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키안 스킴> 분석 및 비평
웨스 앤더슨 감독의 12번째 장편영화 페니키안 스킴이 개봉했다. 현존하는 영화감독들 중 최고 수준의 역량을 가진 영화감독이 꾸준히 장편을 발매해 준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스파이 스릴러의 외연을 가지고 있지만 당신을 전혀 긴장시킬 생각이 없는 이 특이한 영화를 A부터 Z까지 파헤쳐보자.
"6번의 추락 사고와 수많은 암살 위협으로부터 살아남은 유럽 최고의 부호 자자 코다는 일생일대의 숙원사업인 페니키안 스킴을 완성하기 위해 외동딸 리즐을 상속자로 정하고 집으로 불러들인다. 갑작스러운 적들의 방해로 사업이 실패할 위기에 처하자, 자자는 리즐 그리고 가정교사 비욘과 함께 페니키아로 떠난다."
<페니키안 스킴>을 이야기하기 전, 웨스 앤더슨이 어떤 감독이고 어떤 영화를 찍어 왔는지 가볍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웨스 앤더슨의 초기 영화들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상실을 앓고 있는, 어딘가 결핍이 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의 결핍을 달래주는 것은 자신의 대단한 변화나 주변인의 대단한 헌신이 아니다. 주변인들은 느슨하게 연대하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다. 한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웨스 앤더슨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별 것 아니지만 위안이 되는 주변인들과의 유대로 가득 찬 세상, 돌이켜보면 아름다운 세상이기에 웨스 앤더슨의 미장센은 이 세상에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덧입힌다. 인물들은 모두 감정을 덜어낸 연기를 펼치며, 덕분에 관객들은 특정 인물에 깊게 감정이입하여 영화를 관람하기보다는 인물 개인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상황 자체를, 세상 자체를 더욱 집중하여 바라보게 된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세계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기점으로 한 단계 진화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후로 웨스 앤더슨은, 매번 자신의 영화가 예뻐야 하는 이유에 대해 멋진 대답들을 제시해 왔다. 그 대답에는 항상 '예술가'가 있다. 전쟁 이전의 아름다웠던 시절, 벨 에포크를 회고하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수필 <어제의 세계>에서 영감을 받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화자를 3번이나 바꿔가며 이 영화가 입에서 입으로, 또 입에서 입을 통해 옮겨진 오래된 이야기임을 밝히며 진행된다. 우리가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아름다운 시대를 동경하게 하는 것은 결국 여기에 자신의 기억을 덧입혀 옮기는 '예술가들' 때문이라는 점을 전하기 위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화면은 예뻐야만 한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프랑스의 도시 '앙뉘'를 다루는 잡지사 프렌치 디스패치의 이야기다. 영화 속 도시 앙뉘는 사실 높은 범죄율과 더러운 도시환경을 가진,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도시이다. 그러나 이 도시가 아름다운 이유는, 소식을 전하는 기자들 즉, 이야기를 전하는 예술가들 덕분이다.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웨스 앤더슨은 다시 한번, 예술가들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프렌치 디스패치> 이후 웨스 앤더슨은 로알드 달의 동화를 원작으로 하는 연작 단편영화 시리즈 네 편을 만들었다. 이 중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는 영화 속 내레이터가 직접 관객에게 이야기를 '구전'하는 방식을 통해 원작의 작가 로알드 달의 존재감을 영화 내내 드러낸다. 역시 예술가에 대한 영화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예술가의 수필, <프렌치 디스패치>가 르포기사, 로알드 달 단편 시리즈들이 동화였다면,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연극이다. 연극 무대 안팎을 오가는 방식으로 촬영된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그 세상의 요소들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아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그 연극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등장한다. 연극 안에서는 외계인들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그저 외계인과의 만남 그 자체의 경이로움을 즐기는, 삶 자체를 즐기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해할 수 없어도 연기하는 배우들, 이해할 수 없어도 즐기며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예술과 삶에 대한 헌사를 담은 작품이다.
서론이 길었다. 지금껏 웨스 앤더슨의 모든 작품들은 그 독특한 형식이 단지 과시나 미적 즐거움만을 위한 것이 아닌, 언제나 나름의 이유를 갖고 아름다웠음을 확인했다. 이제 <페니키안 스킴> 차례다. <페니키안 스킴>에는 영화 안에도, 밖에도 예술가가 없다. 이 영화는 오히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전의 웨스 앤더슨 영화들과 더 닮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초기작들과도 다른 점이 있다면, 등장인물의 수에 있을 것이다. 해체된 중산층 가족의 관계 회복을 다룬 웨스 앤더슨 영화는 이전에도 몇 편 있었지만, 그 영화들에는 항상 대가족이 등장해 왔다. 이 영화는 주인공을 둘러싼 많은 이들의 느슨한 연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딸, 두 사람의 끈끈한 연대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다. 예술가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이 영화는 왜 예쁠까?
<페니키안 스킴>은 일종의 오디세이, 연대기, 신화이다. 주인공 자자 코다는 사업 계약에서의 손해를 메우기 위해 낯선 나라 페니키아의 여러 인물들을 한 명씩 순서대로 방문한다. 이 여정은 종종 종교적인 메타포들을 담는다. 성경적 존재인 누바르 삼촌과 싸우는 장면은 더욱 노골적으로 상징적이다. 그러나 이 신화는 어느 특정 한 종교의 신화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당장 누바르 삼촌과의 싸움이 일어나는 장소는 이집트 벽화와 닮아 있다. 나이트클럽 천장에 총을 쏴대는 테러리스트 괴한은 공산주의자며 박애주의자다. <페니키안 스킴>은 '어느 한쪽도 지지하지 않는 방식으로 쓰인, 무신론자의 신화'다. 그래서 이 영화가 100%에 가까운 인공성을 갖춘, 아름다운 미장센을 갖고 있는 것도 자연스럽다.
이 영화의 모든 곳에 GAP이 있다. 주인공 두 사람의 여정은 계약서 속의 GAP을 메우기 위한 여정이다. 웨스 앤더슨은 GAP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다양한 방식으로 언급하며 노골적으로 이 작품의 주제로 드러내고 있다. 대사뿐만 아니라, 이미지에는 더 많은 GAP이 있다. 주인공의 사업은 빈곤층과 부유층 사이에 의도적인 틈을 만들어 하층민들을 통제한다. 이 통제에는 동양과 서양 사이의 틈 역시 내포돼 있다. 1950년대 페니키아라는 가상의 동양 지역의 하층민들을 통제하는 주인공은 유럽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이, 서양인이다. 서양인들의 말 한마디에 페니키아인들의 삶이 왔다 갔다 한다. 부녀 관계에도, 즉 세대와 세대 사이에도 틈이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 인물들의 종교에도, 사상에도 틈이 있다. 주인공의 딸은 수녀이고, 주인공은 무신론자다. 이들이 만나는 어떤 이는 무신론자이고, 테러리스트들은 공산주의자다. 누바르 삼촌은 대놓고 성경 속 인물로 등장하는데 그와 싸우는 곳은 이집트 벽화의 모습과 꼭 닮았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도 GAP이 있다. 주인공은 이승에서의 냉정한 사업가로서의 모습과 저승에서의 삶을 뉘우치는 태도 사이에서 시종 왔다 갔다 한다 이렇게 많은 GAP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등장인물과 많은 장소, 많은 시각적 요소들이 난립함에도 어지러워 보이지 않는 것은 이 영화의 장점이다.
GAP은 화면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전에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그는 의도적으로 영화의 화면비를 3번이나 변경하며 영화의 구전된 이야기로서의 속성을 강화한 바 있다. 이 작품의 화면비는 1.5:1이다. 어떤 영화에서도 사용되지 않는 이 화면비를 굳이 채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1.5:1은 가장 흔히 사용되는 화면비인 4:3과 16:9 비율 사이에 위치하는, 끼인 화면비다. 즉, GAP이다.
<페니키안 스킴>은 세상의 틈을 메우는 영화다. 웨스 앤더슨이 택한 방식은 지금까지의 그의 영화들과는 다른 '끈끈한 연대'이다. 사랑을 배우지 못한 채 불행한 삶을 사는 부자 주인공의 모습은 <시민 케인>과 닮아 있다. 그러나 이 작품 속 자자 코다가 시민 케인과 다른 점은 그가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 화해를 이룩하는 이라는 점이다. 끈끈한 연대를 그리는 웨스 앤더슨은 낯설다. 두 부녀의 끈끈한 우정을 그린 이 영화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인물에 공감하기보다는 상황 자체를 바라봐주길 바라는 웨스 앤더슨의 연출론과 반대되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그가 이 작품을 찍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느 때보다 사랑이 필요한 시대다. 세상은 종교, 세대, 나이 등 저마다의 이유로, 저마다의 GAP으로 분열되었고 곳곳에서는 그 분열의 결과가 폭력으로 드러나고 있다. <페니키안 스킴>은 시대에 대한 탁월한 예술가의 대답이다. 동시에 <개들의 섬>에서의 동양에 대한 부적절한 묘사로 비판을 받았던 것에 대한 사과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더 끈끈하게 연대하고, 용서를 빌며, 용서를 하며,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러-우전쟁 시기를 대표하는 영화로 남았다면, <페니키안 스킴>은 이스라엘 - 하마스 전쟁 시기를 대표하는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