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책없이 내 얘기를 다 했네. 고마워요 들어줘서’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나와 두 시간 동안 전화로 수다를 떨던 출연자가 자신의 인생사를 다 털어놓은 것이 이내 멋쩍은지 말끝을 흐린다. 괜찮다, 늘 있는 일이다. 나도 누군가의 인생을 들을 수 있어서 값진 시간이었다.
3주에 한 편 만드는 1시간짜리 방송. 일반인 출연자가 주인공이 돼 한 시간을 이끌어간다. 한 명을 주인공으로 한 시간의 방송을 만드는 건 꽤나 고달픈 일.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한 시간을 꽉 채울 수 있다.
그러기에 난 3주 동안 출연자와 베프가 된다. 첫 통화 때 머뭇거리던 출연자들이 어느새 나에게 남에게 말 못 했던 상처부터 남편 욕, 아들 욕, 본인의 치부까지 모든 걸 다 털어놓고 끝내 눈물을 보이는 분들도 많다.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취재파일을 작성하던 막내가 묻는다. 지인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얘기를 끄집어 올 수 있냐고, 나와 그녀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거라 답해줬다.
우리는 가까운 지인보다 나랑 접점이 없는 타인이 더 편할 때가 있다. 내 허물을 지인에게 말하면 언젠가는 치부가 될 거라 생각해 마음을 숨기고 숨기다가, 결국 답답하니 말은 하고 위로는 받고 싶은데 그럴 때 상냥한 타인이 참 편하다. 내 허물을 말해도 화살이 되어 돌아올 일이 없기에.
친한 피디는 5년 전 헤어진 남친하고 1년에 두어 번 통화해 서로 자기 얘기하다 끊는다고 한다. 처음 들었을 땐 요상하다 생각했는데, 이제 돌아보니 이해는 된다. 지인은 불편하고 타인은 낯설고 앞으로 엮일 일은 없지만 나를 잘 아는 상대만큼 좋은 대화 상대는 없겠지. 드라마 같은 인연이다.
여튼 출연자들은 제작 기간 내내 나를 베프로 생각하고, 전화해 수다도 떨고 새벽에 카톡도 보내며 나와 인생 스토리를 나눈다. 물론 제작 기간 내내 나도 그녀들의 인생에 빠져든다. 내가 그 인생에 매력을 느껴야 좋은 대본이 나오니깐. 대화를 하며 한 올 한 올 그녀들의 매력을 엮는다.
문제는 방송제작이 끝나고다. 가끔 안부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지만 사실 제작기간처럼 내가 그녀들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는 건 불가능한 일. 하지만 출연자들은 그간의 정이 들어서인지 내게 계속 전화와 카톡을 한다. 계속 들어주고 싶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출연자가 몰려오고, 다른 출연자의 인생 얘기를 듣다 보면 이전 출연자와는 서서히 멀어진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저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녀들과 내가 나눴던 대화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지 않게, 방송으로 잘 만들어, 평생의 추억을 남겨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기간제 베프가 사라져도 슬프지 않게.
출연자들의 얘기를 들어주다 보면 나도 지칠 때가 있다. 그래서 나도 타인 같은 지인이 있는 브런치를 찾는다. 처음에는 그저 내 얘기를 할 곳이 필요해서 퇴근하고 분노의 글을 썼다. 사실 누가 볼까 싶었다. 그런데 구독자수가 점점 늘다 보니 나도 얘기를 가리게 되고 찌질한 글 대신 반짝이는 글을 썼다 지웠다 한다. 그래도 요즘에는 날 것 그대로 쓰려고 노력하는 편. 내 찌질함을 사랑했던 초기 독자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다.
상냥하지도 않고 날 선 글을 매 번 들어줘서 감사합니다. 내 진짜 얘기를 할 곳은 이곳뿐이에요. 고맙습니다 타인 같은 지인 구독자님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