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주 어릴 적부터 감정을 분별하도록 키워졌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을 나쁜 감정과 좋은 감정으로 나누는데 익숙하다. 분노나 슬픔,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억압하고 회피하면서 즐거움이나 따뜻함, 뿌듯함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붙잡고 집착한다.
감정을 좋고 나쁜 것으로 나누는 것이 당연하고 합당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본래 감정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감정을 옳고 그름, 좋고 나쁨으로 분별하는 우리의 습관은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내고 우리가 배우고 받아들여 믿게 된 신념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는 내가 살아온 과거가 함축되어 있다.
미움, 분노, 슬픔, 원망, 두려움...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감정들 밑에는 좌절된 나의 욕구가 있다. 어른이 된 후에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어린 시절에 좌절된 욕구를 채우기 위해 움직이고 추구하고 선택한다.
몸이 자라 어른이 된다고 해서 결핍이 사라지거나 저절로 채워지는 법은 없다. 내가 왜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어린 시절에 좌절되고 결핍된 나의 욕구들을 탐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나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불편한 느낌을 주는 부정적인 감정에 더 집중하고 탐색할 필요가 있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반복되는 부정적인 감정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나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어린 시절 엄마와의 관계에서 좌절된 욕구들이 자아내는 ‘아픈 감정’이다.
엄마에 대한 나의 감정은 어린 시절 나와 엄마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기록과 같다. 감정에는 죄가 없다. 모든 감정은 좋은 것이다. 모든 감정은 나를 위해 나에게 온다. 감정은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가장 믿을만한 단서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통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움직인다. 사랑할 수 없는 엄마를 사랑하려고 애쓰고, 오래된 슬픔과 분노를 털어버리려고 애쓰고, 원망스럽고 미운 엄마를 용서하려고 애쓰고, 엄마를 닮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유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엄마가 필요 없다고, 엄마를 잊었다고, 엄마를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도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느낌과 감정을 외면하고 세상의 신념(엄마를 사랑해야 한다, 낳아준 은혜를 갚아야 한다...)에 맞추려 애를 쓸수록 나의 진짜 자아와는 점점 멀어진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나쁜 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아 상실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방법을 지속적으로 쓰는 이유는 어린 시절에 습득하여 이미 몸에 밴 방법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에게 가장 끔찍한 일은 엄마로부터 버려지는 일이다. 엄마에게 의존하여 살아야 하는 아이들은 엄마가 자신을 방치하고 학대해도 엄마를 사랑하고 이해하려고 죽을힘을 다해 애를 쓴다. 엄마의 필요를 채워주는 쓸모 있는 아이가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의 감정과 욕구도 버리고 가짜 자기를 만들며 살아간다.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다.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아이에게 버려짐은 죽음을 의미한다.
죽은 어머니, 에드바르 뭉크, 1899~1900
“저는 어린 시절 엄마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거든요. 근데 왜 이렇게 자존감이 낮고 엄마를 보는 게 고통스러운 걸까요.”
낮은 자존감, 상시적인 불안, 억압된 분노, 삶을 방해하는 외로움,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 같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증상들을 겪고 있다면 ‘나는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라는 나의 신념이 버림받은 아이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환상은 아닌지 탐색해 보아야 한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들이 지속적으로 좌절되고 거부되는 고통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 살아남기 위해 진실로부터 도망쳐서 자신만의 환상으로 혼자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만약 부모가 ‘너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있어.’라는 메시지를 주면서 아이의 욕구를 계속 외면했다면 아이는 더 혼란스럽고 자신의 느낌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문제 부모의 가장 큰 특징은 아이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부모의 미해결 된 심리적 문제 때문에 아이의 감정이나 욕구에 관심을 가질 수도 충족시킬 수도 없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고통과 결핍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도리어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데 아이를 이용하게 된다.
충족되지 않은 어린 시절의 결핍으로 내면에 구멍이 나 있는 부모는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아이가 자신의 사랑을 느끼게 할 수는 없다. 부모 또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할 수는 없다.
한 인간이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에 기본적인 욕구들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생존의 욕구, 안전의 욕구, 돌봄의 욕구, 접촉의 욕구... 불행한 엄마는 자신의 결핍 때문에 아이의 욕구에 섬세하게 반응할 수 없고 아이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줄 수도 없다.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가 젖었거나 몸이 불편하거나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외로울 때 엄마의 세심하고 즉각적인 돌봄으로 욕구의 충족을 경험할 때 아이는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기본적으로 사랑은 생존, 안전, 지지, 접촉, 돌봄과 같은 욕구의 충족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공허하고 불안하고 불행하다.’라는 신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을 틀리다.
‘어린 시절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공허하고 불안하고 불행하다.
어린 시절 충분히 좋은 엄마의 적절한 보살핌이 우리의 전 생애에 영향을 주는 이유는 그 보살핌을 통해 나를 보살피는 방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의 최초의 자아는 엄마의 눈 속에서 시작된다.
엄마를 사랑할 수 없는 나의 내면에는 아직도 엄마의 사랑을 기다리고 엄마를 찾아다니는 어린아이가 있다. 그 아이의 결핍과 아픔에 대한 불안과 비난을 멈추고, 연민과 지지를 보내며 그 아이와 한 편이 되어야 할 시간이다. 자식이라면 엄마를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는 관념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그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엄마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폭력적이고 신화적인 신념이다.
엄마를 이해하고 용서하려고 지나치게 애쓰지 말라. 엄마에게 집착하면 필연적으로 나를 놓쳐버리게 된다. 고통스러운 관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섣부른 용서도 금물이다. 그것은 또 다른 억압과 거짓을 낳는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숨으면 그것과 마주치지 않을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나의 인생은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의 길이어야 한다. 엄마를 위한 길도 아니고, 엄마를 업고 가는 길도 아니며, 엄마에게 업혀 가는 길도 아니다. 우리는 각자 홀로 태어나서 홀로 죽으며,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나만의 고유한 삶의 길을 가야 한다. 누구와도 다른 나만의 삶을 사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다.
이제 나의 에너지를 온전히 나를 행복하게 하는데 쓰라. 나를 위해, 나의 온몸으로, 나만의 리듬으로, 내 삶의 춤을 추시라. 누구도 나의 춤을 대신 춰 줄 수 없다.
나는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를 보냈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엄마도 인간일 뿐 그녀를 신의 영역으로 밀어 올리지 말라. 그런 환상이 평범한 인간인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한다. 엄마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신념은 엄마로 살아가고 딸로 아들로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
별 거 아니어도 되는 자유, 보잘것없어도 되는 자유, 무능해도 되는 자유, 부족해도 되는 자유를 허락하라. 분노해도 되는 자유, 슬퍼해도 되는 자유, 불안해도 되는 자유, 두려워해도 되는 자유를 허락하라.
보잘것없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무능하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분노하는 순간에도, 불안한 순간에도 근원적인 나는 온전하고 완전하다. 생각과 느낌이 내 몸을 관통하도록 허락하면 그뿐이다. 지금을 온전히 허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롭다.
모성을 폄하하거나 왜곡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성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신성시하면서, 그 환상적인 모성에 부합하느라 지나치게 애쓰게 하고 부족감과 열패감으로 스스로를 비난하게 만드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엄마와 아기, 에곤 쉴레, 1909~1910
우리가 찾아 헤매는 완전한 엄마는 없다. 모든 엄마는 부족하다. 모든 딸과 아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러니 완전한 엄마가 되려고 애쓰지도 말고 완전한 엄마를 찾아 헤매지도 말라.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엄마와 맞짱을 뜨라. 엄마와 싸우라는 뜻이 아니다. 어린 시절 나를 보호해주지 못하고,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하고, 나의 욕구를 지속적으로 외면하고, 나를 버리고, 나를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데 이용했던 엄마의 면전에서 분노를 퍼붓고 원망을 쏟아놓으라는 말이 아니다.
더 이상 나의 행복을 엄마에게 의존하지 말고, 엄마의 사랑과 인정을 기다리지도 말고, 엄마를 가해자로 놓고 나를 피해자로 규정하지도 말고, 엄마를 행복하게 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각자의 길을 홀로 걸어가는 인격체로 마주 서야 한다. 엄마는 엄마의 길을 가도록 놓아주고, 나는 나의 길을 가는 것이다.
사랑할 수 없는 엄마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애쓰지 말라. 반드시 엄마를 이해해야 하는 것도 사랑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해 억지로 용서하려고 애쓰지도 말라. 섣부른 용서는 또 다른 고통을 낳는다. 용서는 애써서 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에도 집착하지 마시라. 지나치게 애쓰고 집착하면 내 자유와 삶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다. 집착하는 것에 나의 행복과 불행을 매달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고통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삶을 누리는 것이다. 내가 자유로워지기 위해 내가 온전해지기 위해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 엄마를 사랑할 수 없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애쓰면서 나는 더 불행해진다. 내가 온전해지기 위해 엄마의 사랑과 엄마의 인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착각이며 망상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 엄마에게 의존했고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의 유아기적 신념이다.
나는 나 인 것으로 이미 온전하고 완전하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
나를 탐색하고, 나를 이해하고, 나를 용서하고, 온전하고 귀한 나의 본질을 발견하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데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기에도 인생은 짧다. 나 자신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혐오하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하여 자유롭고 창조적인 나의 삶을 즐기는 것이 나의 유일한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