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이들과 소중한 것들이 분명해진 특별했던 추석
그동안 코로나 방역수칙으로 어머님은 찾아뵀지만, 시댁 식구들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드디어 3년 만에 맞이하게 된 거리 두기 없는 추석 연휴! 명절증후군이 뭐냐며 오랜만에 형님들과 조카들 볼 생각에 지긋지긋하던 명절 음식 준비도 기꺼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거기에 더해 특별한 추석 선물도 기획했다.
쑥과 유자청을 넣은 파운드케이크 세트로 <쑥스럽군과 유자양>이란 이름도 붙였다. 미리 샘플 작업을 통해 맛과 포장까지 검토를 마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추석 연휴를 기다렸다. 그런데 남편이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 이틀 뒤 나도 확진을 받았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추석 연휴 내내 격리됐다. 용케 비껴간 두 딸도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늘 시끌벅적하던 거실이 한순간에 텅 비고 조용해졌다. 처음엔 그 고요함이 불안하고 어색했다. 왜 하필 지금이냐며 원망 어린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코로나 걸리기에 마침맞은 타이밍이란 게 있을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그나마 연휴 기간에 물려 격리되는 게 일상생활의 지장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 집안일에서 손 떼고 온전히 나만의 시간으로 채운 명절 연휴가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없었다. 며느리가 되고 두 딸의 엄마가 된 이후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명절 연휴의 여유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즐기자!
처음 이틀은 고열과 약기운으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동안 생각이 많아 잠 못 이루던 불면의 밤들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 후 별다른 증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신생아처럼 먹고 자야 빨리 낫는다는 지인의 조언을 실천했다. 끼니때가 되면 먹고 졸리면 잤다. 깨어있는 동안은 밀린 드라마와 영화를 섭렵하며 본능에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 문득문득 이래도 되나 싶은 죄책감이 들었지만,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 작정하고 무시했다.
끼니는 가까이 사는 가족과 지인들이 문 앞에 걸어두고 간 음식과 배달음식으로 해결했다. 멀리 사는 친구들은 메신저 선물로 먹거리를 보내왔다. 그 마음이 어찌나 고맙던지 내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이 나이 먹도록 대체 나는 뭘 했을까? 그동안 내가 해온 많은 것들의 가치를 부정하며 후회와 자책, 미련만 키웠던 나였다. 그런데 어쩌면 나, 꽤 잘 살아온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어릴 땐 누군가의 걱정을 받는 것도, 걱정을 끼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이젠 안다. 내가 이 정도라도 살 수 있는 건 누군가의 진심 어린 걱정 덕분이란 사실을. 나를 생각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주일 격리쯤 거뜬히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한 가족이 다 확진이면 차라리 편하다고도 하던데, 우리는 부부만 확진이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아이들까지 아프게 할 수는 없어 각자의 방에서 격리 생활을 더 엄격하게 했다. 아이들은 평소 자기 할 일 정도는 스스로 하는 편이라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네 식구가 각자의 방, 각자의 책상에 앉아 혼밥을 했다. 혹시 외로울까 싶어 영상통화를 하며 따로 또 같이 밥을 먹었다. 분할된 태블릿PC 화면 속에서 각자 밥을 먹으면서 평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소통했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시대가 미래를 앞당겼다더니 과연 그랬다. 처음엔 신기하고 재밌는 경험쯤으로 여겼다.
그런데 점차 그 정도로는 성에 안 차기 시작했다. 태블릿PC 속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서도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분명 평소보다 얼굴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지만 실체가 없는 느낌이었다. 뭔가 공허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손으로 직접 아이들을 어루만지며 손끝으로 촉감과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스킨십이 그리웠다. 평소 스킨십을 좋아하던 사람도 아닌데 실제로 대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괜스레 태블릿PC 화면 속 애꿎은 아이들의 코만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댔다.
김영하 작가의 소설 <작별인사> 속 주인공 철이는 휴머노이드이다. 인간을 흉내 내어 만들어진 AI 로봇은 점차 진화하면서 인간의 육체를 닮은 몸 따위는 불필요해진다. 의식을 네트워크에 연결하면 세상 어디든 존재할 수 있고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이는 오래전 친구인 선이를 만나러 먼 길을 떠나기 전 굳이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육체를 선택한다. 선이를 눈으로 보고, 밤새 손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철이는 영생을 포기하고 낡아가는 유한한 삶을 택한 것이다. 소설을 읽을 때는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철이의 결정이 쉽게 공감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알 것도 같다.
선이가 양팔을 벌렸다.
나도 팔을 벌려 그녀를 안았다.
우리는 그렇게 오래 안고 있었다.
선이의 품은 무척 안온했고
오래된 가구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김영하 작가의 소설 <작별인사>에서 발췌
나도 양팔 벌려 두 딸을 안고 싶었다. 오래오래 안고 싶었다. 두 딸의 품 안에서 안온함을 느끼며 달콤한 살 냄새를 맡고 싶었다. 두 손 꼭 잡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종알종알 떠드는 두 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손가락 끝으로 두 딸의 코를 띵동! 눌러주고 싶었다. 뺨을 비비며 두 딸을 귀찮게 하고 싶었다. 물론 사춘기인 두 딸은 질색하며 도망 칠게 뻔하지만.
격리에서 해제되자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가위로 일주일을 싹둑 잘라낸 것만 같아 허탈했다. 그래도 덕분에 고마운 이들과 소중한 것들이 분명해졌다. 일상으로 복귀하면서 제일 먼저 꿀이 듬뿍 들어간 파운드케이크와 알밤을 넣은 밤 마들렌을 구웠다. 돌려줘야 할 빈 그릇에 <꿀밤>세트를 담아 고마운 마음을 대신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두 딸을 귀찮게 하고 있다. 역시나 두 딸은 질색하며 도망치지만 시끌벅적한 일상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