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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상한새벽 Oct 29. 2021

#3. 이럴 땐 솔로몬의 지혜도 소용없다

퇴사, 띄어 쓰고 이직


(이 에피소드는 #2. 의리?의리!의리...와 이어진다)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았다. 전날 의리 빌런에게 시달렸던 건 말끔히 잊은 상태였다. 잠이 보약이다 못해 만병통치약 수준인 타입이긴 했지만 유독 이날따라 기억도 안나는 꿈 속에서 누군가 내 정서상태에 절취선을 예쁘게 그어준 것만 같았다. 샤워를 하고 뽀얗게 김 서린 화장실 거울을 보면서


새벽아, 넌 웃을 때가 제일 예뻐


같은 배민 옥외광고판에서 나올 법한 멘트도 던져 보고, 테이블에 앉자마자 내 무릎 위에서 그릉대는 고양이의 등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느즈막한 아침을 챙겨 먹으려 하는데 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전날 통화한 둘의 번호와는 전혀 달라(혹시나 실수할까 봐서 번호 저장을 해 두었다) 별로 긴장하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새벽입니

저기 새벽씨, 저는 의리의리 컨설팅의 아무개라는 사람입니다.


순간 고등학교 문학책에서 배웠던 운수 좋은 날이 떠올랐다.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어쩐지 기분이 좋더라니!

상대방의 목소리는 점잖게 말을 하려고는 하고 있지만 잔뜩 흥분한 게 완전히 감춰지지는 않았다. 죽어도 때깔은 좋아야지 싶어 아침을 한 술 한 술 뜨면서 불청객 같은 전화를 조용히 들었다. 모니터에 스크립트라도 띄워 놓은 것처럼 그 흔한 어... 음... 같은 소리 하나 없이 긴 이야기를 끝낸 목소리의 주인공이 원하는 바는 먼저 서류를 낸 곳이 있는데 왜 다른 곳에 또 냈는지 그 사유를 알고 싶다는 거였다. 물론 기분 상했을 수 있는데 이 정도면 좀 심한 거 아닌가?


전화에 신경을 뺏겨 자신을 만지는 손길이 느려진 게 탐탁치 않았는지 고양이는 저만치 가버렸다. 어제 통화한 헤드헌터 분께 했던 얘기를 다시 한 번 말했더니 돌아온 답은 그건 이미 들은 이야기라는 거였다. 그 말에 지금 이 분이 원하는 건 전후사정 파악이나 사과 듣기 정도가 아니라 내가 다시 헤드헌터를 자기네 쪽으로 바꾼다고 얘기하는 거란 걸 깨달았다. 하지만 처음엔 이 바닥의 생리를 몰라서 벌인 일이라쳐도 이제 와서 번복하는 게 맞나 싶었다. 비록 그 선택이 실수였다는 게 명백했지만서도. 다시 한 번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의리의리 컨설팅은 정말이지 끈질기게 얘길 이어가며 통화를 끊지 않았다.


아, 정말이지 이 상황을 빠져 나갈 수 있는 지혜가 절실했다. 지혜 하면 솔로몬 아닌가? 하지만 그의 명판결도 이 상황에서는 전혀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난 구 헤드헌터 & new 헤드헌터, 그 누구의 사랑스러운 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솔로몬이 진정 너희 둘 다 소유권? 혹은 사용권을 주장한다면 저 새벽이란 인간을 반으로 갈라서 가져라 했다가는 정말 그럴 것 같았다. 나는 그저 그들의 업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가능만 하다면 둘은 나를 당장에라도 찢어다 인사팀에 갖다 바칠 터였다.


그렇게 의미없고 피곤한 대화를 십여분간 이어가다 내 태도가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의리의리 컨설팅은 마지막 최후통첩을 날렸다.


"저희 후보랑 경쟁하시겠네요"


라는 그의 마지막 대사에서 코흘리개 시절 빠져 살았던 포켓몬, 디지몬, 탑블레이드 등등의 만화의 빌런들이 생각났다. 이걸로 끝날 거라 생각하지마.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같은 패턴으로 돌아오는 그 만화 속 빌런처럼 의리의리 컨설팅은 다시 돌아왔다. 그의 전화를 받은 건 최후통첩으로부터 딱 두 시간 후 강의를 들으러 가던 지하철 안에서였다. 그 사이에 내 이름으로 지원서 들어온 게 있는지 인사팀에게 직접 체크했다는 말에서 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 서류부터 미끄러질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왔다. 망했구나. 이 사람이 좋게 보내주진 않겠구나. 그리고 그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나름 맘에 들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지만 아직 적을 둔 곳이 없는 이직러는 바쁘게 다음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때로부터 벌써 1년도 더 넘은 지금 나는 벌써 이직만 두 번째인 프로이직러가 되어 있으니 우당탕탕 정신없던 시절을 생각하면 잘 풀린 셈이었다. 무엇보다 이후 헤드헌팅 오퍼를 수락할 때 신중해진 데에는 이 때의 경험이 큰 역할을 하기도 했으니 어쩜 나에겐 좋은 약이 된 것 같다. 물론 다 지금 잘 풀렸으니 긍정할 수 있는 거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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