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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율곡과의 운명적 동지(1569년)

by 박성기
율곡 이이

제4장 율곡과의 운명적 동지 (1569년)


스승의 유산, 조정의 풍랑

1568년(선조 1년) 겨울, 한양 도성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문과 급제 교지를 받아 쥔 스물아홉의 김우옹은 그 차가운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1년 전 국상으로 미뤄졌던 그의 벼슬길은 개인의 영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스승 남명 조식의 뜻, 즉 '경의(敬義)의 정신으로 이 썩은 나라를 바로잡으라'는 준엄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는 발걸음은 조정이라는 거대한 진흙탕에 발을 들이는 비장한 행군이었습니다.


그가 첫발을 디딘 조정은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척신(戚臣) 정치가 물러난 해묵은 악취 대신, 사림(士林) 내부의 격렬한 분열이라는 새로운 독(毒)이 똬리를 튼 채였습니다. 동인과 서인이라는 거대한 흐름은 이미 대의(大義)의 명분 대신 당색(黨色)과 파벌의 이익으로 흐려져 있었습니다.


젊은 언관(言官) 김우옹은 홍문관과 사간원의 청요직(淸要職)에 임명되었으나, 지리산 기슭에서 갈고닦은 곧은 정신은 오히려 그를 외로운 섬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홀로 남명학파의 실천적 입장을 대변하며 끓어오르는 조정의 권력 암투를 관찰했습니다.



언관의 길: 부패를 향한 첫 직언의 칼날

김우옹은 숨 막히는 듯한 조정의 분위기 속에서도 직책에 충실했습니다. 그의 언론은 메마른 경전 구절을 읊는 고루한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민생과 법치를 파괴하는 권력자들의 심장을 겨누는 날카로운 칼날이었습니다.


김우옹은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재직할 때, 권세 있는 외척의 일가 친척이 뒷돈을 써서 부정한 방법으로 관직을 얻으려 한 사건을 접했습니다. 그는 피가 마르는 상소문을 써 내려갔습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는 것은 작은 부정을 묵인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며, 그 작은 구멍은 곧 거대한 댐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는 해당 인물의 파직은 물론, 그를 추천한 관리들까지 엄벌에 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상소가 올라가자 조정은 일순간 싸늘한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노회한 대신들은 감히 남명 조식의 외손서에게 등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김우옹의 강직함은 권력자들에게 '경계해야 할 인물'이라는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부패한 관료들에게는 '지리산의 바위'처럼 뚫기 힘든 적이라는 절망감을 심어주었습니다.


김우옹은 알았습니다. 이 길은 곧 수많은 적으로부터 홀로 서야 하는 고독의 길임을.


율곡 이이의 시선

조정을 뒤흔드는 그의 직언이 잇따르던 어느 날, 서인의 영수이자 조선 최고의 천재로 불리던 율곡 이이(李珥)가 그에게 조용히 다가왔습니다. 율곡은 이미 조정의 중심에서 '십만 양병설'이 포함된 혁신적인 개혁안을 제시하며 구태의연한 기득권층과 맞서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짧은 학문적 인연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이의 눈빛은 김우옹의 출신 배경과 그가 짊어진 남명의 정신적 무게를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율곡은 김우옹의 강직함이 그저 '책 속의 의리'가 아니라, '지리산의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실천의 힘'임을 직감했습니다.


율곡에게 중요한 것은 당색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난세를 구원할 진정한 동지, 즉 경세(經世)의 뜻을 함께 나눌 인물이었습니다.



경륜과 의리의 합일: 동지(同志)의 맹세

조용한 비원(秘苑)의 한 모퉁이, 소나무 그림자가 드리운 작은 정자에서 두 거장은 마주 앉았습니다.


율곡 이이가 김우옹에게 건넨 첫마디는 학문적 성과나 경력에 대한 칭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은 의리에 대한 깊은 존경이었습니다.


이이: (깊고 차분한 목소리로 김우옹을 응시하며)


"동강(東岡),


나는 동강의 뒤에 지리산의 기운이 서려 있음을 보았소.


남명 선생의 굳건한 의(義)가 그대에게 머물러 있기에,


5년 만의 급제는 재주가 아니라,


불의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심지(心志)의 힘이라 들었습니다.


장원(狀元)은 개인의 재능이나,


의리(義理)는 국가의 근본이니,


이 어지러운 나라를 구하기 위한


그대의 발걸음을 나는 깊이 존경하오."



김우옹은 율곡의 개혁 의지와 비전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율곡 이이의 ‘시대를 읽는 통찰력’(才)과 김우옹의 ‘원칙을 지키는 굳건함’(義)이 운명적으로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김우옹: (허리를 숙여 답하며)


"장원공의 경륜과 재능은 조선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저는 다만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의리를 잃지 않고,


그 등불을 지키는 굳건한 벽이 될 뿐입니다.


저는 동인(東人)의 한 사람이지만,


공의 뜻은 하늘과 땅이 만나듯


우리의 뜻과 하나임을 확신합니다.“



두 사람은 학파와 당색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오직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대의(大義)아래 이상적인 동지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런 운명적인 만남은 남명 학파의 실천 유학과 퇴계 학파의 성리학적 경세론이 조정에서 협력하는 중요한 물꼬를 튼, 실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당파를 뛰어넘는 대의(大義)의 실천과 고독

두 사람은 종종 정국을 함께 논하며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보완하는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이 동지 관계는 김우옹에게 씻을 수 없는 고독과 갈등을 안겨주었습니다.


동인 내부에서 율곡 이이의 개혁 정책이 너무 급진적이라며 비난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김우옹은 그 비난의 선봉에 서야 했습니다. 특히, 동문이자 스승 남명의 수제자인 정인홍(鄭仁弘)이 율곡 이이를 서인의 거두로 규정하고 격렬하게 비판하며 노선을 달리했을 때, 김우옹은 참으로 고독했습니다.


'사사로운 정(情)인가, 나라의 대의(大義)인가.' 김우옹은 고뇌 끝에 사적인 동문 관계를 넘어 공적인 판단을 우선했습니다. 그는 상소를 올려 정인홍의 급진성을 우려하고 율곡의 시무책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인재는 당파로 나눌 수 없으며, 나라를 위한 경륜은


오직 하늘이 준 것이다.


율곡의 주장이 옳거늘 어찌 당색 때문에


눈을 가린단 말인가!“


김우옹은 이처럼 서인의 거두인 율곡을 지지하고, 오히려 같은 동문이자 학파의 맹주를 견제하는 고독한 행보를 통해 스승 남명이 평생 지키려 했던 ‘공(公)과 사(私)’를 분명히 가르는 실용주의 정치가의 면모를 세상에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그의 행보는 동인 내부에서 '배신자'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고독한 길이었으나, 다가올 국난을 준비하는 그의 굳건한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난세를 향한 결의: 지리산 정신의 무게

율곡 이이와 김우옹은 사사로운 당쟁에 휩쓸리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다가올 국난(國難), 즉 임진왜란에 맞설 조선 지성(知性)의 마지막 빛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김우옹은 관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내면으로는 스승 남명의 준엄한 가르침을 단 하루도 잊지 않았습니다.


'벼슬 없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나, 실천 없는


벼슬은 나라를 해치는 독이다!‘


그는 이제 지리산의 바위처럼 단단해진 수신(修身)의 도를 안고 있었습니다. 율곡과의 만남은 그가 혼자가 아님을 확인시켜 주었고, 그들의 이상적인 동지 관계는 훗날 다가올 임진왜란 극복의 밑거름이 될 정책적 기반을 다지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김우옹은 스승의 경계를 뛰어넘어, 난세를 온몸으로 짊어질 실천의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갈 것을 결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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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청, 김&장, FBI, 법무사협회, 서울시법무사로서 40년을 법조(행정)분야에 종사하였습니다. <생활법률, 창과 방패>, 자기계발, 역사인물 등 다양한 브런치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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