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상처를 준 공무원에게
연일 비서 업무와 관련된 안좋은 소식이 뉴스를 도배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서울시장의 비극적 사건. 정치적 견해를 벗어나 한 나라의 수도, 그 대도시의 책임자가 현직에서 생을 마감한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던 일이었다. 그 사건의 중심에 비서가 자리하고 있다. 비서 직원에 대한 성추행 의혹. 유명 정치인이 비서와의 불미스러운 일로 세간에 오르내린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미투 사건때도 많은 이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 내가 받았던 충격은 더 컸다.
나는 2011년부터 정부기관 기관장 비서로 일했다. 안 전 지사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총 3분의 기관장님을 모셨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모시던 기관장들은 능력이나 인성이나 다각도로 존경할 만한 분들이었다. 뉴스에 오르내리는 분들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그분들의 경험과 업무능력, 살인적 스케줄을 소화해내는 강철 체력, 같이 일하는 비서들에 대한 인간적 대우를 곁에서 지켜봤다. 그러면서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기관장은 은행업무나 병원 등 잠시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우게 되면 꼭 공식적으로 연가를 올리고 다녀오실 정도로(당연한건데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부당하다거나 특혜를 받고 있다고 느낄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주말에 본가에 다녀왔다 월요일 출근시간에 맞춰 복귀할때면 그 지역 명물 간식을 사들고올 정도로 따뜻한 분이셨다. 출근했는데 기관장님이 챙겨주신 간식이 자리에 딱 있으면 그 기분은 말해뭐해. 월요병을 확 날려버릴만큼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특히 그 간식은 늘 긴 줄을 기다려서 사와야 한다는데, 비서실 직원들끼리 기관장님이 웨이팅 줄에 서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한껏 웃어 본 기억도 따뜻하게 남아있다. 그런 상황에서 안 전 지사 미투사건을 접하고 비로소 나는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 굉장히 좋은 분과 일하고 있고, 운이 굉장히 좋은 케이스이고, 이게 일반적인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니었구나.
여전히 강자의 폭력과 억압에 약자는 숨죽이고 있었고 미투라는 이름의 폭로가 아니고서는 피해자가 정당하게 피해를 구제받을 창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비서가 되기 전 일하던 다른 회사에서도 간부직원과 그렇고 그런 소문이 도는 직원이 있었다. 그 직원은 능력도 출중했고 외모도 빼어났고 성격도 개방적이었다. 그래서 주변에 따르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 또한 많았다. 호불호가 뚜렸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나와는 정 반대인. 어디서나 평균은 하지만 딱히 빼어나지도 않고, 외모도 평범하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나같은 캐릭터는 이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분쟁을 겪을 일이 적다는 것을 어느정도 나이가 들고 나서야 알게됐다. 내 주위를 감돌던 평화는 내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니 이런 나에게도 호된 비서통의 시기가 왔다. 비서 업무는 기관장이 다일 정도로 규칙도 매뉴얼도 없다. 출퇴근 시간부터 아침회의 여부, 드시는 차와 간식의 종류와 횟수, 열독하는 신문 잡지, 쓰시는 용품, 하루 대면보고 횟수, 참석하는 행사의 종류 등등 기관장이 바뀌면 모두 새로 세팅이 된다. 그러한 개인의 성향에 관한 것은 개인차를 인정한다. 그러나 갑질이 일상화된 사람이 기관장 자리에 오를 경우 비서실 업무가, 비서실의 공기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비로소 깨달을 만한 기관장을 모시게 됐다.
그 분은 일단 갑의 위치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었고, 사람을 기용하는 능력 하나 만큼은 기가막혔다. 본인의 말이라면 입 안에 혀가 되어 줄, 어디서 찾으려도 찾기 힘든 비서실장을 딱 발탁해냈다. 그 둘의 콤비플레이에 비서실 직원들은 시름시름 앓아갔다. 뭣때문에 그렇게 힘들지 꼽기 어려울 정도로 일상화된 갑질. 예를 들자면 업무용 차량에 비치할 생수 하나를 픽하는데도 직원들을 들들 볶아야만 결론이 났다. 이건 미네랄 함량이 어떻고...그래서 비서들이 생수 종류별 미네랄 함량과 특징, 가격 등을 보고서로 만들어 보고한 끝에 기관장은 프랑스 명품 생수로 통하는 에** 제품을 선택했다. 구매하고 차량에 비치까지 했는데 끝날때까지 끝난건 아니지. 기관장의 불호령은 이어졌다. 업무용 차량에 국부장이나 다른 직원들이 탈 기회가 많은데 그 사람들이 비싼 생수를 보고 뭐라고 생각하겠냐고. 아니, 그 제품 직접 고르셨잖아요.
그래도 죄송한건 비서들이었다. 무조건 을이 잘못한거니까. 우리가 을인게 죄였다. 결국 기관장은 물 관련 업무를 하는 타기관에서 만든 생수를 직접 받아올 것을 지시했고, 그 후 물셔틀과 눈치밥은 비서들의 몫으로 남았다. 타기관에서도 처음 한 두 번이나 기분좋게 생수를 내줬지, 시간이 지날수록 눈치보며 가져와야 한다는 것을 기관장은 알지 못한다. 본인의 인맥과 능력으로 예산절감을 하게 됐다고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국민 세금으로 만든 생수를 공짜물이라고 생각하는 클라스란.
매사 업무처리가 이런식이었다. 항공이나 철도를 이용할 일이 있을때면 본인이 원하는 시간대 원하는 티켓을 끊기 위해 스케줄이 확정되기 전부터 예상되는 시간대 티켓을 무더기로 예약했다 취소하는 일, 식당을 결정하기도 전에 줄줄이 예약부터 해두고 장소가 결정되면 무더기로 취소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가슴에 돌덩이를 하나 얹고 예약취소 전화를 돌리는, 그 무거운 마음은 또 비서들의 몫이다. 상습 예약취소를 하게 되는 식당에는 인간적으로 도저히 입이 안떨어져 옆에 직원에게 대신 취소전화를 부탁하곤 했다. 식당에서의 갑질 또한 말로 다 못한다. 맵지 않은 매운탕, 한 번에 다 나오는 코스요리 등 황당한 주문은 예사고 음식이 조금이라도 늦어 기관장님이 기다린다 싶으면 비서실장은 식당을 전세낸듯, 바쁜 직원을 불러세워 닥달하고 기관장님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또 직원을 호출해 면전에 대고 맛없다고 돌직구를 날린다. 그걸 다 지켜봐야 하는 수행비서와 운전원은 정말. 부끄움은 비서들 몫이다.
이런 기관장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그 고통은 비서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곁에서 지켜봤다. 고위공무원, 기관장의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잘못된 인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지, 인사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사회구조적으로 갑이 갑질을 하면 을 이하에서는 손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요즘은 직장마다 갑질신고를 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었다. 갑질 신고를 하면 그 직장의 대가리에게 사건이 올라온다. 기관장 비서실에서 실제 사건의 처리를 목격한 결과 갑질 신고는 무용지물이다. 갑은 갑의 편이다. 신고가 올라오면 비서실장은 조사도 하기 전에 갑질 아닌 것으로 결론나면 신고자를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은 없는지 찾아보라는 지시부터 내렸다. 기본적으로 사건을 처리할만한 힘이 있는 갑은 갑질을 무겁게 생각지 않는다. 그러니 악조건을 뚫고 갑질로 결론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니 갑은 무서울게 없고 갑질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또 강조하게 된다. 인사가 만사다. 갑질하는 사람 밑에서 뭔가가 바뀌길 바라는가. 중립적 입장에서 철저한 조사가 이뤄진다는 것이 이다지도 불가능한 일인지. 몹쓸 짓을 한 갑들에겐 벌을 쎄게 때리는 실질적인 해결책이 나오길 바란다. 그러려면 갑질 관련 업무 라인 전체에 갑질하는 인간을 배제해야 한다.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자리에 누가 앉느냐가 관건이다. 선량한 탈을 쓴 능력있는 쓰레기를 구분해낼 능력이 이 사회에는 필요하다. 다시 한번 강조해본다. 인사가 만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