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크리스마스 시즌 빵 슈톨렌에 도전해 봤다.
언젠가부터 연말이면 내로라하는 빵집마다 슈톨렌을 예약 판매하기 시작했다. 내가 즐겨 찾는 빵집에서도 매년 슈톨렌 예약을 받는데 그때마다 묘한 반발심 같은 게 생겼다. 슈톨렌이 뭐라고 예약까지 해서 먹어야 하지? 사실 슈톨렌에 대해 아주 몰랐던 건 아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먹는 빵으로 이탈리아에는 파네토네가 있다면 독일엔 슈톨렌이 있다 정도. 그 이상 궁금하지도 않았다. 한번쯤 사먹어 볼 법도 했지만, 예약 열기에 굳이 나까지 보태고 싶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올해는 홀린 듯 빵집 문을 열고 들어가 예약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결코 착하지 않은 가격은 되려 슈톨렌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을 높였다.
독일의 크리스마스 시즌 빵인 슈톨렌(Stollen). 독일에서는 슈톨렌을 크리스마스 한 달 전부터 조금씩 썰어 먹으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고 한다. 럼주에 절인 건과일을 듬뿍 넣고 슈가파우더를 잔뜩 뿌려 만든다는 슈톨렌은 투박한 겉모습과는 달리 다채롭고 화려한 맛을 자랑한다는데... 그제야 알았다. 내가 왜 그동안 슈톨렌에 관심이 없었는지.
슈톨렌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빵이 아니다. 일단 나는 슈톨렌의 주재료인 건과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럼주에 절인 건과일이라니! 한마디로 슈톨렌은 내 취향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예상컨대 슈톨렌에 건과일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어디선가, 누군가로부터 듣고 무의식 속에서 슈톨렌은 싫어하는 빵으로 단정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언젠가 먹어보고 내 취향이 아니었던 이탈리아의 파네토네에 대한 딱 한 번의 기억이 한몫 했을 지도 모르겠다. 파네토네와 비슷한 빵이란 이유로 슈톨렌 역시 별로일 거란 편견을 만들었을 수 있다. 분명한 건 취향과 경험이 편견이 되어 무관심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예전의 나는 좋고 싫음이 매우 분명한 사람으로 좋은 것은 마냥 좋았고 싫은 것은 그냥 싫었다. 한 번 싫은 건 두 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베이킹을 취미로 하면서 무화과를 계기로 조금씩 달라졌다.
5년 전쯤인가 과일 가게에서 스티로폼 박스 째 파는 무화과를 보고 호기심에 덥석 샀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다. 새콤달콤한 과일을 좋아하는 나에게 무화과의 맛는 매우 애매했다. 말캉거리는 식감도 별로인데다 어찌나 빨리 무르던지. 어떻게 손쓸 새도 없이 무르고 터져버려 절반 이상을 버리고 말았다. 그 후로 무화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무화과 케이크를 우연히 맛볼 기회가 있었데 ‘음, 괜찮은데?’ 생크림과 어우러진 무화과는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찾아온 무화과의 계절 9월과 10월 무렵이면 무화과를 활용한 다양한 베이킹 레시피들이 쏟아진다. 이쯤 되니 대체 내가 모르는 무화과의 매력이 뭘까, 궁금해졌다.
다시 먹어 본 무화과는 애매한 맛이라기보다는 은은한 단맛이 났고 잘 익은 건 달았다. 식감은 말캉하기보다는 부드러웠다. 무엇보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흙 내음 비슷한 향이 있었는데 그게 싫지 않았다. 무화과의 매력을 깨닫는 순간 그만큼 세상이 넓어졌다.
그렇다고 무화과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내 취향은 아니지만, 무화과를 좋아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됐고 무화과로 만든 다양한 베이킹에 도전해볼 마음이 생겼다. 첫째 아이 생일 케이크로 만들었던 무화과 얼그레이 케이크는 내 최애 케이크 중 하나로 등극했다.
나이가 들수록 좋은 건 그대로인데 싫기만 한 것은 현격히 줄었다. 좋고 싫음의 경계가 흐려진 만큼 보다 넓은 세상을 사는 느낌이다. 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면서 나의 관심이 확장됐다.
남들 다 하는 건 일단 거르고 보던 내가 이젠 남들 다 할 때는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취향의 지평 너머에 있을 내가 모르는 그 무언가, 혹은 누군가의 매력을 찾아 관심을 기울인다. 전엔 알지 못했던 것을 알아가는 재미도 재미지만, 세상이 조금 더 흥미로워졌다.
무화과를 계기로 나는 취향이 편견이 되지 않도록 사람이든, 음식이든, 뭐든 세 번은 겪어보기로 했다. 내가 올해 슈톨렌을 예약한 이유다.
드디어 기다리던 슈톨렌을 일주일 만에 받았다. 네 식구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슈톨렌 언박싱을 했다. 크리스마스 한정이라 그런지 남다른 포장에서 가격의 품격이 느껴졌다. 슈톨렌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적힌 카드가 함께 들어 있었는데, 그걸 본 둘째 아이가 말했다.
“크리스마스 초대장 같아요.”
매우 적절한 표현이었다. 내돈내산이지만, 뭔가 대접받고 초대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포장을 벗기는 순간 하얀 슈거파우더가 후두둑 떨어졌다.
슈톨렌은 매우 달기 때문에 1cm 정도의 두께로 얇게 썰어서 조금씩 커피나 홍차와 먹는 것을 추천한다고 한다. 실온에서 2, 3개월 정도 보관하면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빵의 중간부터 잘라서 먹고 남은 양 끝 부분의 잘린 면을 서로 맞대어 보관하면 끝까지 마르지 않고 먹을 수 있다고도 한다. 나는 조심스레 중간부터 얇게 썰어 가족들과 한쪽씩 나눠 먹었다.
난생처음 맛본 슈톨렌. 그 맛은 역시나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호불호가 갈린다더니 분명 그랬다. 럼주에 절인 건과일을 씹는 순간 나는 불호였다. 반면 남편과 아이들은 호였다. 누군 설탕에 절인 레몬 필이 맛있다 했고, 누군 아몬드와 설탕을 갈아 만든 마지팬(marzipan)이 맛있다고 했다. 굳이 빵이 마를까봐 중간부터 잘라 먹을 필요도 없이 슈톨렌은 그 자리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내년 연말에도 나는 슈톨렌을 주문할 것 같다. 세 번은 겪어보기로 했으니 아직 두 번의 기회가 남았고, 무엇보다 슈톨렌의 매력을 알아버린 남편과 아이들이 먼저 찾지 않을까 싶다. 그땐 나도 슈톨렌의 매력을 조금이나마 알게 될까? 뭐, 몰라도 상관없다.
나에게 슈톨렌은 빵을 넘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시그널이자, 어느덧 연말이 되었다는 알람이다. 시그널에 설렐 수 있고, 알람에 정신 바짝 차려 한해 마무리 잘 하고 다가올 새해를 준비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끝으로 기왕 슈톨렌 얘기를 한 김에 모두에게 외치고 싶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