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우유 급식이 다시 학교에 등장하였다. 코로나 시절이 행복하지 않았지만 우유 급식이 없는 것은 좋았다. 그러다 다시 코로나가 사라지고 보통의 학교 모습이 되면서 우유급식이 발 빠르게 들어왔다. 물론, 우유를 마시면 좋고, 시중 가격보다 싼 가격에 먹을 수 있는 점은 장점이나 그 이외의 영역에서는 글쎄다.
이상적인 우유 급식의 모습은 이렇다. 아이들이 1교시 쉬는 시간에 신청한 모든 학생이 일제히 우유를 바르게 열어서 흘리지 않고 마신 뒤, 바르게 우유통에 넣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신청부터 난항을 겪는다. 온라인 가정통신문으로 며칠간 신청을 받았지만 뒤늦게 신청하겠다는 학부모와 전출/입이 아닌 이상 변경은 어렵다는 담당자 사이에서 담임은 고래 싸움에 낀 새우가 되어 버린다. 가정에서의 취소나 신청은 한 번일지 모르나 학교에서 가정의 사정에 따라 자주 변경하는 일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업무가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가 먹을 줄 알았는데 먹기 싫다며 취소를 하는 경우가 빈번하여 학교에서는 가정에서 자녀와 충분한 상의를 하고 신청하기를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마음으로 집에서 우유를 잘 안 먹으니 학교에서 친구들이 먹으면 그 분위기에 휩쓸려 먹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신청을 한다. 그러나 집에서 우유 안 마시는 학생은 학교에서도 마시지 않는다. 이로 인해 남는 우유로 교사와 학생이 대치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고작 우유 하나 때문에 우유 안 가져간 사람을 찾으며 정직을 운운하거나 우유를 잘 마시라는 주의를 주다 보면 어느 순간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은 아쉽게도 매일 발생한다.
‘난 교사인가. 우유 판매원인가.’
우유를 여는 일도 보통일이 아니다. 고학년인 경우에는 그럴 일이 거의 없지만 1학년일 때는 수업 1시간을 우유 잘 여는 법으로 할애하는 것도 좋다. 실물화상기를 켜서 우유 여는 법을 설명하고, 혹시나 우유를 열다가 1차 실패했을 때 반대편으로 여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때 쏟아지지 않게 먹는 방법까지 수업하면 40분이 훌쩍 지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는 시간마다 도저히 안된다며 우유를 가져오는 아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럼 우유를 열었으니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우유를 열고 그 자리에서 바로 먹는 것이 원칙이나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최대치로 바쁘다. 그래서 곧잘 쏟는다. 내 마음도 쏟아진다.
우유를 꽉 닫아서 나머지 우유가 흐르지 않도록 바르게 우유통에 넣어야 하는데 이번에도 아이들은 바쁘다. 빨리 우유 마시고 놀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우뚱하게 던져진 우유에서는 우유 국물이 흐른다. 방울방울. 이번에는 내 마음속 눈물도 방울방울 쏟아진다.
그렇게 매일 우유와 씨름하다 우유송이라도 들으며 흥겹게 우유를 마시라고 하면 ‘우유 싫어송’으로 개사해서 목청껏 부른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우유 싫어. 우유 싫어. 세상에서 제일 싫어.”
이 노래 괜히 틀었다.
오늘도 수업 끝날 무렵 남은 우유를 가지고 아이들에게 호소한다.
“얘들아, 우유가 슬퍼하고 있어. 내 주인은 왜 나를 안 마실까하고 말이야.”
“우유는 좋아할걸요? 살아남은 거잖아요.”
“...”
그래도 맨날 선생님이 우유가 슬퍼한다고 감정에 호소하니 아이들도 남은 우유의 슬픔을 외면할 수 없어 칠판에 온갖 그림을 그려 우유의 주인을 찾는다.
쉬는 시간이 지날 때마다 작품 활동을 새로이 하며 우유 주인 찾기에 몰입한다. 그 간절한 호소 덕인지 우유가 모두 팔리는 기쁨을 만끽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