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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Apr 05. 2024

정의론

5차. 그놈의 정의



드라마 살인자ㅇ난감은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고 멀쩡히 살아가는 이들을 찾아내 죽임으로써 처단을 하는 일당들 이야기다.

주인공 이탕의 첫 살인은 우발적 사고였다. 그 후로 일이 자꾸 꼬이며 원치 않는 살인을 계속하게 되는데, 그가 죽인 자들은 하나같이 범죄를 저지르고 숨겨왔던 나쁜 놈들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노빈은 이탕의 비범한 능력을 알아채고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인다.

노빈은 마지막에 모든 책임을 떠안고 죽음을 자처한다. 형사가 그렇게까지 해서 네가 얻는 게 뭐냐고 묻자 그는 답한다.

‘정의’


드라마를 보다 그만 골이 띵했다. 정의를 참칭하는 시대라더니, 하다 하다 계획적으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범죄 무리의 입에서도 정의라는 단어가 나온다.


노빈은 목적이 옳다면 수단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신념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법의 사각지대에 숨어 있는 악을 끌어내기 위해 법이라는 사회적 도구를 포기하고 개인적 복수라는 수단을 택하는 데 있어 망설임이 없다. 그것이 그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노빈뿐 아니라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정의관을 갖고 있다.

이탕은 범죄자를 구분하는 능력을 가졌지만 자신이 저지르는 살인이 정의로운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반대로 또 다른 살인자 송촌은 자신의 칼이 정의롭다는 확신에 차있지만 처단의 대상에 대해서는 헷갈려한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형사는 개인과 사회 구성원이라는 서로 다른 자신의 정체성을 양쪽에 올려놓은 시험대 위에서, 고민 끝에 이탕을 놓아주는 선택을 한다.

‘넌 반드시 잡혀서 처벌받을 거다’는 대사는 그가 최종적으로 어디로 기우는지 짐작게 해준다.


현실에서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이며 막무가내 주장을 펼치는 집단이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상식이 있는 인간이라면 어떻게 뻔뻔하게 얼굴을 내놓을 수 있냐고 손가락질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정의롭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부끄러움 자체가 없다.

상식적인 기준이란 것은 어찌 보면 모호하다. 백 명이 모이면 백 가지 정의관이 생겨날 텐데 어떻게 내가 옳고 네가 틀리다고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서로를 향한 몰이해는 우리와 너희의 선을 긋는 순간 편견과 혐오를 향해 치달을 준비를 마친다.


예전에 논리 수업에서 흑과 백으로 구분되는 사회가 아니라 회색 지대가 넓어야 건강한 사회라고 배운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요즘은 정말 알 수 없는 세상이다. 흑은 검고 백은 희다는 명백한 전제마저 부정되고 있으니 말이다. 흑이 희고 백이 검다고 주장하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 집단을 이루고 사회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나.

정의라는 거대 담론은 사라지고 각자의 정의관만 난무해 개별 사건의 이해득실만을 따지려 드는 시대라면 개인은 얼마나 많은 자를 갖춰 들고 세상을 재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서 보편적 정의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 존 롤즈는 순진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다음 주 수업을 대비해 정의론을 읽다가 도대체 존 롤즈 때문에 나는 왜 이런 골치를 썩고 있는지 분이 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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