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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진우 Jan 08. 2022

#나도 공산당이 싫다.

#나도 공산당이 싫다.


 1997년, 내가 연세대학교에 들어간 해는 한총련 사태의 폭풍이 휩쓸고 간 뒤였다. 그래도 신학기의  캠퍼스는 신입생들과 교정에 피어난 꽃들로 들떴지만


 한두번인가 백양로 정문에서 전경들과 대치하는 학생들도 보았고, 사건이 있던 인문대학교는 여전히 굳게 닫혀 그늘 속에 멀리서만 보였다. 학생회관에는 늘 현수막을 바닥에 놓고 이것 저것을 쓰고 있는 학생회 사람들이 있었다.


 집에서 주는대로 먹고 시키는대로 공부하며, 중고등학교 시절 조용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던 소위 명문대생들은 자기 목소리란게 없었다. 교실에서 힘센 아이가 다른 애들을 괴롭히면 그게 내가 되지 않으려 그저 조용히 있었고, 선생님이 부당한 지시나 체벌을 해도 묵묵히 따랐기에 대학에  갔는지,


 대학에 온 우리들은 소위 '부채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여전히 부모님 돈 없이는 비싼 신촌 월세와 등록금도 못 내면서 사회에 비판을 하고, 박정희가 이승만이 군부정권이 조선일보가 나쁘다고 누군가가 말하면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따라했다.

 사회에 기여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가장 공정해야한다고 외쳤던 때였다.


 당시 내가 즐겨 읽었던 책 중에는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 그리고 유시민의 책들이 있었다. 무언가 내가 몰랐던 사회와 흐름에 대해 말해주는 것 같기도 했고 똑똑한 동네 형아가 청산유수로 풀어내는 듯한 이야기가 재미있기도 했다.


 그런데 한번은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수'의 글쓴이인 홍세화가 학교에 와서 강연하는 것을 들었다. 의외였다.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으면 뭔가 열려있고 예술을 사랑하고 자유로울 것 같던 그가 투쟁과 민주를 이야기하고- 뭔가 답답하고 뭐가 그렇게 심각하지? 하고 의아해하던 나와 달리 그 자리에 온 학생들은 마치 우상을 지지하는 것처럼 질문을 가장한 칭송을 이어갔다.


 후에 골수 운동권이었던 어른들과 김영하 같은 한때 연대  운동권이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서 대학시절 '무언가에 씌인' 것 같은 그들의 까닭을 알게 되었다. '기나 도'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정작 본인들은 그게 사이비인줄 모르듯, 학생운동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은 주체사상 교육을 받고 북한을, 아니 북한 정부를 종교적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그런 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에워싼 나같은 많은 대학생들은 그게 어떻게 흘러나온 논리인지 세계와 역사의 흐름은 어땠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사이비 신앙의 교리를 역사의 정의처럼 쉽게 옳고 그름을 말하고 가짜 정의감에 빠져 살아왔던 것을 알았다.


 마치 체게바라가 오토바이를 안데스산맥을 돌며 가난한 인디오들의 삶에 충격을 받고 카스트로와 함께 혁명을 일으키지만, 그들은 결국 소련을 우두머리로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조직을 위해 움직이는 아래의 부속품이  뿐이었고, 불쌍한 인디오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기는 커녕 쿠바 사람들의 삶만 망친 것처럼 말이다.


나도 공산당이 싫다.


 공산주의(Communism)는 얼핏 사회주의(Socialism)와 비슷한 개념처럼 들리지만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에서 비롯한다. 공산주의는 '공산당'이라는 강력하고 독재적인 조직을 위하여 움직인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와 개념이 다르다.

 

 헤겔의 변증법과 정반합을 들먹이며 계급투쟁을 말하지만 강력한 공산당의 존재가 전제로 있는 사상은 필연적으로 오직 공산당을 위한 새로운 착취 국가로 흘러가게 된다. 쿠바건 북한이건 소련이건 중국이건 역사에 예외는 없었다.


 공산주의는 착취를 합리화하는 또 하나의 종교일 뿐이다.


 이집트에선 왕을 파라오라 속이며, 삼국시대엔 불교를 로마는 기독교를 이용하여 왕과 귀족의 착취를 정당화했다.


 공산주의는 계급투쟁을 들먹이며 국민을 착취한다. 결국 모든 이익과 권리는 공산당 중심부를 향하게 되어있고, 절대교리처럼 그것에 이견은 존재할 수 없다.


 공산주의는 '진보'(Progressivism)라는 말로 위장될 수도 없다. 진보와 보수라는 말은 영국의 대처와 토니 블레어, 미국의 레이건과 클린턴을 거치며 자유주의가 수정적인 자유주의로 흐르며 나온 용어로, 중국과 북한의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대부분의 우리의 가짜 진보는 개념적으로 '진보'와 전혀 다르다.


 결국 당을 위하는 중심주의가 어찌 진보라는 말로 포장될 수 있는가? 소수에 의한 착취로 돌아가는 것은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일 뿐 진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나도 공산당이 싫다.


 자유로운 영혼과 사람의 사람다움을 거부하는 공산주의가 싫다. 공산당의 부역자나 앞잡이로 살아가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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