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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Feb 05. 2024

어머니를 돌보다

린 틸먼, 방진이, 돌베개, 2023

“만약 노출을 원치 않으시면 실루엣으로 처리해 드릴 수도 있어요.”

얼마 전, 다큐멘터리 제작팀으로부터 인터뷰 제안을 받았다. 내 브런치북을 읽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해서 전화 통화를 했는데, 대면 인터뷰가 가능하느냐는 것이었다. 생각해 본다고 했다. 내 선택지는 인터뷰를 하느냐 마느냐였을 뿐, 하기로 했는데 실루엣 처리를 하는 건 아니었다. 고민했지만 결국 대면 인터뷰는 어렵다고 문자를 보냈다.


이걸 ‘양가감정’이라고 해야 할까. 다큐의 기획 의도가 내 고민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내 사례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내 개인사를 공개하면서까지 “현대판 고려장”(포털사이트에 내 글이 노출됐을 때, 실제로 이런 댓글을 받았다)이라는 악의적 댓글이 달릴 가능성까지 감내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잘 인터뷰한다 해도, 나는 그저  엄마를 요양원에 모신 비정한 딸로 비칠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애써 부인하려 해도, 늘 가슴을 짓누르는 현실이다.




“내 목표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정보를 제공하거나 위로를 건네거나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내가 이 상황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이 일을 완벽하게 제대로 해내기란 불가능하다.”


린 틸먼의 책 <어머니를 돌보다 - 의무, 사랑, 죽음 그리고 양가감정에 대하여>를 읽었다. 사실 양가감정이라는 부제를 보고 어떤 글일지 예상했다.
작가는 11년간 자매들과 어머니를 돌보는 의무를 다했지만 견디기 힘들었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더구나 어머니는 자신에게 친절하지도, 사랑을 베풀지도 않은 분 아니었나. 딸과 경쟁하듯 딸의 재능을 샘내고 자신의 글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독특한 캐릭터 아니었나. 어머니는 아이러니하게도 뇌가 손상된 후에야 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안다. 어머니는 이제 “자기애 외의 사랑은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걸.


저자는 길고 긴 돌봄의 일상을 최대한 상세하게 일기장에 담았다고 한다. 그의 무기는 솔직함이다. 자신은 의무로 여겨지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고, 삶이 좁아진 듯하고, 내 삶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듯한 현실에 저항했다고, 특히 이삼 년 간은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토로한다. 자신은 좋은 딸 역할을 연기했을 뿐 진심 아니었다고, 그저 양심에 기반한 돌봄이었다고 말한다.


저자의 어머니는 정상뇌압수두증 환자였다. 그러나 의사가 제때 진단을 내리지 못해 다른 합병증들이 생긴다. 알츠하이머, 치매, 기타 혈관 질환까지. 뇌까지 이어지는 튜브를 통해 몇 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회복되지 못한다. 딸들은 요양원을 싫어하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어머니가 살던 집에서 돌보기로 한다. 대신 24시간 함께 지낼 수 있는 간병인을 구한다. 덕분에 어머니는 여느 환자처럼 집에만 머물지 않고, 마사지를 받고, 식당에 가고, 연극을 관람한다. 무엇보다 경제적 여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돌봄은 끊임없는 시행착오의 과정이다. 저자는 보호자로서 의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조언한다. 결코 의사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끝까지 매달려야 하고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도 100% 공감하는 말이다. 행여나 환자에게 불이익이 돌아갈까 주저하지만, 결국 자기 목소리를 내는 보호자를 무시하진 못한다.  


그리고 간병인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말한다. 불법 이주민의 어려운 형편을 잘 알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니 옆에 있는 게 고마워서 성의를 표했지만 과했다고. 심지어 도벽까지 있는 사람인데도 어머니가 좋아하기에 그냥 넘겼는데 그렇게 할 일이 아니었다고. 다른 누군가가 어머니를 돌본 이력으로 도움을 받는다면 문제가 커질 수 있는데 간과했다고. 요양사 혹은 간병인과의 첫 번째 관계 설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도 뒤늦게야 깨달았다.

부모를 돌본다는 건, 삶의 마지막까지 책임져야 하는 일이다. 그 사이에 자식도 늙는다. 돌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인생도 시들어간다. 걱정의 연속이다. 게다가 부모를 돌본 이들은 그 의무와 책임이 우리 세대에서 끝날 것을 잘 안다. 이제 더 이상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는 현실을 남들보다 일찍 깨닫는다. 저자가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고,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고민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장기 돌봄 서비스 제공업체에 연락해 데이비드와 나를 등록했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수많은 필요를 지켜보고,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지 알게 된 나는 더는 돌봄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자녀가 있고, 그 자녀가 당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해도 그 자녀는 짐을, 과도한 짐을 지게 될 것이다. … 돈이 발에 치일 정도로 많다 할지라도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오래 돌봄이 필요할지, 어떤 특수 치료를 받아야 할지, 얼마나 오래 살게 될지 알 수 없다.”


이 책은 그간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정도로 소비되곤 하는 간병기들의 선입견을 깨버린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걸 꺼렸던 저자가 책을 내기로 마음먹은 것도 돌봄에 대한 기존 시선과 다른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미국보다 의료보험제도가 잘 되어 있는 우리나라라지만 장기요양제도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대부분의 요양 시설은 개인이 운영하는 중소 규모 요양원에 기대고 있고, 정부 차원의 제대로 된 관리감독도 어려운 형편이다. 부디 우리가 맞을 미래엔 하루 3시간 재가서비스와 요양원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개선되길, 더 많은 선택지가 생기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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