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끌렁 기차 시장행 마지막 열차

매끌렁 기차시장으로 향한 여정 - 마지막 이야기.

by 하임

나는 열차의 맨 앞 칸, 기관실과 가까운 좌석에 앉았다.


이제 내가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건 기차가 매끌렁 시장으로 진입할 때 환호하는 손님들과 갈라지는 풍경을 제대로 직관하는 것뿐이다. 카오산로드에서 여기까지 온갖 고생을 다하며 왔으니 이 정도 기대쯤은 괜찮지 않을까. 그 순간을 위해 맨 앞칸은 내가 반드시 사수해야 할, 일종의 특등석이다. 아름다운 해변의 바다 뷰 객실처럼.


늦은 오후의 기차 안은 교복 입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몸집보다 큰 가방을 안고 삼삼오오 모여 수다에 빠져 있었다. 거세지는 열차의 소음에 뒤섞인 그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고단한 오후의 작은 힐링과 같았다.

무엇이 저리도 즐거울까.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아마 대화의 내용은 내 어린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학교수업을 마쳤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눈곱만 한 사소한 사건도 크게 부풀려 박장대소하던 시절. 공부만 빼고 모든 것이 호기심과 즐거움의 대상이었다. 짝사랑하는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부터 급우의 사소한 일상까지. 하교하는 내내 떠들어도 부족해서 발걸음을 천천히 늦추던 그 시절.

그 수다는 언제나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로 끝이 났다. 얼른 이 무거운 책가방을 벗어던지고 싶다는, 어른의 시간에 대한 막연한 기대.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된 나는 그때의 내가 바라던 것과 얼마나 닮아 있을까. 문득 기억을 되뇌어보지만, 이젠 그때 되고 싶었던 것들, 하고 싶었던 것들. 그때 나누었던 진지한 대화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웃고 떠들었던 장면만 어렴풋이 남아있다. 그저 순수했던 그때의 웃음이 그리울 뿐이다.


조잘거리던 학생들은 몇 정거장을 지나지 않아 우르르 내렸다. 그들이 내린 곳은 황금빛 사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거대한 시장. 커다란 트럭들이 줄지어 서서 과자와 사탕을 팔고, 학창 시절 즐겨 먹던 파르페의 우산 장식 꽂이와 닮은 알록달록한 파라솔 아래 노점상들이 가득 찬 시장. 방콕에서 경험했던 시장과는 또 다른, 무질서하지만 생동감 있는 분위기.


매끌렁 시장이라는 목적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분명 여기 내려서 며칠 머물렀다 가고 싶은 충동이 일만큼 호기심 가득한 풍경이었다.

다음에 태국을 다시 찾게 된다면, 이름이 알려진 도시를 떠나, 그냥 기차 하나 잡아 타고 마음이 끌리는 역에 내려서 며칠씩 머물다가 옮기는 식으로 여행을 한번 해보고 싶다. 어차피 기차 요금은 종점까지 10밧밖에 되지 않으니 중간에 어디에서 내려도 부담 없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그저 마음이 이끄는 데로 원하는 만큼 머물다가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여행. 그것은 과거에 대한 어떠한 미련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머무는 순간순간에 충실하며 나가는 여정이다.

남들이 정해놓은 화려한 목적지를 무작정 따라가는 것보다, 자신에게 맞는 순간에 충실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신만의 여행이자 진정한 삶이 아닐까.

매끌렁 역에 가까워질수록 태양은 고개를 숙였고, 구름은 많아졌다.

오후 내내 뜨겁던 태양을 구름의 손바닥으로 가리자 바람이 더욱 시원하다. 손가락의 빈틈을 찾아 간간히 삐져나오는 주황빛 햇살은 땅 위의 풍경에 반사되어 더욱 아름답다. 어수선하던 마음이 고즈넉한 풍경을 닮아가는 평화로운 시간.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돼서 그런지, 이 모든 풍경들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이번 역이 마지막 종착연인 매끌렁 역이라는 방송이 나오자, 갑자기 뒷 칸에 있던 승객들이 앞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창가에 기대어 스마트폰 카메라를 열었다. 관광객은 나 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같은 목적을 가진 고독한 사람들이 더 있었다는 사실에 괜히 마음이 설렌다.


기관실 근처에서 서성이던 나를 발견한 기관사님이 기관실로 들어와도 된다고 손짓했다. 매끌렁 시장이 갈라지는 풍경을 기차의 맨 앞. 기관실에서 직접 볼 수 있다니.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관실에 들어섰다.



곧이어 기차의 앞 유리창 저편에 길게 이어진 상점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관사님이 경적을 울리자 철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옆으로 물러선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었다.

가게의 셔터는 모두 닫혀 있었고, 알록달록한 햇볕 가림막은 모두 접혀 있다.

가끔 조명을 밝힌 소수의 가게들과 스마트폰으로 기차를 촬영하는 몇몇의 구경꾼들이 보였지만, 대부분은 손에 든 카메라가 무색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기나긴 회색빛 어둠을 뚫고 마침내 기차는 종점역인 매끌렁 역에 정차했다. 나는 다시 한번 기관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기차에서 내렸다.


역 주변은 매우 한적했다.

함께 기차에서 내린 몇 안 되는 승객들은 기차 앞으로 달려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기념사진 한 장쯤은 남겨야지.

바람에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하고, 다른 사람들이 촬영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단체로 온 일행에게 내가 먼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했더니 그들은 내게도 사진을 권했다.

나는 그들에게 스마트폰을 넘겨주고 기차 옆에 서서 포즈를 취했다. 돌려받은 스마트 폰의 갤러리 속에는 아쉬움 가득한 어색한 웃음의 한 남자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지만, 정말 남는 건 사진 한 장뿐인, 허무한 긴 여정이구나.



나는 기차가 지나온 철길을 따라 걸었다.


매끌렁 기차 시장을 빛내던 수많은 손님과 아름다운 조명이 사라진 거리는 마치 겨울나무를 연상케 했다. 현란하게 자신을 감싸던 나뭇잎들이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 줄지은 회색빛 겨울나무 숲엔 오직 내 발걸음과 철로의 자갈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차갑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잎이 없다고 겨울나무가 가치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화려함이 사라진 나무는 메이크업을 지운 아름다운 여성의 민낯과 같다. 어쩌면 나는 매끌렁 기차 시장의 맨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몇 안 되는 여행자일 수도 있다. 사진과 영상에서 봤던 화려함은 사라졌지만, 맨얼굴의 친밀함이 남았다. 비록 눈썹은 지워지고 잡티가 군데군데 묻어있지만, 나는 그 모습을 사진기에 담고 싶어졌다.

먼 훗날 매끌렁 시장을 회상하며 이 맨얼굴의 초상화를 다시 본다면, 그때는 어떠한 추억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제 시외버스 정류장을 찾아 방콕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구글 지도로는 시외버스 터미널이 검색되지 않았다. 나는 일단 근처의 편의점에 들러 간단한 음료라도 마시면서, 터미널을 물어보기로 했다.


기차시장 철로를 벗어나 도로변으로 나왔다.

매끌렁 기차 시장은 문 닫았지만, 철길 옆 도로의 노점상들은 여전히 영업 중이었다.

특이했던 건 일부 상점이 매끌렁 기찻길을 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뒷문을 펼치면 매끌렁 기차 시장이 되고, 뒷문을 닫고 앞문을 펼치면 매끌렁 도로변의 시장이 되는 구조.

눈에 보이는 것을 토대로 추측건대, 기차가 운행하는 시간대에는 기찻길 시장의 이름으로 관광객들을 상대하고, 운행이 끝난 후에는 도로변 문만 열어 현지인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듯했다. 이게 맞다면, 정말 독특한 장사 수단이다. 장사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찾아 물건을 파는 행위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가게의 주인은 '장사의 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태국 브랜드의 토마토 주스를 구입한 후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시외버스 터미널을 물었다. 하지만,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했다. 불안한 마음을 빨간 토마토 주스로 누르고, 밖으로 나섰다.

이젠 조명 없이는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워졌다. 시외버스 터미널을 못 찾으면 숙박을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지나가는 행인 중에 비교적 연세가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태국어로 번역한 구글 번역기를 보여줬다. "방콕으로 가는 시외버스 터미널이 어디에 있습니까?"


행인은 내가 왔던 곳의 반대편 철길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뒤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으니, 일단 철길 너머로 가보기로 했다. 거기서 마주치는 다른 사람에게 다시 물어보면 될 것이다.

두 사람이 겨우 오고 갈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자 큰 도로가 나타났다. 나는 다시 지나가는 행인에게 물어 시외버스 터미널을 찾을 수 있었다. 시외버스 터미널은 매끌렁 기차역에서 도보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버스 터미널엔 우리나라처럼 하나의 매표소가 아니라, 여러 버스 회사의 매표소가 개별적으로 줄지어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방콕행'이라고 영어로 쓰인 매표소로 갔다. 안내원은 구석에 정차해 있는 벤을 가리켰다. 방콕으로 바로 가는 벤은 아니지만, 방콕으로 가는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는 마하차이에 내려준다고 했다. 나는 가격을 지불하고 안쪽에 앉았다.

봉고차 기사님은 사람들이 다 차면 출발할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어두운 낯선 거리에서 방콕으로 가는 교통수단이 없으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했었는데, 이렇게라도 찾았으니 출발은 언제 하든 상관없었다. 방법이 없는 것보단 늦게라도 출발하는 게 훨씬 나으니까.


이틀을 보낸 것 같은 하루였다.

나는 백팩을 앞으로 안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봉고차 안의 좌석에 사람들이 모두 채워지자,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린다.

봉고차는 거침없이 도로를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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