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끌어당기거나 밀어내거나, 고통과 고독
2020년 12월의 기록
by 바다에 내리는 눈 Dec 22. 2020
이른 아침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빈 테이블을 찾는 중이었다. 한 노인이 작고 둥근 테이블 옆에 서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포장하고 있다. 곧 떠나려니 싶어 그 테이블을 노리고 있는데 노인의 손이 수전증에 걸린 듯 떨리고 굼뜨다. 커피 두 잔을 포장하는데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 사람은 카페에 앉아 한가롭게 커피를 마실 시간이 없다. 그는 배달 앱으로 누군가 시킨 커피를 가져다주는 배달부다. 한참 걸려 겨우 커피잔의 뚜껑을 덮는 데 성공하고 약간 흘리기는 했지만 두 잔의 커피를 배달 상자에 넣은 노인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떠났다.
대학원 박사 과정부터 시작된 커피 중독 증세가 심각한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커피부터 내리는 게 일인데 홍콩에 오니 배달이 너무 쉬워서 커피 한 두 잔도 배달시키곤 했다. 때로는 야무지게 포장하지 않은 카페의 잘못인지 서두른 배달부의 잘못인지 커피가 꽤 많이 흘러서 축축한 종이 상자 안을 열어 보면 잔 속의 커피는 반밖에 안 차 있을 때도 있다. 그럴 때 별점을 짜게 주거나 다시는 그곳에서 주문하지 않는 소심한 복수를 했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게 커피를 가져다주었을지 모를 늙은 손을 보고 나니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다. 코로나 때문에 집으로 직접 가져다주지 않고 아파트 로비에 두고 가는 언택트 배달밖에 안 되는지라 이제껏 한 번도 내게 음식을 가져다준 배달부들을 본 적이 없다. 출렁이는 인파를 뚫고 출렁이는 커피를 가져다준 사람을 잊고 내 코 앞까지 배달된 종이컵이 마치 버튼을 누르면 자판기에서 쑥 빠져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왜 이렇게 더러워? 왜 이렇게 축축해? 왜 이렇게 식었어? 왜 이렇게 흘렸어?' 불평했다. 겨우 나 하나 잠 쫓아내자고......
딜리버루 (Deliveroo) 배달 노인의 지팡이를 본 그 아침은 내내 고통스러웠다. 그가 노년에 쉬지 못하고 불편한 몸으로 낮은 시급의 배달 일을 해야 하는 이 사회의 불의를 참을 수 없었다. 어렸을 때는 이런 증세가 더 심해서 천둥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 떠돌이 개들과 새들이 어디서 비를 피할지 걱정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 가족이 맛있는 것을 먹고 있을 때에 굶고 있는 어린이들이 떠올라 죄책감을 느꼈다. 이렇게 세상 고통 다 짊어진 것처럼 괴로워하는 심리를 독어로는 '뷀트슈메르쯔 (Weltschmerz, Welt 세계 + Schmerz 병, 고통)'라고 하는데 참으로 적확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불의와 고통을 내 안으로 끌어당겨서 가뜩이나 나약하고 부족한 나 자신을 더 학대하고 어떻게 극복하거나 해결할 줄도 모르면서 그저 번민하기만 하는 것이 내가 앓고 있는 병이다. 세계병.
다만 나이 먹어가며 깨달은 것은 해결할 수 없는 모든 문제들을 싸매고 울 자격이 나에게 없다는 것이다. 누가 나에게 세계를 구원하라 했는가. 나의 주변도 나 자신도 하나 구하지 못하면서 세계의 고통을 내재화해서 무엇하겠다는 것인지, 어느 정도의 현실 감각을 갖추려고 노력한다. 이제는 몸이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커피 배달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건강과 직업이 그 배달부에게 있다고 긍정적인 면을 찾고 앞으로 배달부 팁을 넉넉히 줘야겠구나, 커피가 흐르거나 음식이 쏟아졌어도 좀 더 이해해야겠구나,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세계병에서 빠져나오려고 한다.
자기 자신도 어떻게 감당이 안 되면서 세계를 끌어당겨 고통스러운 인간은 반대로 위로가 필요할 때 다른 사람들을 밀어 내서 외롭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어도 혼자라고 느끼는 외로움, 이른바 '군중 속의 고독'은 아마 한 번쯤 누구나 느껴 봤을 것이다.
친구를 만났어도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고 바싹 말라 바스러지는 땅콩 껍질 같은 대화를 나누고 돌아섰을 때 문득 느끼는 '아, 외롭다!'
명절이라고 오랜만에 모인 일가친척들 사이에서 어색한 웃음으로 묵은 갈등을 덮고 분주하게 전을 지져 낼 때 기름 냄새를 뚫고 나오는 '아, 외롭다!'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마스크로 가린 얼굴들에 눈만 보이지만 그 졸음 가득한 충혈된 눈동자에 서린 '아, 외롭다!'
From Tsuen Wan to Central, Wang Hai (1992) 외롭지만 여전히 중심에 나 (Self)가 가득 차서 서로를 밀어내는 자석의 S극들처럼 누구도 선뜻 N극이 되지 못한다. Nobody가 되는 것은 두려우니까......
외로움에도 종류가 있어 밀어내는 외로움과 달리 홀로 있어서 긍정적인 상태를 문학에서는 고독이라고 부른다. 독어 단어 중에서는 '발다인잠카이트 (Waldeinsamkeit, Wald 숲 + Insamkeit 외로움)'가 이런 종류의 고독감이 아닐까 싶다. 숲 속에 홀로 남겨져 자연과 가까이 있을 때 느끼는 기쁜 호젓함. 한시에 자주 등장하는 은거 (隱居)의 기쁨을 독일 사람들도 느낀 것 보면 사람 사는 것 다 거기서 거기다.
19세기 미국의 대표적 시인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 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30대 후반부터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조카들은 좋아했지만 놀러 와도 2층 방에서 내려오지 않고 접시에 담은 과자를 끈에 매달아 창 밖으로 내려 줄 정도였다고 한다 [1]. 그러니 살아서 2천여 편의 시를 썼지만 한 번도 스스로 발표하지 않았고 그녀가 시를 쓴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시 'If I can stop (만약 내가)'를 읽어 보면 그녀가 외로워 고통 속에 살다가 갔다고 생각 들지 않는다.
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I shall not live in vain;
If I can ease one life the aching,
or cool one pain,
or help one fainting robin onto his nest,
I shall not live in vain.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누군가의 아픔을 덜어 줄 수 있다면,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쳐 있는 한 마리 울새를 둥지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에밀리 디킨슨이 쓴 시 2천여 편이 서랍 속에 잠들어 있었던들 어떠하리. 오늘 내가 그녀의 시를 읽고 이 못 말릴 세계병에서 오는 고통을 가라앉힌다면 그녀의 인생이 헛되지 않았듯, 나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나의 언어로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내 인생 헛되지 않으리.
[1]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장영희 지음. 위즈덤하우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