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2049년 6월 워커힐 호텔 비스타홀
제108회 국제 뇌과학 심포지엄
무대를 꽉 채운 화면으로 각 나라 전문가들이 인류 소생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화상으로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참석자들은 자국의 포럼장에 있으며 모두 화면으로 연결되어 있다.
국내 참석자는 23명이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있다. 다음 발표 스피커로 뇌과학 연구소 최연소 부소장인 구해성 박사가 발표할 차례였다. 많은 학자들이 이번 발표에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는 것에 기대를 하고 있었다.
다음 발표자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국제적으로도 많은 분들께서 알고 있는 뇌과학 분야의 해성 같은 분이시죠. 뇌과학 연구소 부소장인 구해성 박사를 모시고 다음 세션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발표하실 내용은 ‘뇌의 신경세포와 도파민’에 대한 연구 발표라고 합니다.
박수로 맞이해 주시죠! ”
심포지엄 진행자의 소개와 함께 커다란 화면에 구해성의 발표자료가 띄워졌다.
반대편 대형 화면에는 각국 참가자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무대 위로 조명이 켜졌고 단상 위로 올라가는 구해성을 카메라가 따라가고 있다.
흰색 블라우스에 앞 트임이 있는 검은색 레더 스커트를 입고 반짝이는 슬링백 로퍼를 신은 해성은 계단을 올라가며 단상 앞에 앉아 있는 참석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석자들 중에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뭔가 낯설지 않은 얼굴이 해성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누구지? 어디서 만났었나? 그런데 왜 저렇게 해맑게 웃고 있는 거지?’
아주 짧은 순간 기억을 더듬었지만 그의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아는 사이 같단 말이지…’
구해성의 발표는 삼십 분 정도 진행 됐고 내용은 현재 인류의 뇌 화학물질에서 진화된 자극적인 신경세포에 대한 연구였다. 구박사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불과 20년 전만 해도 발견되지 않은 폭력적이며 자극에 민감한 뇌 화학물질이 새롭게 발견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질이 소행성 폭발과도 관련이 있다고 했다.
발표가 끝난 후 세명의 패널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우주 천체와 소행성을 연구하는 ‘손우주’ 박사, 우주 광물에 대한 연구로 저명한 ‘나성대’ 박사 그리고 사회학자 ‘최유대’ 박사였다.
소행성 폭발 이후 전 세계에 쏟아진 운석에는 특이한 화학물질이 있었다.
구해성과 나성대 박사의 공동 연구로 그 물질의 화학성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물질은 각 성격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광폭하게 누군가에게는 무기력하게 또는 공황발작 증까지 만드는 것이라는 발표였다.
나성대 박사의 연구 결과에 추가적으로 이상한 특이점이 발견되었다. 운석이 물과 닿으면 표면에 물기가 생겼던 것이다. 이 물기를 조사한 결과 지구에서는 처음 보는 바이러스가 있었다.
결론은 그 바이러스로 인해 각각의 사람들에게 도파민 과민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우선 이 화학물질을 찾은 구해성의 업적은 획기적인 발견이었고 그다음은 대응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화학물질을 ‘트로이 도파민’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는 일련의 폭동 및 자살 행위 등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사람들의 뇌에서 ‘트로이 도파민’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들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과 그 화학물질이 같았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화면에 사진이 나왔고 추가적으로 설명하는 도표가 연이어 나왔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확실해졌습니다. 이 도파민의 원인을 알아내고 제거하는 것입니다. 또는 무력화시키거나 대체할 수 있는 어떤 물질을 찾아야 합니다.” 해성은 발표를 끝내며 손우주에게 다음 발표를 유도했다.
“손박사님은 우주 천체 및 광물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하셨잖아요. 소행성 트로이의 근원지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하셨죠?”
손우주의 마이크에 불이 들어왔다.
“저는 트로이의 궤도에서 아주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 소행성은 우리 태양계에서 떠도는 행성이 아니었습니다. 빅뱅 직후 만들어졌던 아주 오래된 초기 은하계에서 날아왔을 것으로 보입니다. 운석의 원소 기호를 확인한 결과 우리 은하계에서는 발견되기 힘든 여러 물질들과 탄소동위원소를 확인했습니다.”
이후 손우주의 발표자료가 화면에 나왔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주의 설득력 있는 발표에 좌중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화상으로 연결된 해외 학자들도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에게 많은 질문이 쏟아졌고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트로이 도파민’과 소행성의 근원지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는 것이었다. 인류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인구 절벽은 남은 인류에게 공포심이 들 정도로 심각했고 이미 사라진 나라도 있었다.
심포지엄이 끝난 후 해성은 다음 일정으로 서둘러 짐을 챙겼다. 아마도 기자들이 들이닥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자료를 넘기면 되지만 오늘은 조용히 자리를 뜨고 싶었다.
비스타홀을 가로지르며 만나는 동료 박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호텔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바로 그때 손우주가 나타났다.
“구박사님, 잠시만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 손박사님? 무슨 일이시죠? 연구 관련 일이라면 다음 미팅 때 뵐게요. 아님 그전에 회사로 연락을 주세요.”
해성은 우주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연구 관련 일이 아닌데요.”
“그럼 뭔가요?”
해성은 어색한 상황에 약간 짜증 섞인 말투였다. 그러나 그의 사뭇 진지한 표정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허둥대는 해성과는 달리 우주의 눈은 마치 달빛을 머금은 검은 호수 같이 반짝였고 아주 차분했다.
“우리 만났었어요. 이십 년 전에. 우리 집에서. 그리고 저는 그때 결심 했었어요.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뭐라고요? 미쳤어요? 아니 갑자기… 여기서 할 말은 아니잖아요.”
해성은 우주를 무시하고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려 했다.
그때 우주는 그녀의 손을 잡고 살짝 그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왜 이래요?”
마침 로비에 있는 기자들이 둘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해성은 그의 손을 다시 잡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미쳤어요? 무슨 말이고 지금 왜 이러는 거예요?”
“아까 말했던 거 그대로예요. 결혼해요 우리.”
해성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그를 쏘아봤다. 그는 여전히 진지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결혼? 결혼이 뭔지 알아요? 결혼은 역사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됐고. 저는 당신을 오늘 처음 봤어요. 진짜 미치겠네.”
해성이 무슨 말을 해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엄청난 벽을 만난 느낌이었다.
지하 주차장 계단 쪽으로 기자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차 어딨어요? 가세요. 저는 이만!”
해성은 차 시동을 걸며 뛰어갔다. 운전석에 올라타는데 조수석으로 우주가 뛰어 올라타며 앉았다. 몰려오는 기자들을 피해야 했고 너무 다급한 상황이라 해성은 우선 호텔을 빠져나가는 쪽을 선택했다.
해성은 주변을 살피며 차를 한쪽에 세웠다.
“내리세요.”
“궁금하지 않아요? 나의 뇌에 어떤 화학 물질이 있는지? 당신 뇌과학자잖아요.”
우주의 말에 해성은 약간 움찔했다.
‘그래 궁금하긴 하다 도대체 어떤 도파민이 있어서 이러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전혀. 그러니까 당장 내리세요. 경찰 부르기 전에.”
“구박사님, 좀 거 친면이 있으시군요. 앞으로 연구 과제 때문에 볼 수도 있는데 경찰까지 부르면 껄끄럽지 않겠어요?”
“손박사님 말고도 공동 연구 할 사람 많아요. 걱정 마세요.”
“아… 예전에도 느꼈지만 당찬 분이시군요.”
“네, 그럼 당차게 다시 말씀드릴게요. 내리시죠.”
우주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조수석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해성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결국은 나랑 결혼하게 될 거예요. 조심히 가세요.”
우주는 의미 심장한 말을 남기며 해성을 보고 활짝 웃어 보였다.
‘뭐래. 진짜 미친 거 아냐.’ 속으로 생각하며 우주를 지나쳐 갔다. 룸미러로 보니 그는 내린 자리에 서서 계속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서있는 곳을 해성은 계속 의식하고 있었다.
“별… 이상한.” 혼잣말을 하다 우주가 놓고 내린 물건에 눈길이 갔다. 살짝 봐도 어떤 물건인지 알 수 있었다. 작은 반지 케이스같이 보였다.
“아니 이걸 왜 두고 내린 거야. 이런 식으로 연결의 끈을 놓겠다는 거야?”
“그나저나 공연에 늦겠다. 가장 빠른 길로 안내해 줘.”
요즘은 대부분의 차량이 인공지능으로 자율주행을 하고 있고 사람은 작은 조작만 할 뿐이었다.
해성은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뭐지? 이 반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정중앙에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블루사파이어가 박혀 있고 둘레에는 촘촘하게 다이아몬드가 장식된 반지였다. 누가 봐도 고가의 반지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눈분시게 아름다웠다. 해성의 손은 자동으로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보게 됐고 문득 우주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결국은 나랑 결혼하게 될 거예요. 조심해서 가세요.”
“쳇! 뭐야 이 남자, 그나저나 모조품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던 기억이 난 단 말이야. 뭐지?”
마침 전화가 걸려왔다. 운전대는 없고 조수석까지 길게 뻗은 대형 디스플레이 화면과 조작 스크린에서 발신인의 글자가 떴다.
‘어마마마♡’
“너 어디니? 오고 있는 거야?”
“네, 엄마 가고 있어요. 5분 후면 도착해요. 먼저 들어가세요.”
“바쁘면 오지 말라니까. 조심해서 와라.”
“네, 걱정 마시고 들어가 있으세요.”
해성이 미리 주문한 꽃이 세종문화회관 입구 우측 냉장 시설이 된 꽃 보관실에 도착해 있었다. 큐알 코드를 찍고 꽃을 챙겨 홀 안으로 들어갔다. 동생 해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천재 첼리스트이다. 그녀의 공연을 보기 위해 해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화상으로 참석해 있었다.
해성은 입구 옆면의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옷매무새를 다듬고 조심스럽게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
손우주는 손목시계에 본인의 위치를 설명하고 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우주 앞으로 지나가던 차가 후진으로 그의 앞에 섰다.
“손박사님, 누구 기다리세요? 태워다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나박사님. 제 차가 오고 있어요.”
“아, 그러셨군요. 손박사님 오늘 발표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정보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광물에 대한 부분은 저도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네, 알겠습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우주의 차가 앞에 도착했다.
“연구실로 가자.”
“네, 목적지를 연구실로 잡았습니다. 35분 뒤에 도착입니다. 바이오리듬이 불안정하십니다. 잠시 휴식은 어떠세요?”
“맞는 말이야. 피곤하네. 고마워 마스.”
자동차 디스플레이창에 우주의 현재 바이오리듬이 활성화되며 휴식을 할 수 있도록 의자가 펼쳐졌다. 그리고 우주가 가장 좋아하는 브람스의 ‘로맨스 F장조’ 음악이 흘러나왔다. 감미로운 음악 선율과 함께 우주의 눈꺼풀도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한강을 사이로 빌딩 숲이 빼곡했고 마천루를 비집고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도시의 가로등이 하나 둘 불을 밝혔고 도로 위에는 자율주행 차들이 열을 맞춰 행진하듯 흘러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폐허가 됐던 도시와 함께 빠르게 회복했고 이제는 멸망하지 않을 지구를 위해 모두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인류는 어떻게 사랑하는지 결혼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감정은 사라졌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