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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May 18. 2023

감정 이야기 2

감정을 탐구하다



감정은 파도와 같다. 파도가 바다의 춤이듯 감정은 삶의 춤이다.



Illustrated by Michael Emberley

나는 세상의 모든 아기들처럼 온전하고 완전하게 태어났다. 모든 아기가 그러하듯 나는 누구와도 다른 유일한 존재였다. 내가 나로 태어나 나로 살아가는 것이 내가 세상에 온 유일한 이유였다.


나는 세상의 모든 아기들처럼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온몸으로 우는 아기였다.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울지 않는 곳이 없었다. '울어도 되는 걸까?' 눈치 보는 법도 없었다.


내게는 울음도, 웃음도, 슬픔도, 즐거움도, 마치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바다 위의 파도와 같았다. 큰 파도도, 작은 파도도, 거친 파도도, 살랑거리는 파도도, 제 모양대로 생겨나서 맘껏 춤추다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세상의 모든 아기가 그러하듯 온갖 파도를 허락하는 바다처럼  나는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데 자유로웠다.


나의 울음은 내 몸의 느낌을 온전히 뿜어내는 존재의 표현이었고, 아직 언어가 없는 한 인간이 세상을 향해 보내는 구명 신호였다. 나의 웃음처럼 나의 울음도  지금 이 순간 내 몸이 느끼는 소중한 진실이었다. 나는 생겨났다 사라지는 즐거움을 붙잡지도 않았고 찾아온 슬픔을 피하지도 않았다. 웃음과 울음은 나에게 다를 것이 없었다.


나의 감정에는 본래 이름이 없었다. 그것은 바다 위에 일어나는 파도처럼 내 몸에서 일어나는 삶의 느낌들이었다.  때로는 몸을 수축하게 하고 때로는 몸을 부풀게 하는 아무것도 문제 될 것 없는 것들이었다. 바람이 거세지면 세차게 일어나고 바람이 잦아들면 잔잔히 일어나는 삶의 춤이었다. 슬픔이니 기쁨이니 두려움이니 뿌듯함이니 분노니 초라함이니 허다한 이름은 본래의 것이 아니라 부모와 세상이 붙여준 이름이었다.

이 감정은 좋고 저 감정은 나쁘다는 분별 또한 본래의 진리가 아니라 부모와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크고 거칠다고 나쁜 파도가 아니고 잔잔하게 일렁인다고 좋은 파도가 아니듯 감정도 그러하다.


몸의 느낌을 좋다 나쁘다 판단하지 않는 아이의 몸은 감정이라는 파도를 따라 마음껏 춤을 춘다. 

폭풍이 불어오면 잡아먹을 듯 크고 빠르고 거칠게 춤을 추고, 미풍이 불면 작고 느리고 부드럽게 춤을 춘다.

그래서 아이의 몸은 매 순간이 처음인 것처럼 자유롭다. 


나도 춤추는 아이였다. 크거나 작거나, 빠르거나 느리거나, 거칠거나 부드럽거나. 슬프거나 기쁘거나, 불어오는 바람 따라 일어나는 대로 춤추는 파도였다. 






더 이상 춤추지 않는 아이 : 나는 왜 울지 않는 아이가 되었을까?



내 몸은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었다.  

울지 마라. 느끼지 마라. 화내지 마라. 그리워하지 마라. 즐거워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궁금해하지 마라. 움직이지 마라. 모른 척 해라. 무조건 순종해라.

어린 시절 아버지의 집에서 사는 동안 내가 지켜야 했던 규칙들이었다.


엄마가 떠나고 나는 검은 안갯속에서 늘 누군가를 기다리는 아이였다. 기다림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밤낮없이 이어졌다. 낮에도 검은 안개에 가려 내게는 해가 들지 않았다. 나는 늘 혼자였고 배고팠으며(내 몸은 마흔이 넘도록 그리움과 허기를 구분하지 못했다) 상처투성이의 맨발이었고 몸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painted by Haewon

아버지는 나의 눈물을 유난히 싫어했다. 울면 매를 맞았다. 내 슬픔이 그가 자신의 내면에 감춰둔 오래된 상처를 건드리는 것 같았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도 죄가 되었다. 드러낼 수 없는 그리움은 내 살과 뼈를 녹이고 엉키고 들러붙어 내 몸이 되었다. 


엄마 없는 집에서 나는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아버지의 너른 품과 아버지의 따뜻한 눈빛과 아버지의 부드러운 음성을 기다렸다. 나는 사랑을 먹어야 자라는 작은 아이였는데 아버지는 내게 오는 법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혼자였고 언제나 배가 고팠다.


바다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된 여인처럼 나는 사랑 없는 집에서 사랑을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오랫동안 울지 않았고 웃지도 않았으며 춤도 추지 않았다. 

나만의 감정을 잃으면서 나만의 색깔과 리듬을 잃은 지 오래였다.


당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그곳은 어떠했는가? 당신도 오지 않는 사랑을 끝없이 기다리는 아이였는가?








감정은 죄가 없다. 죽을 것 같아서 죽이고 싶은 것이다.



"엄마를 죽이고 싶었어요... 저 되게 나쁜 사람이죠... 지금도 엄마와 한 공간에 있으면 숨이 막히는 것 같아요"

승희는 전쟁터 같은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장 안전해야 할 엄마는 어린 승희에게 가장 큰 위험이고 위협이었다. 아이에게 부모가 가장 안전해야 하는 이유는 아이에게 집은 최후의 피난처이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는 갈 곳이 없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아이에게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리고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아이의 몸과 마음은 황폐하게 메말라간다.


사랑 없는 집은 아이에게 생존을 위협받는 전쟁터와 같다.  승희는 가정을 버리고 밖으로만 도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애정을 갈구하며 집착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매일 밤 승희는 부모의 싸우는 소리와 엄마의 한탄과 분노와 눈물을 견디며 잠을 청해야 했다. 언제 그들이 나를 버릴지 모르는 두려움이 24시간 어린 승희를 짓눌렀다. 그녀는 엄마의 욕구와 감정을 돌보느라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버리고 살아야 했다. 승희에게 집은 끊임없이 생존을 위협받는 전쟁터였다. 전쟁터에서는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적을 죽여야 한다. 끊임없이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이 사라져야 내가 산다. 내가 숨을 쉴 수 있다. 잃어버린 내 삶을 되찾을 수 있다.

painted by Giovanni Bragolin

죽이고 싶었다는 것은 죽을 것처럼 두려웠다는 고백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받을 수 없었고 아무리 나를 버리고 죽여도 엄마를 만족시킬 수 없었던 아이의 비명이다. 


나의 감정은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과거의 기록이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용하고 탐구해야 할 소중한 기록이다. 


당신이 느끼는 크고 깊은 미움 아래에는 당신이 어릴 적 묻어 두었던 크고 깊은 두려움이 있다. 당신이 그 미움에 집중하고 탐구한다면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의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엄마를 죽이고 싶은 당신의 미움은 죄가 없다. 감정은 죄가 없다. 감정을 느끼는 당신도 죄가 없다. 


당신이 죄책감을 느끼는 그 감정은 당신 내면의 아이가 보내는 구조 신호이다. 자, 이제 과거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당신 내면의 아이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그 전쟁터에서 아이를 구원해야 할 시간이다. 








다시 파도처럼 춤추며 살기 위해 ; 느끼면 안 되는 감정이란 없다



당신이 내면에 감추고 있었던 그 아이가 어떤 아이여도 괜찮다. 어떤 상처를 가진 아이여도 괜찮다. 어떤 감정을 느끼는 아이여도 괜찮다. 분노로 가득 찬 아이여도 상관없다. 슬픔으로 가득 찬 아이여도 상관없다. 초라하고 보잘것없어서 절망을 느끼는 아이여도 상관없다. 무능하고 시기심 많은 아이여도 상관없다. 언제나 혼자였던 외로운 아이여도 상관없다. 모든 감정은 정상이다. 이상한 감정도 없고 느끼면 안 되는 감정도 없다.


그 아이가 느낀 감정에는 모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세상 누구도 몰라주는 그 이유를 당신이 알아주면 된다. 굶주린 배를 안고 남루한 옷을 입고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맨발의 그 아이를 따뜻하게 안고 말해주자. 괜찮아. 네 감정에도 아무런 잘못이 없어. 그 감정을 느낀 너도 아무런 잘못이 없어. 그런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너에게 있었지. 어떤 감정을 느껴도 괜찮아. 나는 너를 버리지 않을게. 언제나 네 곁에 있을게. 나의 가장 소중한 아이야.


illustrated by Michael Emberley


당신이 왔으니 아이는 오지 않는 부모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어떤 감정도 끌어안는 당신의 품에서 아이는 당신과 하나가 되어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춤을 출 것이다. 당신을 믿고 파도처럼 춤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감정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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