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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Mar 27. 2024

정의론

4차. have to와 need to



정의의 원칙들은 무지의 베일 속에서 선택된다.

그 결과 원칙들을 선택함에 있어서 아무도 타고난 우연의 결과나 사회적 여건의 우연성으로 인해 유리하거나 불리해지지 않는다는 점이 보장된다.

쉽게 블라인드 테스트를 떠올리면 된다. 이러면 또 두 눈 버젓이 뜨고 있는 대법원의 디케상을 걸고넘어지지 않을 수 없다.


최초의 당사자들은 합리적이고 상호 무관심한 것으로 생각한다.

(나의 이익 추구에 있어 합리적이고 타인의 가치 추구(이득)에 무관심하다는 말이다.)

설마.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데도? 못 먹는 감 일단 찌르고 보는데도?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원칙을 실현하는 사회는 가장 자발적인 체제에 가까이 접근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이 받게 되는 책무는 스스로 부과한 것이 된다.’

영어 문법에서 have to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의무적으로 해야 할 때 사용하고, need to는 자신의 생각이나 결정에 따라 해야 한다는 느낌으로 쓰인다. 엄마가 시켜서 하는 공부는 have to 가 되고, 나의 성장을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공부는 need to 가 되는 것이다. need to의 자세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한 수 위임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

숱한 사회적 원칙들과 법, 제도는 왜 생겨났을까?

사람들이 하도 싸워대서일 것이다. 싸움의 역사로 점철된 사회에서 원천적으로 싸움의 싹을 도려내버리는 존 롤즈의 저 생각은 정말 기발해 보인다. 애초에 나의 의무는 have to 가 아니라 need to이라는데 뭘 어쩌라고?

그러나 어디까지나 존 롤즈가 말하는 정의의 원칙이 실현되는 사회는 유토피아라는 점을 상기해 보면, 나 같이 꼬인 사람에게 저 말은 여차하면 현대사회에 잘 길든 인간을 길러내기 위한 조삼모사 같은 술수로 읽히기도 한다.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제한된 범위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것은 인간들의 관계만을 포함할 뿐 인간이 동물이나 여타의 자연과 가지게 될 관계는 논외로 하기 때문에, 모든 도덕적인 관련들을 포괄하지는 못하게 되는 셈이다.

오늘날 새롭게 비판을 받고 있다는 존 롤즈의 정의론의 한계를 읽으며 장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만물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장자야말로 사고의 범위를 쪼잔하게 좁히지 않았다.

자연을 대상화하는 인간 중심의 ‘환경’이란 말 대신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는 ‘생태계’라는 말을 쓰자는 운동이 생각난다. 힘의 언어가 아니라 평등의 언어가 널리 쓰이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혹시 모를 편파적이라는 비판을 대비해 글쓴이가 평소 최최장장을 외치는 골수팬임을 숨긴다. 최애는 최애 장자는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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