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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순형 Jul 05. 2022

03

기질과 재능에 대하여

세상에 패배를 반길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경쟁을 즐기고 지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편이다.

타고난 기질이 이렇다 보니 달리기를 할 때면

특히나 피곤하다.

여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가 나보다 앞서 나가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겠지만 나는 종종 그걸 못 견뎌내고 생면부지의 남과 혼자 경쟁을 하곤 한다.


참으로 지독한 취미가 아닐 수 없다.

나의 중랑천 조깅 코스

월 누적거리가 300km가 넘어가자 동네에서 조깅할 때는 적수가 없었다. 나는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중랑천을 어슬렁거리며 나를 앞질러가는 러너를 기다리며 혼자 경쟁하고 혼자 승리감에 취하기를 반복했다.


그를 만나 첫 패배를 맛보기 전까지는.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짧은 아킬레스건과 육중한 몸에도 불구하고 제법 잘 달리는 편이었다.

당장 생각나는 건 주 5일/8시간씩 서서 일했던  직장

캐나다 매주 주 1회 풋살과 훈련

외에도 나도 모르는 사이 달리기에 도움 될만한 여러 요소들이 있었겠지만 내가 달리기 적합한 신체 능력을 타고다고 생각다.

잠실보조경기장 트랙이 고인물 러너들의 성지라는 말을 듣고 오만한 마음과 부푼 설렘을 안고 잠보(잠실보조경기장 트랙의 줄임말)로 향했다.


내가 구독하는 몇 안 되는 달리기/마라톤 유투버가 있다.

그는 나이키런클럽 볼트 레벨(누적 15,000km 이상)이었다.

한 해 동안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10km 달려야 3,600km를 달릴 수 있으니 대충 계산해도 러닝 구력이 4년 이상인 분이었다.

만나서 같이 달려보고 싶었는데 그날 그를 트랙에서 만난 건 기막 '우연'(이라 적고 나는 운명이라고 읽는다)이었다.

러너들의 성지, 잠보(잠실보조경기장 트랙)

나는 암묵적인 잠보 이용 룰 따위 전혀 모른 채 400m 90초도 유지하지 못하는 스피드로 '1 레인'을 당당하게 점유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 8 레인에서 역주행으로 몸을 푸는가 싶더니 기다리기 힘들었는지 2 레인에서 나를 뒤쫓아다.

함께 달리기 전에는 '그'라는 확신이 없었지만 평소 그가 자주 착용하는 신발과 그영상을 자주 봐왔기에 '그'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여러 번 쫓기는 포지션에서 상대방이 먼저 체력이 고갈날 때까지 버티다가 상대방이 포기하면 전력질주를 하는 쾌감으로 레이스를 즐겼는데 이번엔 뭔가 평소와 달랐다.

나의 호흡은 갈수록 거칠어지고 다리는 무거워지는데 뒤에서 나를 쫓아오는 소리는 계속 가까워졌다. 그는 6바퀴를 함께 돌다가 이내 나를 추월하며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나의 것인 적 없던 1 레인을 탈환해갔다.

당시 10km PB(Personal Best)였고 첫 패배였다.

레이스를 마치고 덕분에 PB를 세웠다고 인사를 하러 가니 90초로 끌어주셔서 오히려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다.

'당신처럼 10km 30분대 주자가 되고 싶다.'라고 말하니 가을이 되면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에 잠보에서 만나면 본인이 끌어주겠다고 했다.

함께 사진을 찍고 그 뒤로 몇 번 더 잠보를 찾아갔지만 그를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몇 주 뒤 가을이 찾아고 그와 동시에 리기를 시작한 지 9개월 만에 잠보에서 그토록 깨지지 않던 10km 40분대의 벽을  수 있었다.

잠보 1레인 25바퀴 수동랩 측정 PB
마라톤 커뮤니티에서 봤던 이미지인데 인상깊어 가져왔다.

<더 시스템>이라는 책에서 오래 달릴 수 있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과 달리 오래 달리면 기분이 좋아지는 유전자를 타고나서 그런 거라는 구절을 봤다. 마라토너가 재능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부모님께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다시 여름이 찾아왔다.

매일 달리기를 통해 나는 고통은 언젠가 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고 전에 없던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됐다.

올해도 나는 어김없이 아마추어 마라토너의 꿈

서브 3를 달성하기 위해 달리고 있다.

작년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훈련량에 과연 가능할까 싶지만 이제는 조급하지 않다.

나의 몸이 허락하는 한 나는 계속 달릴 것이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도달할 거란 걸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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