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8년(선조 1년) 겨울, 한양 도성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문과 급제 교지를 받아 쥔 스물아홉의 김우옹은 그 차가운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1년 전 국상으로 미뤄졌던 그의 벼슬길은 개인의 영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스승 남명 조식의 뜻, 즉 '경의(敬義)의 정신으로 이 썩은 나라를 바로잡으라'는 준엄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는 발걸음은 조정이라는 거대한 진흙탕에 발을 들이는 비장한 행군이었습니다.
그가 첫발을 디딘 조정은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척신(戚臣) 정치가 물러난 해묵은 악취 대신, 사림(士林) 내부의 격렬한 분열이라는 새로운 독(毒)이 똬리를 튼 채였습니다. 동인과 서인이라는 거대한 흐름은 이미 대의(大義)의 명분 대신 당색(黨色)과 파벌의 이익으로 흐려져 있었습니다.
젊은 언관(言官) 김우옹은 홍문관과 사간원의 청요직(淸要職)에 임명되었으나, 지리산 기슭에서 갈고닦은 곧은 정신은 오히려 그를 외로운 섬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홀로 남명학파의 실천적 입장을 대변하며 끓어오르는 조정의 권력 암투를 관찰했습니다.
언관의 길: 부패를 향한 첫 직언의 칼날
김우옹은 숨 막히는 듯한 조정의 분위기 속에서도 직책에 충실했습니다. 그의 언론은 메마른 경전 구절을 읊는 고루한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민생과 법치를 파괴하는 권력자들의 심장을 겨누는 날카로운 칼날이었습니다.
김우옹은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재직할 때, 권세 있는 외척의 일가 친척이 뒷돈을 써서 부정한 방법으로 관직을 얻으려 한 사건을 접했습니다. 그는 피가 마르는 상소문을 써 내려갔습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는 것은 작은 부정을 묵인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며, 그 작은 구멍은 곧 거대한 댐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는 해당 인물의 파직은 물론, 그를 추천한 관리들까지 엄벌에 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상소가 올라가자 조정은 일순간 싸늘한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노회한 대신들은 감히 남명 조식의 외손서에게 등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김우옹의 강직함은 권력자들에게 '경계해야 할 인물'이라는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부패한 관료들에게는 '지리산의 바위'처럼 뚫기 힘든 적이라는 절망감을 심어주었습니다.
김우옹은 알았습니다. 이 길은 곧 수많은 적으로부터 홀로 서야 하는 고독의 길임을.
율곡 이이의 시선
조정을 뒤흔드는 그의 직언이 잇따르던 어느 날, 서인의 영수이자 조선 최고의 천재로 불리던 율곡 이이(李珥)가 그에게 조용히 다가왔습니다. 율곡은 이미 조정의 중심에서 '십만 양병설'이 포함된 혁신적인 개혁안을 제시하며 구태의연한 기득권층과 맞서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짧은 학문적 인연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이의 눈빛은 김우옹의 출신 배경과 그가 짊어진 남명의 정신적 무게를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율곡은 김우옹의 강직함이 그저 '책 속의 의리'가 아니라, '지리산의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실천의 힘'임을 직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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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청, 김&장, FBI, 법무사협회, 서울시법무사로서 40년을 법조(행정)분야에 종사하였습니다. <생활법률, 창과 방패>, 자기계발, 역사인물 등 다양한 브런치를 제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