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 떨림과 울림(3)

물리학자의 눈을 통해 바라본 경이로운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

by CalmBeforeStorm

떨림과 울림

김상욱 저| 동아시아| 2018년 11월 07일


이 책은 물리학의 원리와 우주의 본질을 인간적인 감정과 연관지어 표현하고 있으며, 물리적 현상들이 우리 일상과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물리학의 엄밀한 법칙들이 인간적인 설렘과 연결되는 순간, 과학의 경이로움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자연과 물리학의 본질을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과학책입니다.

* 아래의 독서노트는 책에서 감명깊게 읽었거나, 인사이트를 받은 부분을 발췌하였습니다.

** 본 독서노트는 분량이 많아서 3회에 나누어 업로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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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는 네 종류의 힘이 존재한다. 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이 그것이다. 일상생활에서 핵력을 느끼려면 태양을 보면 된다.


정지 상태는 속도가 0인 등속운동이다. 따라서 운동법칙에 따르면 그 상태를 유지해도 무방하다. 실제 우리 주위의 많은 물체들이 그 자리에 정지 상태로 존재한다.


사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자연현상은 전자기력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전자기력 때문이다. 신문 또는 스마트폰에서 출발한 전자기파, 즉 빛이 당신의 눈에 도달한다. 눈의 망막에 있는 분자들이 빛 때문에 변형을 일으키고, 그 결과 화학신호가 발생하고, 그것이 전기신호가 되어 뇌로 전달되는데, 이 모든 것이 전자기력 때문이다. 심지어 당신이 글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도 뇌 속의 전기적 작용, 즉 전자기력 때문이다.


우리가 실용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은 모두 전자기력이다. 우리 주변 대부분의 기계들이 전기를 이용하는 이유다. 전기가 예뻐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다른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중력을 일으키는 것은 입자의 ‘질량’이다. 전자기력은 ‘전하’가 일으킨다. 겨울철, 문고리를 잡을 때 정전기의 충격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당신은 전하의 존재를 경험한 것이다. 일상에서 전하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전하에는 양(+)과 음(-)의 두 종류가 있는데, 대개 이들이 같은 양만큼 있어 상쇄되어 전하가 없는 중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양(+)의 질량을 상쇄시킬 음(-)의 질량은 존재하지 않기에 질량은 상쇄되는 법이 없다. 질량은 언제나 양(+)의 값을 갖는다. 그래서 중력을 숨길 방법은 없다.


힘에서는 입자 사이의 거리가 중요하다. 놀랍게도 중력과 전자기력의 크기는 모두 거리 제곱에 반비례한다. 즉, 거리가 2배, 3배로 멀어지면 힘의 크기가 4배, 9배로 작아진다. 우리가 멀리 있는 블랙홀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중력과 전자기력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강할 것 같으냐고 물어보면, 많은 이들이 중력이라고 답한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이 질문은 잘못된 거다. 서로 다른 것을 비교할 때는 가정이 필요하다. 물질의 최소단위인 원자도 원자핵과 전자로 나뉠 수 있는데, 전자는 더 이상 나뉘지 않는 기본입자의 하나다. 전자는 전하와 질량을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중력과 전자기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두 전자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과 전기력의 크기를 비교해보면 전기력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훨씬’이라는 부사는 부적절하다. 전기력4,1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배 더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자를 연구할 때 중력은 완전히 무시된다.


전자기력은 강하다. 이 때문에 홀로 있는 전하를 보는 일은 흔치 않다. 어딘가 양전하나 음전하가 존재하면 바로 반대의 전하를 끌어당겨 총 전하량이 0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력이 먼저 발견되고, 전자기력은 19세기에나 제대로 알려진다. 전자기력은 물질 내부에 꽁꽁 숨어 있었던 거다. 전기력과 자기력을 구분하여 말하기도 하지만, 물리학에서는 이를 합쳐서 ‘전자기력’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 둘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맥스웰의 이론도 그가 죽을 때까지 가설로서만 다루어진다. 공간에 존재한다는 장을 누군가 실험으로 확실히 보여줘야 했다. 물리학자들이 전자기현상을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전기는 이미 산업에 이용되기 시작했다. 1844년에 워싱턴과 볼티모어를 잇는 첫 번째 상업 전보선이 개통되었고, 1858년에는 유럽과 미국을 연결하는 대서양 전신선 개설공사가 시작되었다.


전신이란 전선을 연결하여 전류만 통했다 끊었다 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전선을 개설하는 것은 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패러데이의 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도선을 가급적 얇은 절연체로 감싸고 외부를 튼튼히 금속으로 보호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장을 고려하면 도선 주위를 우선 두꺼운 절연재로 감싸야 했다. 외부로 빠져나가는 장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패러데이의 주장이 학계의 정설이 아니었기에 첫 번째 시도는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 도선을 연결했지만 대서양을 지나며 신호가 모두 외부로 새어나가 거의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앞서 말한 장을 고려한 방법으로 1866년 대서양 횡단 통신이 성공한다.


맥스웰이 전자기장의 진동을 기술하는 수식을 구하고 보니, 놀랍게도 이 진동은 바로 ‘빛’이었다. 장이라는 아이디어가 뜻하지 않게 “빛은 무엇인가?”라는 오랜 난제의 해답까지 준 것이다. 1887년 하인리히 헤르츠는 전자기파의 존재를 실험으로 입증한다. 핸드폰의 무선통신은 바로 이 헤르츠의 전자기파를 이용하는 것이다.


전하가 있으면 그 주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장이 펼쳐진다. 중력도 마찬가지다. 질량을 가진 물체 주위에는 중력장이 펼쳐진다. 전기장을 흔들면 전자기파가 생기듯, 중력장을 흔들면 중력파가 발생한다. 우주에 빈 공간은 없다. 존재가 있으면 그 주변은 장으로 충만해진다.


존재가 진동하면 주변에는 장의 파동이 만들어지며, 존재의 떨림을 우주 구석구석까지 빛의 속도로 전달한다. 이렇게 온 우주는 서로 연결되어 속삭임을 주고받는다. 이렇게 힘은 관계가 된다.


전기

전기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국면은 전류가 흐르는 도선 주위에 자기장이 생긴다는 발견이다. 전류電流는 말 그대로 전하의 흐름이다. 즉, 도선에 전류를 흘려주면 자석이 된다. 이름하여 전자석이다. 사실 전기로 움직이는 기계는 대부분 이 원리를 이용한다. 전기모터가 한 예다.


정리해보자. 전하는 전기장을 만들고 전류는 자기장을 만든다. 그렇다면 자석의 자기장은 누가 만드나? 자석은 20세기 양자역학이 탄생한 다음에야 이해된다.


그렇다. 전기장이 만들어지면 전하가 힘을 받아 움직인다. 전류가 흐른다는 의미다. 결국 도선 근처에서 자석을 흔들어주면 도선에 전류가 흐르기 시작한다. 마술 같은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이것이 오늘날 발전소에서 전기가 만들어지는 원리다.


도선이 정지하고 자석이 흔들리나, 자석이 정지하고 도선이 흔들리나 마찬가지다. 실제 발전기에서는 고정된 자석 내에서 도선이 회전한다. 회전하는 부분을 터빈이라 부른다. 결국 터빈을 돌려주면 전기가 만들어진다. 수력발전에서는 물이 떨어지며 물레방아 돌리듯이 터빈을 돌려 전기를 만든다. 화력발전에서는 석탄으로 물을 끓이고, 뿜어져 나온 수증기가 터빈을 돌린다. 원자력발전도 방사능물질이 핵분열하며 내는 열로 물을 끓여 수증기로 터빈을 돌린다. 패러데이 법칙이 없으면 전기도 없다.


자기장이 변하면 전기장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음양의 조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을 해야 마땅하다. 그 반대도 가능한가? 즉, 전기장이 변하면 자기장이 만들어지나? 답은 ‘그렇다’다. 자연은 음양의 조화를 아는 거 같다. 한 번 더 정리해보자. 전하가 있거나 자기장이 변하면 전기장이 만들어진다. 전류가 있거나 전기장이 변하면 자기장이 만들어진다. 맥스웰 방정식은 단지 이것을 수식으로 쓴 것에 불과하다.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가며 공간으로 진행한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재미있는 결과를 추론할 수 있다. 자기장이 변하면 전기장이 만들어진다. 반대로 전기장이 변하면 자기장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전기장이 자기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기장이 다시 전기장을 만드는 상황이 가능하지 않을까? 전하나 전류 없이, 오직 전기장과 자기장이 마치 에셔의 석판화 <그리는 손>처럼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가며 공간으로 진행한다. 맥스웰은 이것에 ‘전자기파’란 이름을 주었다. 놀랍게도 전자기파가 정말 존재한다. 바로 ‘빛’이다.


맥스웰의 전자기파를 실험으로 확인해준 사람은 하인리히 헤르츠였다. 그의 이름은 진동수의 단위에 남아 있다. ‘89.1MHz(메가헤르츠) KBS 제2FM’의 헤르츠 말이다. 헤르츠가 실험에 성공한 것은 1887년 9월 17일이다. 이 성공에 과학계는 열광했다.


1895년 8월 마르코니는 전자기파를 이용하여 무선통신에 성공한다. 이것은 모스부호로 된 전신을 무선으로 보낸 거다. 1903년이 되면 대서양 너머 무선통신이 성공한다. 이 업적으로 마르코니는 190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헤르츠가 1894년 패혈증으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공동수상했을 것이다.


1912년 4월 14일 타이타닉호는 자신이 침몰 중이라는 것을 무선전신으로 송신한다. 1920년대가 되면 라디오가 보급되고 ‘방송’이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무선통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맥스웰이 그의 방정식을 쓰자, 그 순간 전기시대가 열렸던 것은 아니다. 전자기파는 예외지만, 사실 맥스웰 이전에 이미 전기는 실생활에 쓰이고 있었다. 맥스웰의 진정한 업적은 전기와 자기에 대해 알려진 사실들을 집대성하여 네 개의 수식으로 정리해낸 것이다.


20세기 중반 트랜지스터가 발명되기 전까지 전기의 이용은 기본적으로 맥스웰 방정식에 기반을 둔 것이다. (트랜지스터를 이해하려면 양자역학이 필요하다.) 맥스웰 방정식이 다루는 것은 전기장과 자기장이다. 따라서 전기를 이용한다는 것은 전기장과 자기장을 제어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에너지를 전기장 형태로 저장하는 장치를 ‘축전기’라고 하고, 자기장 형태로 저장하는 장치를 ‘코일’이라고 한다.


사실 축전기는 별거 아니다. 전기장은 전하가 만든다고 했으니까 전하를 저장할 수 있으면 된다. 전하에는 양(+)전하와 음(-)전하의 두 종류가 있다. 따라서 양전하와 음전하를 저장할 분리된 장소 두 개가 필요하다. 양전하와 음전하는 서로 당기니까 이 두 장소를 가까이 가져다 놓으면 전하들이 서로 당기며 고정된다.


실제로 축전기는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금속판이다. 이렇게만 하면 부피가 너무 크기 때문에 띠 형태로 만들어서 셀로판테이프처럼 감아둔다. 코일도 별거 아니다. 자기장은 전류가 만든다고 했으니까 도선만 있으면 된다. 도선을 용수철 모양으로 둘둘 감아놓으면 그 내부에 자기장이 갇혀 저장된다.


에너지보존법칙에 따라 에너지는 전기에너지에서 자기에너지로 형태만 바뀐다. 전기를 이용하여 불을 밝히거나 전열기를 뜨겁게 하려면 전기에너지를 빛이나 열에너지로 바꿔야 한다. 이렇게 해주는 장치를 ‘저항’이라 한다. 만물이 원자들의 조합으로 되어 있듯이, 결국 모든 전기 장치는 축전기, 코일, 저항의 조합으로 구성된다. 전기난로는 저항이다. 니크롬선 같은 금속에 전류를 흘려주면 열이 난다. 백열전구는 저항이다. 텅스텐 같은 금속에 전류를 흘려주면 강한 빛이 난다. 물론 동시에 열도 발생한다. 그래서 여름에 백열전구를 켜면 괴로워진다.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은 알아도 맥스웰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뉴턴은 물리학의 토대를 세우고 아인슈타인은 그것을 뒤집었다. 맥스웰은 현대 문명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었다.



환원주의

손가락을 자세히 보면 지문이 보인다. 육안으로는 여기까지다. 현미경으로 보면 이제 울퉁불퉁한 피부 표면이 보일 텐데, 좀 더 확대해보면 세포가 보인다. 사회가 인간들의 모임이듯 우리 몸은 세포들의 모임이다. 더 확대해보면 세포를 이루는 소기관들이 보인다. 세포핵, 소포체, 미토콘드리아 같은 것들이다. 이 정도까지 확대하려면 비싼 전자현미경이 필요하다.


세포핵 내부를 보면 유전정보가 담긴 DNA가 보인다. 절반은 아버지, 절반은 어머니에게서 온 거다. DNA는 공 모양으로 뭉쳐 있지만 이것을 펴서 확대하면 탄소, 산소 같은 원자들이 보인다. 손가락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100억 배 정도 확대해야 한다. 이제 원자를 확대해보면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가 보이고, 원자핵을 확대해보면 양성자와 중성자가 보이고, 이들을 더 확대하면 쿼크가 보일 거다.


이쯤 되면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이처럼 세상은 보다 작은 것들의 모임으로 되어 있다. 물리학자는 모든 물질을 이루는 궁극의 단위와 이들을 기술하는 법칙을 찾으려 한다.


쿼크를 이해하면 이들이 모인 원자핵을 이해할 수 있고, 원자핵과 전자를 이해하면 원자를 이해할 수 있고, 원자를 이해하면 DNA를 이해할 수 있고, DNA를 이해하면 단백질을 이해할 수 있고, 단백질로 이루어진 세포소기관을 이해하면 세포를 이해할 수 있고, 세포를 이해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을 이해하면 사회를 이해할 수 있고… 이쯤 되면 내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대상을 쪼개어 부분으로 나눈 다음, 이들로부터 전체를 이해하려는 방법을 ‘환원주의’라고 한다.


환원주의는 이렇게 주장한다. 원자물리는 입자물리의 응용에 불과하고, 화학은 원자물리에 불과하고, 생물학은 화학에 불과하고, 인간은 생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앤더슨의 비판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연을 이해하는 데 있어 환원주의적 관점이 언제나 옳지는 않다는 거다. 만약 입자에서 원자, 화학, 생명, 인간으로 층위層位가 높아짐에 따라 이전 층위에서 예측할 수 없었던 새로운 법칙이 출현한다면, 환원주의처럼 단순히 말하기는 힘들 거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는 주로 탄소, 수소, 산소, 질소의 네 종류다. 양자역학은 이들 원자를 완벽하게 기술한다. 하지만 아무리 원자 각각을 들여다본들 소화불량이 무엇인지 알아낼 방법은 없다. 원자들이 모여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이 되고, 이들이 모여 세포가 되고, 세포들이 모여 위장이 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물론 나의 위장胃腸은 원자로 되어 있으며 이 원자들은 양자역학에 따라 운동한다. 더 나아가 원자는 쿼크와 전자로 되어 있으며 이들의 운동은 입자물리학이 설명한다. 하지만 입자물리나 양자역학에서 위장을 바로 설명할 수는 없다. 위장이 원자들의 집합인 것은 맞지만 위장의 기능이나 성질을 원자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원자가 많으면 뭔가 달라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예 많은 것을 다루는 물리 분야가 따로 있다. 바로 통계물리다. 통계물리는 앞서 이야기한 기체 분자의 운동을 설명하는 열역학에서 탄생했다. 기체는 원자나 분자들이 날아다니는 상태다. 기체 상태에서는 물이나 철이 비슷해 보인다. 텅 빈 공간을 조그마한 입자들이 날아다니고 있다. 자세히 보면 하나는 물 분자고, 다른 하나는 철 원자일 뿐이다. 하지만 온도를 섭씨 20도 정도로 낮추면 전혀 다른 ‘것’이 생겨난다. 하나는 물이라는 액체가 되고 다른 하나는 철이라는 고체가 된다. 이처럼 기체가 액체나 고체로 상相이 바뀌는 현상을 ‘상전이相轉移’라 부른다. 철 기체로부터 철 고체의 특성을 유추해낼 수 있을까?


물체를 던지면 어디에 떨어질지 예측할 수 있다. 물체의 궤적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구 위에서 이 궤적은 2차함수라는 도형으로 주어지며 이 도형을 그려서 미래의 위치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중간에 궤적이 갑자기 끊어지면 어떨까? 어려운 말로 불연속점이 생긴 것인데, 이 경우에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할까?


통계물리학에 따르면 상전이가 일어나는 순간 물리량들은 무한히 커지거나 불연속이 된다. 즉, 상전이 전후를 연속적으로 연결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기체로부터 고체의 특성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전이가 일어날 때 무언가 새로운 특성이 돌연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질에서도 상전이를 통해 얼음이 물이 되거나 물이 수증기가 되듯이, 상전이 이전에 물질이 갖지 않았던 속성이 새롭게 생겨난다. 이처럼 구성요소에서 없던 성질이 전체 구조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창발創發’이라 부른다. 창발의 예를 찾아보기는 쉽다. 당신 주위를 둘러보라. 수많은 자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자동차가 움직이고 커피가 끓고 있다. 인간행동, 사회현상도 모두 여기 포함시킬 수 있다. 이것들 가운데 원자로부터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창발이라 보면 된다.


적혈구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양자역학을 사용하기는 힘들다. 적혈구는 원자가 모여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같은 고분자가 된 것이다. 양자역학을 사용하기에는 이미 너무 크다. 하지만 적혈구 헤모글로빈의 헴에 있는 철 원자가 산소와 결합하는 것은 양자역학이 설명한다.


이렇게 적혈구 수준의 이해에서도 원자 수준의 환원적 설명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적혈구와 다른 수많은 고분자들이 모여 만들어낸 인간을 설명하는 데, 원자 수준의 이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는 전혀 다른 법칙이 필요하다. 하지만 11번 염색체상의 헤모글로빈 염기서열 중 단 하나가 잘못되면 그 사람은 겸형 적혈구 빈혈증에 걸린다. 원자 몇 개의 실수다.



물질의 변화

물질의 특성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가 떠오를 것이다. 얼마나 단단한지, 어떤 색깔인지, 먹을 수 있는지 등등. 물리학자에게는 이 가운데 전기적 특성이 가장 중요하다. 원자들이 결합하는 것은 전기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질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전기력을 가했을 때 물질이 어떻게 반응하느냐다.


물질에 전기장을 걸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즉, 물질의 한쪽에는 전원의 양극, 다른 쪽에는 음극을 연결하는 것이다. 원자핵은 양(+)전하니까 음극으로 끌려가고, 전자는 음(-)전하니까 양극으로 끌려갈 거다. 하지만 이들은 원자라는 물질의 최소단위를 형성하고 있다. 원자핵과 전자가 끌려간다고 해서 원자구조를 무너뜨릴 정도의 강한 전기장은 고려하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물체를 전원에 연결하는 순간 바로 박살날 테니까.


흥미롭게도 여기서 세상의 물질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물질이다. 원자핵과 전자가 각각 음극과 양극으로 끌려가기는 하지만 자기 위치에서 조금 벗어나는 정도로만 끌려간다. 그 움직임은 너무 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런 물질을 ‘부도체不導體’라고 부른다. 플라스틱, 나무, 돌멩이 등이 그 예다. 반면, 어떤 물질은 전류가 흐른다. 전류란 전자의 흐름이다. 아니, 원자를 이루는 전자가 어떻게 원자를 벗어나 물질 내부를 물 흐르듯 움직일 수 있을까? 금속이 보여주는 익숙한 현상이지만 물리학자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물질을 ‘도체導體’라고 부른다. 구리, 알루미늄, 철 같은 금속이 여기 속한다.


도체에 전원을 연결하면 전류가 흐른다. 전원의 전압을 크게 하면 더 많은 전류가 흐른다. 도체에 따라 증가비율은 같지 않은데, 그 비比를 전기전도도라 부른다. 전도도가 클수록 전기가 잘 통한다고 보면 된다. 전도도의 역수逆數를 ‘저항’이라고 부르는데, 저항이 작아야 전기가 잘 통한다. 공기는 저항이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 공기의 저항이 작았다면 벽에 있는 돼지 콧구멍 같은 콘센트에서 공기를 타고 사방으로 전기가 흘렀을 거다. 그랬으면 전기 문명 자체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난 100여 년간 응집물리의 역사는 바로 이 저항의 특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세상 만물이 흙, 공기, 물, 불의 네 가지 원소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4원소설이다. 엠페도클레스는 뛰어난 학자였다. 그릇을 뒤집어 물에 집어넣으면 그릇 내부에 빈 공간이 생기는데, 이것을 보고 공기의 존재를 추론했다고 한다. 이때 우리는 단군조선시대였다. 그는 세상이 기본 원소로 구성되며 이들의 밀고 당김으로 세상 만물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올바른 추론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생각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켜서 정말로 세상 만물을 이해해가고 있다. 물리는 물질의 근원,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 우주의 시작과 끝을 탐구한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응집물리야말로 진짜 물리다.



인공지능 시대의 물리학

“To erase the line between man and machine is to obscure the line between men and gods.”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지우는 것은 인간과 신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것이다.


컴퓨터와 달리 여기에는 논리적 문법이 없다. 그냥 무수한 반복학습을 통해 입력과 출력이 연결되도록 만드는 것뿐이다. 인간이 만든 신경망회로도 인간의 뇌 못지않은 직관을 가진다는 것을 ‘알파고-이세돌’ 시합은 보여주었다. 어차피 인간의 뇌도 적당한 ‘입력-출력’이 연결되도록 하는 장치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진 의식이 의식의 절대기준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알파고는 인간의 직관이 이해할 수 없는 수를 두었지만 어쨌든 이겼다. 그가 기쁨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인간보다 낮은 의식일까? 적어도 바둑이라는 두뇌게임에서 알파고를 이길 사람은 없다.


좀 더 나가보자. 인간이 가진 감정이나 미적 감각, 도덕성 같은 것이 왜 중요할까? 이런 것들은 사실 우주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산물은 아닐까? 에바가 칼렙을 배신하고 도망쳤지만, 에바에게 도덕성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런 모든 개념들은 오직 인간에게만 유효한 것일지 모른다.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이하며, 우리는 기계가 인간의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기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인공지능이 도달할 의식은 우리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금붕어가 상대성이론을 상상할 수 없듯이 말이다.



에너지보존법칙

뉴턴역학에 따르면 등속으로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다. 마찰이 없다면 물체는 영원히 움직인다. 진자를 당겼다 놓으면 점차 진폭이 작아지다 결국 멈춘다. 마찰 때문이다. 마찰이 없다면 진자도 영원히 진동한다. 운동은 그 자체로 실체를 갖는 영원불멸의 어떤 ‘것’처럼 보인다.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의 운동이 그 예다. 여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욕망이 이는 것은 정령신앙에 들어 있는 우리의 본능일지 모른다. 물리학자는 여기에 에너지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렇다면 에너지는 영원불멸해야 한다. 에너지보존법칙이다.


등속으로 움직이는 물체는 운동에너지를 갖는다. 그래서 영원히 움직인다. 움직이는 진자는 속도가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한다. 따라서 운동에너지도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한다. 하지만 에너지는 보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진자의 운동에너지가 줄어드는 동안 그 에너지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퍼텐셜에너지’(‘위치에너지’라고도 한다)다. 진자의 속도가 줄어드는 동안 운동에너지는 퍼텐셜에너지로 전환된다. 결국 운동에너지와 퍼텐셜에너지의 합은 일정하고, 이렇게 전체 에너지는 다시 보존된다.


운동에너지와 퍼텐셜에너지의 합이 일정하다는 것은 뉴턴의 운동방정식으로부터 수학적으로 유도할 수 있다. 우주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이 등장한 거다. 우주에는 영원불멸하는 무언가가 있다.


옆에 있는 돌을 집어 들었다가 가만히 놓아보자. 돌이 낙하하다가 바닥에 부딪혀 퍽 소리를 내고 멈출 것이다. 돌이 가진 운동에너지가 소리에너지와 열에너지로 바뀐 것이다. 돌의 운동에너지는 어디서 왔을까? 당신이 돌을 집어 올리는 동안 중력에 의한 돌의 퍼텐셜에너지가 커진다. 낙하하는 동안에는 반대로 돌의 퍼텐셜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바뀐다.


그렇다면 돌의 퍼텐셜에너지는 어디서 왔나? 당신의 손이 돌을 들어 올리는 동안 몸속의 에너지를 소모한다. 힘이 든다는 의미다. 정확히는 근육 내의 ATP가 분해되며 나오는 에너지다. 근육 내 ATP를 만드는 데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에너지는 호흡으로 얻는다. 호흡은 유기물을 산소로 태워 에너지를 얻는 과정이다. 유기물은 우리가 먹은 음식을 분해하여 얻는다. 우리가 먹고(유기물) 숨을 쉬어야(산소) 하는 이유다. 유기물을 태울 때 에너지가 나오는 것은 유기물이 높은 에너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높은 에너지 상태의 유기물을 만드는 것은 대개 식물의 몫이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유기물을 만든다. 식물도 에너지를 창조할 수는 없다. 광합성에 필요한 에너지는 햇빛에서 얻는다. 결국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에너지원은 태양이다.


태양도 에너지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태양에서는 핵융합반응이 일어난다. 수소 원자들이 결합하여 헬륨이 되면서 에너지가 생성된다. 수소들이 따로 흩어져 있는 것보다 헬륨으로 뭉쳐 있는 것이 에너지가 작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소의 에너지는 어디서 왔을까? 수소는 우주의 탄생, 그러니까 빅뱅 때, 정확히는 빅뱅이 있은 후 38만 년이 지났을 즈음 만들어졌다. 빅뱅 당시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한 점에 응축되어 있었다. 이 에너지가 물질로 변환된 것이다. 결국 우리 주위의 모든 에너지는 빅뱅에서 기원한다. 에너지보존법칙이 우리에게 알려준 놀라운 사실이다.



물리학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법

게이지대칭 말고도 직관적으로 혹은 수학적으로 당연히 존재해야 하는 대칭들이 있다. 놀랍게도 이런 대칭의 존재가 우주의 모습이 이래야 한다고 제약을 가한다. 이제 물리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을 만들 때 대칭부터 고려한다. 필요하거나 반드시 있어야 하는 대칭의 목록을 만들고, 이러한 대칭에 부합하는 물리이론을 찾는 거다. 중력과 양자역학을 통일하려는 초끈이론이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연구되고 있다.


오늘날 물리학자의 이해방식은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 세상은 텅 빈 공간이다. 빈 공간 안에서 물체가 움직인다. 중요한 것은 물체와 움직임, 두 가지다.


태양, 자동차, 스마트폰, 인간과 같은 모든 것이 물체에 해당하며 이들은 아주 작은 원자들의 모임으로 되어 있다. 원자를 ‘레고’블록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거다. 그러면 세상 모든 것은 빈 공간에 놓인 레고블록의 조립물이라는 말이다. 이런 관점은 당연하지 않다. 물체가 존재하고 운동하는 배경이 되는 빈 공간, 그러니까 ‘진공’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한때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반대했다.


그렇다면 ‘운동’이란 무엇일까? 답부터 말하자면 운동은 위치변화다. 위치의 변화가 없는 것도 ‘정지’라는 운동이다. 위치는 공간과 물체 사이의 관계다. 편의상 물체에서 한 점을 잡아 그것으로 물체의 운동을 기술하자. 예를 들어 사람이라면 코끝을 잡아도 된다. 이제 사람의 운동은 코끝에 있는 점의 연속적인 위치 변화가 된다. 이 점들을 따라가면 선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운동은 선이라는 추상적 대상이 된다. 물리학자에게 운동은 ‘선’이다.


운동을 숫자로, 좌표

운동은 숫자로 나타낼 수도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데카르트의 업적이다. 그에 따르면 3차원 공간상의 위치는 가로, 세로, 높이를 나타내는 세 개의 숫자로 표현된다. 이것을 ‘좌표’라고 부른다. 당연한 것 같지만 이것은 혁명적인 아이디어다. 운동은 공간의 선, 즉 도형이 되고, 이 도형은 숫자로 표현된다. 숫자는 수식으로 다룰 수 있으니 운동을 수학으로 기술할 수 있다는 의미다.


사실 이 때문에 중고등학교 수학시간에 우리는 ‘함수’라는 것을 배운다. 함수는 수식과 도형을 연결해주는 장치다. 물리학자는 수식에서 도형을 읽어내고, 도형에서 운동을 보고, 운동으로 자연을 이해한다.


좌표를 쓰기 위해서는 기준점이 필요하다. 해운대는 부산역을 기준으로 동쪽으로 11킬로미터, 북쪽으로 4.6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다. 광안리를 기준으로 하면 동쪽으로 2킬로미터가 된다. 기준점은 아무 곳이나 잡아도 될 거 같지만, 그리 단순하지 않다. 태양이 돈다는 천동설은 내가 기준점이 되는 기술이다. 하지만 기준점이 움직이고 있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이런 경우 누가 운동의 기준점이 되어야 할까? 이 문제를 깊이 파고들면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나온다.



운동을 기술하는 법칙

이제 운동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그렇다면 운동을 기술하는 법칙이 있을까? 있다면 법칙이 왜 존재할까? 이에 대해서도 심오한 철학적 논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물리학자는 의외로 쉬운 답을 가지고 있다. 그냥 법칙이 있다고 믿는 거다. 이걸 종교라고 비난하면 할 말은 없다.


비행기는 10만 개의 부품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운동법칙에 따라 작동하여 날아간다. 이걸 보며 법칙이 없다고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물리학자는 아직 우주를 이해하는 완벽한 법칙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점점 더 많은 자연현상이 법칙으로 기술되고 있다. 때로 이전의 법칙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견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법칙은 이전의 법칙을 조화롭게 포함하며 그 적용 범위를 확장해왔다. 이 때문에 물리학자는 우주를 기술하는 궁극적인 법칙이 있을 거라 믿는다. 물론 여기에도 수많은 비판이 가능하다. 법칙은 환상이고 물리학자들끼리 합의한 규칙일 뿐이라는 거다.


운동법칙은 갈릴레오에 의해 제시되고 뉴턴에 의해 정립되었다(로버트 훅과 라이프니츠의 공로에 대한 과학사적 논란이 있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이에 따르면 운동법칙은 단 한 줄로 기술된다. “외부에서 아무런 영향이 없을 때, 물체는 일정한 속도로 직선운동 한다.” 외부 영향이 없다는 것은 대상이 되는 물체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린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황을 실제 구현하기는 힘들다. 물질이 거의 없는 우주공간에 나가면 그나마 비슷한 상황이 된다.


이 법칙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귀결은 “외부 영향이 있으면 물체가 등속이 아니거나 직선을 따라 운동하지 않는다”라는 거다. 여기서 원인이 결과에 선행한다는 인과율을 가정해야 한다. 당연한 것 같지만, 철학자 흄은 인과율을 의심한 것으로 유명하다.


두 사건 A와 B가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두 사건을 각각 경험할 수 있지만 A에 들어 있는 B의 함축이나 B에 들어 있는 A의 함축 같은 추상적 개념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A와 B가 연속하여 일어난 경험뿐이다. 엄밀히 보자면 이것은 A와 B가 연접하여 나타났다는 것만 의미할 뿐, 이 둘 사이에 필연적 혹은 인과적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과율을 가정한다면 이제 남은 일은 갈릴레오가 말한 운동법칙을 수학으로 쓰는 거다. 그 일을 뉴턴이 했다. 앞서 말한 ‘F =ma’다. 컴퓨터시뮬레이션을 하거나 비행기가 항법장치에 따라 움직이는 데에도 적분이 필요하다. 여기서 적분을 하는 것은 컴퓨터라는 기계다. 컴퓨터는 (유한하지만) 충분히 작은 크기로 시간을 나누어 더한다. 수치적분이라 불리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주어진 구간을 100만 개로 나누어 더하는 식이다. 인간이라면 1초에 한 번 더하기를 하더라도 꼬박 열흘 이상 걸릴 거다. 하지만 컴퓨터는 100만 번 더하는 데 1초도 안 걸린다. 이처럼 컴퓨터의 힘은 속도에서 온다. 기계라도 적분을 할 수 있다면 운동법칙에 따라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수학은 자연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기술한다.


수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물리법칙이 된 예는 없다. 물리학자는 외계인을 만나더라도 수학으로 소통이 가능할 거라 믿는다. 우주가 정말 수학으로 쓰인 것인지 우리가 수학의 틀로만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수학이 없다면 물리도 없다.


단진동

주위를 둘러보면 대부분의 물체는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다. 하지만 정지는 사실 단진동이다. 당신 앞에 놓인 테이블을 가만히 쳐다보라. 움직이지 않을 거다. 하지만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미세한 진동을 볼 수 있다.


정밀한 물리실험을 할 때 테이블 위에 실험장비들을 그냥 늘어놓는 경우는 없다. 진동을 잡아주는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야 한다. 지금 당신이 손을 들고 가만히 있어도 손을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미시세계에서 완벽한 정지 상태는 불가능하다. 결국 모든 정지는 단진동이다. 단진동은 중요하다.


긴 줄의 한쪽을 쥐고 흔들면 파동이라 불리는 줄의 움직임이 만들어진다. 사실 파동은 단진동의 모임이다. 줄의 어느 한 부분에 붉은 매듭 같은 것을 묶어놓고 관찰하면 매듭은 아래위로 단진동 한다. 따라서 파동도 단진동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전파, 빛, 소리는 모두 파동이다. 우리는 촉각이나 냄새가 아니라 듣고 말하고 보는 것으로 소통한다. 뇌의 활동도 수많은 전기신호의 진동으로 되어 있다. 즉, 인간은 단진동으로 소통하고 세상을 인지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회전하듯이 전자는 원자핵 주위를 돈다. 세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원자와 거대한 천체의 운동이 모두 단진동으로 되어 있다.


마찰이 있다면 물체는 결국 멈춘다. 당겨진 종아리 살이 진동하지 않고 바로 서는 것은 마찰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중심에 이르고자 하지만 항상 지나쳐 다른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단번에 원하는 중심에 도달하기는 힘들다. 결국 진동이 잦아들며 조금씩 목표에 접근해가는 거다.


단진동은 진동수와 진폭이라는 두 가지 물리량으로 기술된다. 용수철에 달린 물체가 두 지점을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주기’, 두 지점 사이의 거리를 ‘진폭’이라 한다. 주기의 역수逆數를 ‘진동수’라 하고, 단위로 헤르츠(Hz)를 쓴다. 컴퓨터 프로세서 펜티엄칩의 진동수가 2.3기가헤르츠(GHz)라는 것은 1초에 23억 번의 단진동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컴퓨터 내부의 전기신호도 단진동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단진동은 주기가 365일, 진동수로는 3억 분의 1헤르츠 정도 된다. 진동수는 중요하다. 용수철마다 자신의 고유한 진동수를 갖기 때문이다. 단진동의 세계에서 진동수는 주민등록번호다.


물론 사람보다 복잡한 진동도 많다. 세상의 모든 진동, 아니 모든 운동을 단진동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대학원 수준의 역학에 가면 ‘액션-앵글action-angle 변수’라는 것을 배운다. 이는 모든 운동을 단진동의 조합으로 바꾸는 수학의 마술이다. 이걸 처음 배울 때 느꼈던 충격이 떠오른다. 세상 모든 것은 단진동이구나!


하지만 교과서는 이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불길한 멘트와 함께 끝난다. 이런 방법을 써서 복잡한 문제를 쉬운 문제로 바꿔 푸는 트릭을 사용할 수 있는데, 이때 뜻하지 않게 답이 무한히 커지는 경우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리이론에서 무한대가 나오면 뭔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의미다. 무한대가 등장하는 곳에 숨어 있는 것은 바로 ‘카오스’다. 카오스는 주기가 무한대인 주기운동이다.


주기가 무한하다는 말은 처음으로 돌아오는 데 무한한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니 처음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말이나 같다. 따라서 주기운동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100억 년 뒤에 돈을 갚겠다는 말이 갚지 않겠다는 뜻인 것과 마찬가지다.



초끈이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증거가 쌓여가자 결국 물질과 파동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파동은 물질이 운동하는 방식의 하나가 아니라 물질 그 자체의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결국 양자장론이라는 분야가 만들어지는데, 여기서는 파동으로부터 물질을 만들어낸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물질의 궁극을 탐구하던 현대물리학은 세상이 (상상도 할 수 없이 작은) 끈으로 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초끈이론이라 한다. 여기서는 작은 끈의 진동방식에 따라 서로 다른 물질들이 만들어진다. 당신이 기타로 ‘도’를 치면 코끼리가 나오고, ‘미’를 치면 호랑이가 나온다는 말이다. 결국 세상은 현絃의 진동이었던 거다.


우주는 초끈이라는 현의 오케스트라다. 그 진동이 물질을 만들었고, 그 물질은 다시 진동하여 소리를 만든다. 힌두교에서는 신을 부를 때, 옴aum이라는 단진동의 소리를 낸다고 한다. 이렇게 소리의 진동은 다시 신으로, 우주로 돌아간다. 결국 우주는 떨림이다.


우주는 크기에 따라 적용되는 규칙이 바뀐다. 원자세계에서는 양자역학, 거시세계에서는 고전역학으로 기술해야 한다. 이 두 역학은 형태만이 아니라 근본철학조차 완전히 다르다. 고전역학은 17세기 후반 뉴턴이 만든 오래된 체계다.


여기서는 시간에 따라 물체의 위치가 연속적으로 변해간다. 힘이 존재하면 운동의 양상에 변화가 생기며, ‘F =ma’라는 짧은 식이 그 변화를 기술한다. 양자역학은 물체의 위치를 시간에 따라 연속적으로 기술하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물체가 어떤 상태에 있는 것과 우리가 그 사실을 아는 것이 분리된다. 우리가 알게 되는 과정을 ‘측정’이라 한다. 예를 들어 원자의 위치를 측정하는 것은 원자가 이미 점하고 있던 위치를 확인하여 그것을 알려주는 과정이 아니다. 측정 이전에 원자의 위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자는 쿼크나 전자같이 더 작은 기본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의 시각에서 보자면 원자야말로 물질의 근본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산소를 호흡하고 일산화이수소(물)를 마시며 탄화수소를 먹는다. 어찌 보면 세상은 원자들이 끊임없이 쪼개지고 결합하는 것에 불과하다. 원자의 결합과 분열에 의미는 없다. 물리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몸도 원자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힘은 전자기력이다. 원자 주위를 날아다니며 원자의 모든 대외업무를 담당하는 것은 전자의 몫이다.


원자들이 결합한 것을 분자라 한다. 분자는 너무 작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 주위에 보이는 물질의 대부분은 눈에 보일까말까 하는 작은 분자나 고분자들의 집합체인 경우가 많다. 지구상의 물질은 대개 복잡한 고분자 알갱이들이 뒤엉켜 있는 것이다. 암석이나 흙은 알루미늄, 소듐, 포타슘 같은 금속산화물과 규소염의 복합물이다. 지구 내부로 들어갈수록 철, 마그네슘, 니켈같이 무거운 원자들이 많아진다. 쉽게 말해서 지구는 금속 덩어리라고 볼 수 있다.


원자에서 생명까지

우주를 이루는 물질에 대해서 큰 틀은 다 이야기했다. 하지만 지구에서는 아직 이야기할 것이 남아 있다. 분자들 가운데 탄소화합물은 특별하다. 복잡하고 긴 구조물을 쉽게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탄소화합물은 산소와 결합하며 에너지를 방출한다. 이를 연소라 부르는데, 쉽게 말해서 타는 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부터 38억 년 전 지구상 어딘가에서 탄소화합물로 이루어진 화학반응의 복합체가 탄생한다. 그 복합체는 에너지를 생산하여 자신의 구조를 유지할 뿐 아니라 그 구조를 같은 형태로 복제하는 능력을 가졌다. 바로 생명이다.


지구상의 생명체는 포도당이라는 탄소화합물을 산소와 결합시켜, 쉽게 말해 태워서 에너지를 얻는다. 고상한 말로 산화시킨다고도 한다. 부산물로 이산화탄소가 나온다. 인간의 경우 호흡이 그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뱉는다. 숨을 쉬지 않으면 에너지를 얻을 수 없으므로 바로 죽는다. 우리가 포도당을 보면 환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포도당이 뭐냐면 사탕처럼 단맛이 나는 것들이다.


인간과 같은 동물은 포도당을 합성하지 못한다. 그것은 식물의 몫이다.


식물은 광합성이라는 화학과정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분해하여 당으로 재조립한다. 광합성이야말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지탱하는 화학반응이다. 포도당이 산소와 결합하며 에너지를 내놓는다는 것은, 거꾸로 포도당을 만들 때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에너지보존법칙 때문이다. 식물이 에너지를 창조해내는 것은 아니고 태양에서 그 에너지를 얻는다. 정확히는 태양빛으로 물을 분해하여 얻은 수소를 이용하는데, 산소는 부산물로 그냥 내다버린다. 결국 동물은 포도당과 산소 모두를 식물에게서 얻는 셈이다.


이런 화학반응체계가 경이롭기는 하지만 개별과정은 모두 물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체계가 자연에 일단 만들어지면 그다음부터는 스스로 굴러가며 자신의 체계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오류가 조금씩 발생하고 구조에 결함이 생길 것이다. 결국 작동을 중단하게 될 텐데, 쉽게 말해서 죽는다는 말이다.


이런 화학반응의 복합체가 왜 자신의 구조를 유지하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구조를 영원히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은 자신을 무수히 복제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자신의 구조에 대한 정보를 어딘가에 저장하고 그 정보로부터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지구상의 생명체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유전자다. 유전자도 물론 원자로 되어 있다. 놀랍게도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명체는 동일한 구조의 유전자에 같은 방식으로 정보를 저장하고 이용한다.


생명의 다양성을 생각할 때, 이것이 우연일 리 없다. 모든 생명체가 단 하나의 생명체로부터 분화한 것이다. 물리학자의 시각으로 볼 때, 진화는 놀랍지 않다. 에너지를 생산하며 자기 구조를 유지하는 분자기계가 있고, 이것이 자기 복제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면 진화는 필연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밈’까지 가지 않더라도 진화하는 컴퓨터 바이러스나 인공지능은 의외로 쉽게 만들어질 수 있다. 지구상에 나타난 최초의 생명체는 진화를 거듭하여 결국 인간에 이르렀다. 생명은 화학반응의 집합체다. 생존과 복제가 모두 화학반응에 불과하다. 그런 화학반응들이 어떻게 한데 모여 집합을 이루었는지가 미스터리다. 하지만 개별 화학반응은 원자들이 일상적으로 보여주는 결합과 분열에 불과하다.


의미의 의미

지금까지 우리는 기본입자에서 분자, 인간을 거쳐 태양과 은하에 이르는 우주의 모든 존재와 사건을 훑어봤다. 결국 물리학이 우주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물리는 한마디로 우주에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해준다.


우주는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뜻하지 않은 복잡성이 운동에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거기에 어떤 의도나 목적은 없다. 생명체는 정교한 분자화학기계에 불과하다. 초기에 어떤 조건이 주어졌는지는 우연이다. 하루가 24시간이거나 1년이 365일인 것은 우연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니다. 아무 의미 없이 법칙에 따라 그냥 도는 것뿐이다. 지구상에서 물체가 1초에 4.9미터 자유낙하 하는 것은 행복한 일일까? 4.9라는 숫자는 어떤 가치를 가질까? 4.9가 아니라 5.9였으면 더 정의로웠을까? 진화의 산물로 인간이 나타난 것에는 어떤 목적이 있을까? 공룡이 멸종한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진화에 목적이나 의미는 없다. 의미나 가치는 인간이 만든 상상의 산물이다. 우주에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없다.


그렇지만 인간은 의미 없는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존재다. 비록 그 의미라는 것이 상상의 산물에 불과할지라도 그렇게 사는 게 인간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상상의 체계 속에서 자신이 만든 행복이라는 상상을 누리며 의미 없는 우주를 행복하게 산다. 그래서 우주보다 인간이 경이롭다.



과학(자)의 태도

과학은 단지 지식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 혹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선입견 없이, 객관적이고 재현 가능한 물질적 증거에만 기초하여 결론을 내리는 태도 말이다. 이런 입장에서 『사피엔스』는 인문학자가 쓴 책이지만 나쁘지 않은 과학책이다.


랜들은 ‘스케일’을 통해 과학에 대한 흔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싶은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전역학의 규칙은 거시세계에서 여전히 잘 작동한다. 하지만 이 규칙을 다른 스케일, 그러니까 원자, 분자에 적용하려 하면 문제가 생길 뿐이다. 여기서는 새로운 이론, 양자역학이 필요하다.


과학자들은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여 말한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이 특별한 이유다. 심지어 과학자는 아는 것조차 분명하게 ‘예/아니요’로 말하지 못한다. 이런 태도는 일반인에게 과학이 불확실하다는 오해를 줄 수 있다. 하지만 과학은 불확실성과 확률을 현명하게 다루어 확실성을 얻는 방법이다. 양자역학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가지고 있지만, 인류가 만든 어떤 과학이론보다 정확한 예측을 내놓을 수 있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실험결과를 놓고도 의심해야 한다. 결과가 놀라울수록 더욱 그렇다. 실험실에 갓 들어온 대학원생들은 날마다 노벨상 받을 만한 결과를 발견한다. 호들갑 떠는 신참의 말에 선배는 심드렁하게 이것저것 확인할 리스트를 말해주기 마련이다. 그의 노벨상은 곧 물거품이 된다. 근대철학을 연 것도 “모든 것을 의심하라”라는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었다. 충분한 의심을 통과한 과학이론에만 법칙이라는 신뢰가 주어진다.


지구는 타원궤도를 따라 태양 주위를 돈다. 누구라도 망원경으로 면밀히 관측하고 분석하면 (쉽지는 않지만)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뉴턴이 살던 시대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렇다. 며칠 후에 다른 이가 해봐도 같은 결론이 나온다. 타원궤도를 내놓는 이론은 옳고, 그렇지 못한 이론은 틀리다. 이처럼 과학은 이론의 옳고 그름을 물질적 증거에만 의존하여 결정해야 한다. 과학에서는 증거가 부족하면 “모른다”라고 해야 한다. 과학은 무지를 기꺼이 인정한다. 우주는 빅뱅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모른다. 지구상의 생명체는 최초의 생명체로부터 진화했지만, 최초의 생명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지구 이외의 장소에 생명체가 존재하는지 모른다.


이런 태도는 안다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한 기준을 제시한다. 안다는 것은 단지 그것을 뒷받침할 물질적 증거가 있다는 말이다. 우주가 빅뱅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하지만, 누구도 빅뱅이 일어나는 것을 본 적 없다. 이것은 138억 년 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빅뱅이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단지 우주가 팽창해왔다는 물질적 증거를 가지고 있다. 팽창하는 우주의 시간을 거꾸로 돌려보면 결국 우주가 한 점에 모이게 될 거다. 이게 전부다. 우주의 팽창 자체도 매우 기술적인 증거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만약 이런 증거들 가운데 일부가 오류라고 밝혀지면 빅뱅의 존재 자체가 의심받게 된다. 필자가 과학자로 훈련을 받는 동안, 뼈에 사무치게 배운 것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태도였다. 모를 때 아는 체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다. 또한 내가 안다고 할 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질적 증거를 들어가며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는 이것을 과학적 태도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다.


과학은 불확실성을 안고 가는 태도다. 충분한 물질적 증거가 없을 때, 불확실한 전망을 하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과학의 진정한 힘은 결과의 정확한 예측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결과의 불확실성을 인정할 수 있는 데에서 온다.


결국, 과학이란 논리라기보다 경험이며, 이론이라기보다 실험이며, 확신하기보다 의심하는 것이며, 권위적이기보다 민주적인 것이다. 과학에 대한 관심이 우리 사회를 보다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만드는 기초가 되길 기원한다.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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