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규장전은 천녀유혼의 IP다.
영원한 사랑에 대해 검색하던 중 찰떡같은 책을 찾고야 말았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뭔가 운명 같이 읽게 된 '이생규장전'은 고전 소설이다. 아마도 고등학생 때 학교 문학 시간에 읽지 않았을까?
이야기의 주인공은 결국 삶과 죽음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즉, 산 사람과 죽은 사람 간의 사랑을 다룬 명혼소설(冥婚小說)이다. 중학교 시절에 봤던 홍콩영화 '천녀유혼'의 IP가 아닐까 하는 억측을 해본다.
교보문고 e-book으로 천 원에 구매한 이생규장전을 단숨에 읽고 넋을 읽고 말았다.
조선시대에 이런 이야기를? 자기주장이 강한 여자 주인공이라니, 내가 생각했던 조선시대의 시대상과는 많이 달랐다.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아름답고 처절했다.
열여덟 살 총각 이생은 얼굴이 말끔하고 재주가 비범하여 학문에 뜻이 있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대귀족의 딸 최랑을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열여섯 아름다운 최랑을 본 이생은 그 자태에 반했을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플러팅은 최랑이 먼저였다. 비단 휘장이 낮게 드리워진 창가에서 이생이 지나갈 즈음 시를 읊었다. 최랑의 시를 듣고 이생의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대귀족의 딸로 최 씨 집안의 재력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러나 이생은 마음 가는 대로 하기로 했다. 최랑에게 답시를 써서 기와 조각에 잘 말아 담 안으로 던졌던 것이다. (이 부분도 참 현실감이 넘친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다.)
그동안 많은 사극을 봐 왔지만 드라마는 픽션이기에 당시의 시대상만 빌려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생규장전을 읽고 충격 그 자체였다. 젊은 청춘 남녀의 사랑이 아주 적극적일뿐더러 혼전 관계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둘은 시를 읊고 답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속삭이고 급기야는 최랑의 별당에서 사흘동안 함께 지낸다. 그렇게 사랑이 영원했으면 좋겠지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생의 아버지가 알게 되고 이생은 멀리 보내진다.
우여곡절 끝에 둘은 양가의 승낙을 받고 결혼하게 됐지만 홍건적의 난으로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다.
온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홍건적에게 잡힌 최랑은 정조를 빼앗길 처지에 이르렀다.
"이 놈아! 차라리 나를 죽이거라. 내가 죽어서 승냥이의 밥이 될지언정 어찌 돼지 같은 놈에게 몸을 허락하겠느냐."라고 호통을 쳤다. 이 말을 들은 홍건적은 화가 나서 칼을 들고 무참히 내리쳤다.
온 나라는 황폐해졌고 피난을 갔다 돌아온 이생의 살던 집은 행랑채만이 쓸쓸히 남아 있었다. 어느 날 밤 애처로이 있던 이생은 이승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최랑을 만났고 영원히 함께 하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꿈같은 나날들을 보낸다. 최랑은 아마도 저승으로 가기로 한 약조를 하고 남편과 함께 했을 것이다.
최랑은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후 이생도 그리움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만다.
아하. 비극이다.
조선시대의 선비가 로맨스를 썼다.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수양대군이 단종을 패위 시키고 왕위 찬탈을 한 것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였고 결국 승려가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분 알아보니 위트까지 있는 분이셨다.
한명회가 쓴 시조를 보고 조롱하는 시를 썼다.
한명회, 유응부의 시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白首臥江湖(백수와 강호) /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김시습, 유응부의 시
靑春亡社稷(청춘망사직) /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白首汚江湖(백수오강호) /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
문학은 알아갈수록 재미있다. 이 즐거움을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아주 짧은 시간 조선의 로맨스 단편을 읽어 보고 싶은 분들께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