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메리의 아기>, <마더>, <케빈에 대하여>
관객에게 정보를 제한하는 것이 반드시 영화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진 않는다. 때로는 영화가 자신의 패를 전부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관객의 충격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로즈메리의 아기>의 감독 로만 폴란스키는 예상했던 공포를 실제로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지 일찍이 이해하고 있었다. 아기를 임신한 주인공 로즈메리의 주변에 악마를 신봉하는 이들이 아기를 빼앗으러 다가온다. 이웃도, 산부인과 의사도, 심지어 남편 마저도 어딘가 이상하다. 영화 전반에 짙게 깔려있던 악마의 그림자를 마침내 실제로 마주하게 되었을 때, 관객은 경이와 무력감을 동시에 느낀다. 유산된 줄 알았던 아이가 사실은 남편과 이웃들에게 빼앗긴 채 흉측한 모습으로 악마의 자식으로 바쳐지고 있었다. 영화 초반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관객의 예상에서 단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끊임없이 발버둥쳐보지만 결국 악을 목도할 수 밖에 없다.
극도의 무력감 뒤에는 또한번의 절정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모성애에 대한 영화의 무한한 긍정이다. 비록 그 아이가 남편의 자식이 아니라 악마의 흉측한 자식일지라도, 어머니는 아기를 포기할 수 없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 적마리아가 되기를 택한다. <마더>의 봉준호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모성애의 선천성을 이야기한다. 자식이 살인의 누명을 쓰자 필사적으로 아들을 구해내려던 어머니는, 아들이 진범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도 아들을 놓지 못한다. 오히려 아들을 구해내겠다는 그녀의 헌신은 진실을 알아챈 후에는 광기에 가까워진다. 어머니의 우선순위에서 내리사랑은 도덕보다 한참 앞서있다.
과연 모든 어머니는 아이를 반드시 사랑할까. 살인범 아들도, 악마의 자식조차도 모든 어머니들은 기어코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사실 우리가 어머니들에게 기대하는 (어쩌면 강요하는) 모성애라는 것이 그 자체로 오만이나 폭력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케빈에 대하여>의 린 램지는 만약 선천적으로 모성애가 적은 어머니에게 선천적으로 악한 존재가 태어나더라도,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으로 감쌀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한다. <케빈에 대하여>는 영화의 처음에서 이미 '어머니가 아이를 끝까지 사랑할 수 없었고, 양육하는데에도 실패했다'는 결론을 제시하고 출발한다. 케빈은 학교 체육관의 문을 잠근 채 학생들을 화살로 쏴 죽이고는 자신의 아빠와 동생까지 죽여버렸다.
<케빈에 대하여>의 엠마는 자유로이 세상을 여행하던 작가였다. 그녀는 남편을 만나 충동적으로 임신을 하게 된다. 충동적으로 시작된 임신 이후의 삶은 그녀를 엄마라는 이름으로 구속시켰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를 그녀는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 다른 엄마들보다 육아가 서툰 엠마는 공사장 앞에 유모차를 세워두고, 그 소음으로 아이의 울음소리를 가리고 싶어할 만큼 너무도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엠마는 선천적으로 사랑이 적은 엄마였다.
케빈은 선천적으로 악한 아이였고, 그의 악함은 모성애의 부재로 완성된다. 그는 어릴적부터 이미 자신이 사랑받지 않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모성애보다 더욱 본능적이다. 엠마가 케빈을 사랑하지 않지만 사랑하는 척을 하는 어머니라면, 케빈은 어릴적부터 엄마를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척을 한다. 케빈은 끊임없이 악한 행동을 통해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한다. 악은 선을 알지만 선은 악을 모르기에, 엠마는 케빈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녀는 분명 아이를 최선을 다해 키웠다. 그렇게 아이들이 집을 벗어나 사회에 던져졌을 때, 케빈은 집단학살사건의 가해자가 되었다. 만약 사회의 누군가가 케빈같은 사람을 본다면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대체 아이를 어떻게 키웠길래 이런 일이 생겼는가', 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어머니와 아들의 삶을 평생 봐온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본작은 모성애를 당연시 여기고 양육의 책임을 모두 어머니에게 전가하는, 우리의 편견에 대해 묻는다. 모성애라는 것은 모두가 같은 크기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어머니의 희생은 당연시된다. 린 램지 감독은 자신의 인터뷰에서, 엠마는 그 어떤 잘못도 없어 보이게끔 연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는 “그래도 엄마에게 어떠한 잘못이 있지 않을까?”하고 자연스레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다. 좋은 작품들은 작품을 완전히 보고 나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케빈이라는 괴물이 사회에 내던져진 것은, 우리의 무관심과 편견이 만들어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그리고 다른 모든 어머니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