이. 거친 소음이. 사라진다.


눈을 뜬다.

비행기는 점점 땅에서 멀어져 하늘에 가까워진다.

창가에 기대어 가만히 하늘 아래 풍경을 바라본다.

거대했던 지상의 건물들을 밝히던 불빛들은 점점 작아져 별이 되었다.

땅 위에 별들이 반짝인다.


한 달간의 여행의 기억은 별이 된다.


일상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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