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빌었어.”
마지노선이 붕괴된 듯한 남편의 목소리가 한숨을 타고 전화너머 들렸다. 도미노처럼 내 마음도 무너져 내렸다.
“울지 마. 네가 왜 울어?”
“씨발”
“나랑 살더니 욕도 하네. 괜찮아, 울지 마.”
어젯밤 만해도 술에 잔뜩 취해 와서 절대 사과하지 않을 거라고, 구걸하지 않을 거라며 쓰러져 잘 때까지 되뇌던 남편이었다. 최후의 방패였던 사표를 내던지고 시원하게 나올 거라는 호언장담은 날이 밝자 동트는 새벽빛에 안개 걷히듯 사라져 버리고 온종일 따가운 시선으로 이글거리는 아군 하나 없는 전장에 남편은 백기를 올린 것이다.
인면수심의 갑 인간은 그걸로 성에 안 찼는지 패잔병 을에 대한 최소한의 대우도 없이 발가벗겼다. 속절없이 벗겨져 낙엽처럼 발아래 나뒹구는 남편의 자존심을 갑 인간이 무참히 짓밟았다.
“사표는 폼이야? 던지고 오지 뭐 하러 그 꼴을 당해.”
“멀리 가있는 울 집 아이를 생각해야지. 허허.”
“내버려 둬. 걔는 자기 인생 잘 살아.”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었다. 부당한 감리의 갑질을 못 본 척 넘어가고 싶은 현장소장부터 일이 틀어져 소송을 면치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본사 임원들, 짠 소금 같은 월급마저 녹아 없어질까 봐 눈치만 보던 직장 동료들, 일 한 대가를 날리게 될까 불안에 떨던 하도급 업체 관계자들까지.
남편을 제물로 바치고 나서야 싸움은 평화롭게 끝이 났다.
물론 부조리한 거 압니다. 당연히 도리상 그러면 안 된다는 거 압니다. 법대로 해야죠 물론, 그런데 법이 어디 내편입니까? 완전한 갑질이죠, 자존심 꺾고 갑 대접을 하라 이거겠죠. 그런데 어쩌겠어요? 내 당연한 권리와 월급은 열심히 일한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라 수그리고 빌어야 받게 돼 있는걸요. 차마 비겁해지지 못하겠는 양심일랑 사표와 함께 깊숙이 넣어두세요. 원래 그런 겁니다. 치사한 걸 견디는 게 을의 역할이에요.
남편을 설득시킨 수많은 말들 중 무심코 내 마음속 말이 섞여 들었을까 봐, 남편의 백기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을까 봐 말할 수 없이 미안했다.
무심결에 튀어나온 욕은 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한 걸까. 역할을 나눠 맡은 차례에 불과한 갑이란 등급을 신분제도로 인식하는 질 떨어지는 갑질 인간들, 소중한 노동력인 직장인을 경시하다 못해 으깨어 갈아 쓰고 소모하는 비상식적인 사회, 그런 사회에 길이 잘 들도록 족쇄 채워놓은 무거운 책임감, 어쩌면 남편을 묶어놓은 족쇄 중 한 개의 열쇠가 될 나 자신.
물 먹은 솜처럼 자꾸만 가라앉는 마음이 욕으로 튀어나온 걸지도 모르겠다.
오래전부터 내 꿈은 남편이 일찍 은퇴하는 것이다. 소금에 절인 배추가 돼 퇴근하는 모습이 아니라 깃털처럼 날아서 집에 돌아오는 자유인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