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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Apr 09. 2024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

웬디 미첼/아나 와튼, 조진경, 문예춘추사, 2022

“언니, 세상에.. 냉장고 실내등이 들어오지 않아서 살펴봤더니 플러그가 빠져 있어. 집엔 엄마밖에 안 계셨는데.”

냉장고 전기 코드는 수시로 뺐다 꽂았다 하는 게 아니므로 벽 안쪽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가 힘들게 팔을 뻗어 코드를 뽑았다? 도대체 왜?


엄마는 유독 전기 플러그에 집착했다. 평소 아끼고 아끼던 습관 때문일까. 휴대전화를 충전하건 말건 보이는 족족 플러그를 뽑고, 절전형 멀티탭의 빨간 불빛이 보일세라 스위치를 눌렀다. 이제 냉장고 코드까지 뽑아버리면 큰일이다 싶었는데 다행히 두 번 반복되진 않았다.


치매 환자는 둔감할 거라 예상하지만 무척 예민하다. 엄마가 그날 냉장고 코드를 뽑은 건 윙~ 울리는 소리 때문이었을까. 막연히 짐작만 했는데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 책을 읽고 확신하게 됐다. 그 당시만 해도 엄만 오전에 요양사가 다녀간 후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실 때까지 3시간가량 혼자 계셨다. 내용에 집중하진 않아도 습관처럼  틀어놓은 TV도 언젠가부터 거의 켜지 않으셨다. 적막한 집에 그날따라 냉장고 소리가 거슬렸나 보다, 막연히 그랬을 거라고만 짐작했다. 그런데 저자의 경험을 읽어 보니 치매 환자에게 ‘청각과민증’이 생길 수 있다 한다. 늘 접했던 자동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져 걷지도 못할 만큼 힘들었다니, 그날 엄마도 견디기 힘들 만큼 냉장고 소음이 크게 울렸나 보다. 그러니 몸을 웅크리고 팔을 뻗어 기어이 플러그를 빼버린 것이겠지. 과민증은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더욱 심해진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으니 우리도 엄마를 모시고 이비인후과에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모든 도전에 맞서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면 혼자 생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계속 혼자 생활하고, 해결책을 찾기로 한 결심이 매일 치매를 이겨내게 하는 원동력이다.”(86쪽)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은 브런치 작가 Jin의 글 웬디 미첼을 기리며​를 통해 알게 됐다. 치매와 관련된 책은 대체로 세 부류인 것 같다. 치매란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치매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지(지금으로선 그런 묘책이 없는 듯하지만) 전문가들이 쓴 책, 치매 환자를 돌본 경험이 있는 가족이나 간병인 등 주변인들이 쓴 책, 그리고 치매 환자가 직접 쓴 책. 이 책은 세 번째에 해당한다.

 

혼자서 두 딸을 키우며 커리어우먼으로 열심히 살아온 웬디 미첼은 비교적 이른 나이인 58세에 치매 진단을 받는다. 결국 직장을 그만두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블로그에 기록하며 널리 알리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말로 표현하려면 어눌한데 타이핑을 하기 시작하면 생각이 정리되면서 문장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녀에겐 다음날 잊을지 모를 자신의 오늘, 휘발돼 버릴 기억을 대신할 기록이 소중했으리라. 혹자는 거짓 치매 환자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의지대로 치매와 더불어 사는 삶을 이어간다. 치매 환자에 대한 편견과 무기력, 좌절을 딛고 수많은 치매 환자들을 인터뷰했고, 치매 친화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제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거듭 주장한다. “우리가 친구와 친척, 전문가들에게 들어야 하는 의견은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게 만들 방법”이라고.

치매 환자에게 친화적인 공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흑백 사진을 찍어보는 것이라며, 치매 환자의 뇌가 구별하기 쉽게 공간 디자인을 해야 한다고, 그것이 일반인들에게도 안전한 공간이라고 주장한다. 행여나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치매 환자라도 뇌사 상태가 아니라고, 그저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기능을 상실한 것뿐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의사소통 수단 중에 언어의 비율은 7%에 불과할 뿐이고 55퍼센트는 몸짓, 38퍼센트는 목소리 톤이니 치매 환자와의 소통을 포기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웬디 미첼의 두 딸 역시 그녀의 생각과 의지를 존중했다. 치매 환자라도 모험은 중요하다며 스카이 다이빙에 도전하는 엄마를 말리지 않았고, 여전히 독립적으로 살기 원하는 엄마의 뜻을 꺾지 않았다. 간호사인 딸 세라는 더 나아가, 치매 환자를 사랑한다면 그가 해야 할 모든 일을 대신해선 안 된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가족들이 한 걸음 물러나 치매 환자를 지켜보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나 역시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설사 그릇이 깨끗하게 닦이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설거지를 하시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버지는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엄마가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깨뜨리는 순간 어딘가 다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리게 되고, 점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사실 웬디 미첼은 일반적인 치매 환자의 사례는 아니다. 그녀가 자신의 의지대로 남은 생을 살 수 있었던 건, 아이패드처럼 스마트한 기기를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뜻 수긍하기 힘든 치매의 시그널을 담담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의 병에 매몰되지 않고 마치 소명처럼 치매 환자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전파했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던 대로 삶을 마친다.


그녀의 블로그엔 딸이 올린 웬디 미첼의 마지막 메시지가 올라와 있다.

놀라지 마라, 이 글을 당신이 본다면 나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내 의지대로 더 이상 먹지도 마시지도 않기로 결정함으로써 세상을 떠난다….

생의 마지막 치매 환자의 편견을 여지없이 깨버린 웬디 미첼다운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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