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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작가 Feb 09. 2020

[1]셔터맨, 커피에 중독되다

내가 피츠(Peet's)를 만났을 때

2012년 말, 미국에 오면서 나는 셔터맨이 됐다. 아내는 출근하고, 딸은 학교에 가고, 나는 도시락을 쌌다. 살림남 주부남편. 세상 남편들이 가장 부러워한다는 셔터맨이 됐다. 그러면서 일어난 변화 중의 하나가 커피에 중독된 것이었다.


고백. 나는 바리스타가 아니다. 심지어 커피 매장 알바 경험도 없다.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에 이민 와서 어쩌다 동네 커피를 좋아하게 된 애호가일 뿐이다.


2012년 12월 29일. 기억력 감퇴의 신호인지 날짜가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29일로 해두자. 우리 가족은 샌프란시스코공항에 내렸다. 이민이라고 생각하고 온 게 아니라 여행가방도 이민 보따리처럼 많진 않았다. 다니던 신문사를 휴직하고 1년 일정으로 스탠퍼드대에 방문연구원으로 왔다. 말이 좋아 연구원이지 한량이었다. 학교에 가서 뭘 특별히 해야되는 것도 없었다. 오전에는 방문연구원, 유학생 등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강의(안 들어도 상관 없는 강의)를 듣고, 도서관에 가서 책 읽고 신문 보고, 체육관에 가서 아무나 붙잡고 농구하고, 시간 맞춰 집에 오면 땡. 재충전의 시간, 달리 말해 먹고 노는 시간이었다.


그치만 셔터맨이라고 마냥 먹고 놀기만 할 수는 없는 일. 올바른 셔터맨의 자세를 갖춰야 했다. 모든 살림은 나의 것이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필수불가결한 교통수단, 중고차를 산 게 시작이었다. 장을 보고 요리해서 밥상을 차리고 인터넷을 연결하고 각종 공과금을 처리하는 일은 기본이었다. 정말 중요한 건 딸 아이의 등하교, 아내의 출퇴근을 책임지는 일이었다.


어찌어찌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서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온 아이를 1월 초 동네 초등학교에 다시 2학년으로 등록했다(한국은 학사일정이 3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지만 미국은 대개 8월에 시작해 다음해 5, 6월 방학을 한다). "집에서 그냥 아빠랑 놀면 안돼?"라며 학교 가기 싫다는 아이를 냉정하게 등교시켰다. 영어를 알아 듣지도 말 하지도 못하는 아이는 학교 가는 걸 겁냈지만 할 수 없었다. 하여튼 그렇게 딸 아이 학교 문제는 해결했다. 아이는 그럭저럭 적응하는 것으로 보였다. 학교에 가고 6개월 뒤에야 선생님이 맨날 "Do you understand?"라고 말하는 게 뭔소린지 알아 들었다는 사실은 1년도 훨씬 뒤 알았지만 말이다.


미국 회사에 취직한 와이프 출퇴근도 내 책임이었다. 2013년 5월쯤 우리는 차를 한 대 더 샀다. 1년만 미국에서 살다가 돌아갈 요량이었지만 팔 때 팔더라도 매일 같이 남편이 모는 차를 타는 것보다는 스스로 운전하고 다니고 싶다는 아내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나는 1년 간의 휴직기간이 끝나고도 회사에 돌아가지 않았는데, 이 때만 해도 당연히 회사로 복귀할 생각이었다(결국 나는 복직해야 할 시점에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다시 미국으로 왔다. 그리고 쭈욱 살림을 하고 있다).


차가 2대가 된 건 2013년 5월이지만 정작 아내가 차를 몰게 된 건 2014년 6월이 되고 나서였다.

아내는 한국에서 9년 정도 차를 몰고 다닌 나와 달리 장롱면허 장기소지자였다. 우리는 미국에 오자마자 운전면허 시험을 신청했다. 필기시험은 쉬웠다. 한인상점에 깔려있는 기출시험문제지를 구해서 외우기만 하면 합격이었다. 나는 정석대로 공부해서 시험을 보겠다며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제공하는 교본으로 공부했다. 그리고 필기시험에서 낙방해 두번 만에 붙었다. 아내는 기출문제지 슬쩍 보고 한번에 합격했다. 결국 "쓸데 없이 고집을 부린다"는 핀잔을 들었다. 망할 놈의 교본!

문제는 도로주행이었다. 나는 한번에 합격해 면허증을 받았다. 와이프는 불합격이었다. 교통신호체계가 한국과 다른 부분이 있는데다가 긴장할 수 밖에 없어 쉬운 테스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운전을 오래 한 주변 사람들 중에서도 도로주행에서 한 번에 합격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한국에서 면허 따고 운전대라고는 잡아 본 적 없었던 와이프는 다섯번 떨어지고 여섯번째 시험에서 면허를 땄다. 5전6기 오뚝이로 일어서는데 딱 1년 반이 걸렸다.


정식면허를 받기 전이라도 운전을 할 수는 있었지만 제약이 있었다. 한국 면허증(국제운전면허증이 아니라 일반 면허증)을 갖고 가서 면허시험 신청을 하면 2개월(이것도 가물가물한데 아마 맞을거다)짜리 임시면허를 줬다. 그 안에 면허를 못 따면 정식면허가 있는 사람이 동승해야만 운전이 가능한 퍼밋(일종의 조건부 운전허가증)을 줬다. 어리버리한 면허시험장(DMV) 직원을 만나면 퍼밋이 아니라 임시면허를 2개월 연장해 주기도 했지만 그건 복불복. 게다가 운 좋게 한 번 연장을 받아도 또 떨어지면 어차피 퍼밋을 받아야 했다. 와이프는 출근을 해야했지만 내가 동승하지 않으면 운전할 수 없었다. 미국 온 지 1년 반만에 운전면허를 딸 때까지.


어쩔 수 없이 1년 반 동안 나는 아내와 함께 출근하고 퇴근했다. 딸 아이를 학교에 내려준 다음 아내를 회사에 데려다 줬다. 오후엔 아이를 학교에서 데려와 숙제를 도와주고 초등학교 2학년 딸과 함께 유치원용 영어책을 읽었다. 한국에서 알파벳을 독파한 딸이 '소메 오네(some one) '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퇴근 시간에 맞춰 아이와 함께 아내 회사로 갔다.


6개월 뒤부턴 아내가 출근길 운전대를 잡았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딸의 안전을 고려해 퇴근길 운전대는 결코 아내에게 맡기지 않았다. 회사는 가까웠다. 써니베일(전설의 기업 야후 본사가 있는 도시)에 있는 아파트에서 안 막힐 땐 자동차로 15분 거리였다. 그래도 대중교통이 엉망이라 버스는 견적이 안 나왔다.


출근길 아내가 운전대를 잡으면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동승했다. 아내가 차선을 위반하거나, 좌우를 살피지 않고 차선을 변경하려 하거나, 깜빡이를 제때 켜지 않거나, 너무 느리게 가거나, 브레이크나 가속페달을 너무 급하게 밟고 떼거나 할 때면 기분 나쁘지 않게 교육(?)하기 위해 마음을 다스렸다. 그치만 화가 나 언성이 높아지고 다투기 일쑤였다. 왜 다들 운전연수는 부부끼리 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지 이해가 됐다.


우리는 출근길에 빠지지 않고 아내의 회사 근처 커피숍에 들렀다. 신문 한 부와 함께 늘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켰다. 기분 좋게 온 날은 10여 분 함께 앉아 커피를 마시며 얘기하다가 아내는 바로 옆에 있는 회사로 가고 나는 좀 더 앉아 신문을 봤다. 함께 마시는 커피는 마음까지 따스하게 해줬다. 커피 맛은 그냥 구수했다. 얼굴을 붉히고 온 날엔 아내는 커피만 받아들고 회사로 가버렸다. 나는 화를 삭이며 신문을 읽었다. 커피 맛은 역시 구수했다.


거의 1년 반 동안 일주일에 5번 정도 아침마다 그 집 커피를 마셨다. 피츠커피(Peet's Coffee). 아침마다 매장에 가면 근처 직장인들이 커피와 아침식사용 빵 종류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그렇게 아침마다 피츠커피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했을 땐 그냥 따뜻하고 구수한 맛으로 마셨다. 약간 탄 맛이 느껴지는 따뜻한 음료였다.


한국에서 회사 다닐 때 내가 가장 좋아한 커피는 봉지커피였다. 아침에 출근해서 졸릴 때 달착지근한 봉지커피를 종이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후후 불어가며 마시면 잠도 달아나고 당이 보충돼 기분도 좋아졌다. 커피전문점이 많이지면서 점심을 먹고 일행과 함께 아메리카노, 라테, 카푸치노 같은 걸 사서 마시기도 했지만 달달하지 않은 커피는 무슨 맛으로 마시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봉지커피와 비교하면 아내와 함께 들르는 피츠커피 매장의 아메리카노는 밍숭맹숭했다. 그런데 1년 반 가까이 거의 매일 마시다보니 어느 순간 약간 탄 내 나는 그 구수한 커피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 커피를 마시면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저 카페인 중독은 아니었다. 뜨거운 그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는 게 습관이 된 듯 했다. 어느새 내가 그 커피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네덜란드 출신 이민자 알프레드 피트(Alfred Peet)의 커피와 만났다. 이 커피가 스타벅스 창업자들에게 커피 기술을 전수해 준, 황순원의 소설 '독 짓는 늙은이'의 송영감 같은 고집쟁이 장인이 만든 커피란 건 나중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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