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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날로그숲 Sep 05. 2022

케이크를 거꾸로 뒤집는 순간 터져나오는 탄성

나를 위한 이벤트 홈베이킹으로 설렘지수 높이기

시작은 오렌지 케이크였다. 한여름 못지않게 봄볕이 뜨겁던 어느 날, 하릴없이 서촌 골목골목을 누비다 신기루처럼 내 앞에 나타난 빵집이 있다. 영국식 디저트로 유명한 그곳을 언젠가 TV에서 보고 한번 가보고 싶다 했는데 그렇게 만날 줄이야! 그땐 배불리 먹고 디저트까지 끝낸 상태라 기념품을 사듯 제일 유명하다는 오렌지 케이크와 플레인 스콘만 하나씩 포장해 집으로 왔다. 기념품은 네 식구가 둘러앉아 한 입씩 먹으니 신기루처럼 금세 사라졌다. 다들 아쉬워했다. 그 후로 살짝 맛본 오렌지 케이크가 자꾸 생각났다. 그래서 벼르고 벼르다 그 빵집을 다시 갔...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대신 유튜브에서 레시피를 찾았다. 그렇게 나의 홈베이킹은 시작됐다.



나를 위한 이벤트, 주말 홈베이킹

영상을 보니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 만들어 보고 싶었지만, 자잘한 도구와 재료가 필요했다. 할 수 없이 토요일을 ‘오렌지 케이크 만들기’ 디데이로 정했다. 그리고 나름 의미도 부여했다. 평일을 잘 버텨준 나를 위한 달콤한 주말 이벤트! 나는 틈틈이 도구와 재료를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참고 영상을 반복해 보면서 이벤트를 준비했다. 그러는 사이 택배가 속속 도착했는데 그 재미가 쏠쏠했다. 뚜렷한 목표가 생기니 무기력하던 일상에 오렌지빛 햇살이 스미듯 활력이 생겼다. 그게 뭐라고, 은근 설레기까지 했다.

드디어 토요일 아침, 보통은 늦잠을 잤겠지만 저절로 눈이 떠졌다. 이미 수십 번도 더 본 참고 영상을 마지막으로 꼼꼼히 보며 머릿속으로 순서를 되새겼다. 경건한 마음으로 필요한 재료들을 전부 계량해 준비했다. 순서대로 탁탁 넣을 수 있게 동선까지 생각해 세팅했다. 주인공인 오렌지는 껍질까지 써야 했기에 끓는 물에 한번, 베이킹소다로 또 한 번 박박 문질러 깨끗이 목욕재개를 마쳤다.

오렌지 케이크는 사각 틀 바닥에 설탕에 졸인 오렌지를 깔고, 그 위에 오렌지 제스트를 넣은 반죽을 붓고 평평하게 펴준 뒤 170도로 예열된 오븐에서 35~40분 구워주면 된다. 이렇게 말하니 매우 간단한 것 같지만 실상은 이랬다. 얇게 편으로 썬 오렌지를 설탕에 졸이고, 직접 짠 오렌지 즙과 설탕을 1대 1로 끓여 오렌지 시럽을 만들고, 치즈 강판에 오렌지 껍질을 갈아 제스트를 준비하고, 반죽의 주재료인 버터와 달걀은 분리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온도에 주의해야 하는 등등, 꽤나 귀찮고 까다로운 작업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성실히 레시피를 따라 하다 보니 이런저런 잡념이 사라지면서 과정에 집중할 수 있었다.

설탕에 오렌지를 조리고 졸인 사각틀에 오렌지 조림을 깔고 그 위에 오렌지 제스트를 넣은 반죽은 평평히 펴준다.


두근두근, 케이크와의 한판 뒤집기

광파오븐 창 너머로 몸집을 키우며 노릇노릇 구워져 가는 케이크를 보면서 내 기대도 한껏 커졌다. 오렌지 향을 머금은 달콤한 케이크 냄새가 온 집안으로 퍼지는가 싶더니, ‘띵!’ 오븐의 타이머가 종료를 알렸다. 오렌지 케이크는 ‘업사이드 다운 케이크 (upside down cake)’로 우리말로 바꾸면 거꾸로 케이크쯤 되겠다. 말 그대로 거꾸로 있기 때문에 뒤집어줘야 한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뜨거운 케이크와의 한판 뒤집기!

우와~!
오렌지가 태양처럼 빛나는 오렌지 케이크

틀에서 분리된 케이크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네모난 케이크 위에 오렌지가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빵집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영롱했다. 늦잠에서 깬 가족들이 케이크 냄새에 홀리듯 주방으로 모였다. 모두가 감탄을 연발하며 포크를 꺼내 들고 덤볐다.

그때 먹었던 것보다 더 맛있다~!!!

에이 설마, 나는 손사래를 쳤지만 입이 저절로 귀에 걸렸다. 토요일 아침부터 부지런을 떤 보람이 있었다. 준비하는 동안 설렜고, 만족스러운 결과물에 성취감이 컸다. 맛있게 먹는 가족들을 보니 뿌듯했다. 순전히 내가 좋아서 만든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이벤트 ‘오렌지 케이크 만들기’는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절찬리에 진행 중이다.

설렐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누군가는 말한다. 노동력과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그냥 사다 먹는 게 훨씬 싼 것 아니냐고, 그게 더 가성비가 좋다고 말이다. 맞다. 하지만 나는 가격 대비 품질을 따지는 가성비보다 마음의 만족을 추구하는 가심비를 따지고 싶다. 사 먹으면 만드는 재미와 성취감, 뿌듯함 등을 얻을 수 없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냥 재밌는 일을 하면서 설렐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추앙’을 재발견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극중 염미정이 죽지 않고 사는 법, 그것 역시 설렘이었다.

하루에 5분. 5분만 숨통 트여도 살만하잖아.
편의점에 갔을 때 내가 문을 열어주면 ‘고맙습니다.’ 하는 학생 때문에 7초 설레고,
아침에 눈 떴을 때 ‘아, 오늘 토요일이지! 10초 설레고.
그렇게 하루 5분만 채워요.

나는 주말 홈베이킹으로 스스로의 숨통을 틔운다. 지금까지 레몬, 얼그레이, 체리, 황치즈 등 파운드케이크를 종류별로 구웠다. 마트에 갔다가 무화과가 제철이라 길래 상자 째 덥석 사다가 무화과 케이크도 만들었다. 기왕이면 팔아도 될만큼 그럴싸하게 꾸며 사진도 찍고, 예쁘게 포장해 가족과 친구들에게 선물도 했다.

그럼 난 또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그들의 미소에 몇 초, 무화과를 계속 리필해서 올려 먹는 작은 사치에 잠시나마 부자가 된 것 같아 몇 초. 이번 주말엔 무얼 만들까? 기대만으로도 몇 초 설렌다. 그렇게 차곡차곡 설렘을 채우다 보면 신통할 것 없는 일상도 제법 괜찮게 느껴지는 마법의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 맛에 나는 주말마다 케이크를 굽는다.




냉장고를 정리하다가 얼마 남지 않은 유자청이 눈에 띄었다. 지난겨울, 남해에서 지인이 보내온 유자로 만든 청이었다. 겨우내 따뜻한 차로, 여름내 시원한 에이드로 마시고도 남은 유자청. 몇 해 전 남해여행에서 맛있게 먹었던 유자 카스텔라가 생각났다. 그래, 이번 주말은 유자 카스텔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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