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화이트와 그레이톤으로 차분하게 꾸며진 거실 중앙에는 보송한 화이트 퍼 카펫이 깔려 있고
그레이 소파와 1인용 클라우스 의자 앞에는 기하학 적인 기둥으로 이뤄진 테이블이 있다.
전체적으로 모던한 모노톤의 싱글하우스다.
우주는 클라우드 의자로 걸어가며 벽면의 시계를 보았다. 어느덧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거실 전체로 훤히 보이는 한강은 수많은 별들이 내려앉은 듯 도시를 품고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말없이 밖을 보던 우주는 창가에 비친 본인 모습을 지긋하게 보다가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왔다.
몇 년 전 유유히 흐르는 찰스강을 보다 문득 외로움이 밀려왔던 것처럼.
우주는 카이스트대학교 2학년 끝나갈 무렵 MIT 대학의 교환학생으로 갔었다.
이후 학사, 석사 논문까지 연구 실적을 인정받아 미국에서 오랜 시간 생활 했었다.
MIT에서는 그에게 영주권을 줬고 미국에 계속 남기를 원했으나 2년 전 한국에 들어왔다.
마지막 프로젝트인 소행성 트로이를 연구하던 리더로서 책임을 마쳤고 이후 한국행을 선택했던 것이다.
현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는 감정 외로움이 우주에게는 있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이 감정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그 누구도 공감할 수 없는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외로움을 느꼈을 때 그는 해성이 떠올랐다. 그의 머리에는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과거 처음 만난 그날 이후 쭉 그의 머리에는 언젠가 만날 해성으로 가득했다.
인류의 연구 대상이 될까 두려워 도시 외곽에서 살고 있는 부모님은 화상 통화로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다.
남녀가 함께 산다는 것은 현재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2년 전 한국에 다시 들어온 이후 부모님은 한 분씩 그의 집으로 방문했다.
텃밭에서 직접 가꾼 싱싱한 채소들을 한가득 들고 오시거나 직접 담근 김치를 들고 오셨다.
*
2029년 4월 19일 오후 3시 양평의 어느 한적한 마을 - 소행성 폭발 5시간 전
“여보, 연기가 너무 나는데요!”
별체에 만들어진 찜질방의 아궁이를 보며 연수가 소리쳤다.
“그래? 걱정하지 마 나무가 젖어서 그래. 지금부터 두서너 시간은 아궁이에 불을 계속 때야 하니 안에 들어가 있어요. 불은 걱정 말고.”
연수는 알았다고 말한 후 손님 준비를 위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우주야! 손우주!” 연수는 집안 2층을 향해 소리쳤다.
“우주야, 잠시 내려와 줄래?”
이층에서 동생 우진과 놀고 있던 우주는 계단에서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뛰어 내려와 그의 엄마에게 달려들었다.
“우주야, 식탁 위에 있는 냅킨하고 매트 있지. 그거 의자 7개 앞에 줄 맞춰서 잘 놓을 수 있지?”
우주는 연수가 하는 말을 대충 알아듣고 테이블 매트를 의자와 맞춰 놓기 시작했다.
“엄마, 이렇게? 이렇게 해요?”
“어머, 우리 우주 아주 잘하네. 각 잡은 거 봐.” 연수는 아주 흐뭇하게 우주를 쳐다봤다.
“형! 나랑 놀아줘. 심심해.” 여덟 살인 우진은 우주를 졸졸 따라다니며 징징거렸다.
“우주야, 우진이하고 거실에서 놀아. 나머진 엄마가 할게.” 우주 옆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우진을 보며 말했다.
“우진아, 알았으니까 잠시 저기 가 있어. 금방 끝내고 갈게.” 우주가 어른스럽게 우진을 달랬다.
오후 다섯 시가 되자 연수와 해성, 해리가 도착했고 그들은 한참을 마당에서 꽃구경을 했다.
이후 저녁 식사를 위해 모두 거실로 모였었다. 직접 키운 채소로 만든 샐러드와 바비큐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스파게티까지 완벽한 저녁상이었다.
우진이를 챙겨주는 우주를 보며 연수가 말했다.
“어머, 우주는 동생을 잘 챙기는구나. 멋진 형이다. 해성이랑 동갑이랬나?”
“그렇지, 해성이도 열 살이잖아?”라고 승미가 말했다.
“둘이 친구네, 해성아 엄마는 우주같이 자상한 남자가 해성이 짝으로 참 좋을 것 같은데, 우주 멋지지 않니?”
연수의 말에 해성은 우주를 쳐다보다 그의 엄마 승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승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유심히 쳐다봤다.
“그럼 아줌마가 제 시어머니 되는 거예요?”
어른들이 모두 해성의 갑작스러운 말에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승미가 말했다.
“어머, 벌써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시’자는 빼고 엄마 친구니까 그냥 어머니라고 불러야지.”
어른들은 서로 사돈이라고 부르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해성이 불쑥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아줌마 끼고 있는 반지 제거예요? 그 반지.”
승미가 그녀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보다 해성을 쳐다봤다.
“해성이 이 반지 갖고 싶어? 이 반지 이쁘니?”
“네, 이뻐요. 그 반지 저 주세요. 그럼 결혼할게요.”
해성의 말에 어른들이 또 한바탕 크게 웃었다.
*
“반지를 봤을까?”
우주는 클라우드 의자에 앉았다. 그러다 외로움에 지쳐 잠이 들어 버렸다.
*
해성은 연주회가 끝난 후 오랜만에 엄마와 해리와 같이 저녁을 먹고 와인도 한잔 했다. 해리와 엄마는 같은 빌라에 이웃으로 살고 있었고 해성만 회사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해성이랑 해리, 일정 괜찮으면 오랜만에 엄마 집에서 자는 건 어때? 이렇게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엄마는 딸들하고 오래간만에 와인 한 잔 더 하고 싶은데. 내일은 토요일이고.”
2049년은 주운전자의 알코올 수치가 자동으로 체크 됐고 체내의 알코올 수치가 감지되면 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럼 한 잔도 안 마신 해리 차로 가야겠네요. 해리는 내일 일정 괜찮아?”
“그럴까? 우리 매일 화상 통화만 했는데, 가자 엄마집.”
해성과 연수는 각자의 차를 집으로 보내는 지시를 내렸고 해리의 차 한 대로 이동했다.
“해성이는 오늘 학회 발표 잘 끝냈어?”
연수가 부엌 냉장고에서 올리브와 치즈를 꺼내 플레이팅을 하며 해성에게 물었다.
“그럼요. 발표야 잘했는데. 오늘 이상한 사람이 차에 이상한 물건을 놓고 내렸어.”
연수와 해리는 동시에 말했다.
“이상한 사람?”
“언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상한 사람이 차를 어떻게 탔으며 이상한 물건이라니.”
“얘, 가슴 두근거린다. 그게 무슨 이상한 말이니.”
눈을 휘둥그레 뜬 연수와 해리를 보며 안심시키듯 나긋한 목소리로 해성이 말했다.
“그러니까 … 모두 걱정하지 말고 진정해. 심포지엄 끝나고 나가려는데 소행성 트로이를 연구하는 박사님이 있었어. 그 사람이…”
해성은 둘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둘은 알겠다는 듯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해성의 엄마가 와인 한 모금을 마신 후 말했다.
“그 사람 이름은?”
“손우주 박사”
“손우주? 손우주… 아니, 잠깐! 손우주?” 연수는 뭔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해리와 해성이 동시에 말했다.
“왜? 엄마 아는 사람이야?”
“혹시 그 손우주 박사 키가 크고 큰 눈에 쌍꺼풀 있고 잘 생겼지? 혹시 카이스트 나왔니?”
해성은 엄마가 하는 말을 들으며 다시 그의 인상착의를 생각해 보니 맞는 것 같았다.
“그런 거 같아. 카이스트 다니다 미국에 교환 학생으로 연구도 오래 하고 왔어.”
연수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우주엄마! 잘 지냈죠? 이게 얼마만이예요.”
“우주엄마?!”
해성과 해리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 그저 엄마를 쳐다보았다. 한참 전화 통화를 하던 연수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해성아, 너 기억 안 나니? 우주 말이야. 이십 년 전이라 기억이 안 날 수도 있지만 너 열 살 때였을 거야. 양평에 엄마 친구가 찜질방 만들어서 놀러 갔던 거 기억 안 나니?”
해성의 이십 년 전 기억의 정원으로 돌아가보니 생각나는 것도 같았다.
*
2029년 4월 19일 오후 5시 양평의 어느 한적한 마을
해성은 엄마와 해리와 함께 양평으로 여행을 갔었다. 도시 생활만 하던 해성에게 양평은 산과 강과 나무와 온통 초록빛이 가득했었다. 연수는 절친 승미의 초대를 받아 해성과 해리를 동반하여 간 것이다.
승미는 양평에 전원주택을 만들었고 마당에 황토 찜질방도 만들었다.
친구 승미는 아들만 둘이 있었다. 해성과 동갑인 열 살 손우주, 여덟 살 손우진이 해맑게 그들을 맞이했다.
연수와 해성, 해리가 도착하자 승미와 그녀의 남편 손민수는 더 바쁘게 뛰어다녔다.
양평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승미의 남편은 모든 일에 못하는 것이 없는 만능인이었다.
민수는 그들이 오기 전 장작을 준비하고 아내가 음식 준비하는 것까지 도왔다.
정원에는 라일락과 벚꽃이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야생초 꽃들이 만발했었다. 수선화와 채송화에도 시선이 빼앗겼고 토끼풀 꽃마저도 보송하게 피어 있었다.
해성은 보랏빛이 도는 라일락을 보며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이 꽃은 이름이 뭐예요?”
“어, 라일락 꽃이라고 해. 이쁘지! 향도 아주 좋단다.”
해성은 꽃 향기를 맡고 싶었지만 팔이 닿지 않았다.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그새 자리를 뜨고 보이지 않았다.
‘아, 저 라일락 꽃 향기 맡고 싶다.’ 속으로 생각하며 닿지 않는 라일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우주가 의자를 들고 왔다.
“의자에 올라가.” 똘망한 큰 눈으로 해성에게 올라가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고마워.” 해성은 우주를 믿고 의자로 올라갔다.
땅이 평평하지 않아 의자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약간은 불안정했지만 우주가 의자 등받침을 단단히 붙잡아 줬었다. 해성은 아주 수월하게 손에 닿은 라일락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꽃 하나 너 가져.”
우주가 해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어. 나도 향기 맡고 싶어.”
해성이 라일락을 꺾다 중심을 잃고 우주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깜짝 놀란 서로의 얼굴을 보고 깔깔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우주가 먼저 일어나 해성을 일으키며 말했다.
“너 괜찮아? 다친데 없어?”
“어. 나 괜찮아. 너는?”
“나도 괜찮아.”
우주는 옷에 붙은 풀을 툭툭 떨어내며 남자답게 말했다.
“자, 향기 맡아봐.”
해성은 우주에게 라일락을 건넸다.
“너 라일락 향기 좋아해? 난 좋아하는데. 봄을 그리워하게 되는 달콤한 향기거든.”
우주가 라일락을 바라보며 말했다.
“멋진 표현이다. 나는 처음 맡아봐. 라일락이라는 꽃도 처음 봤어.”
“매일 꽃들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멋진 표현이 생각나.”라고 말하는 우주의 얼굴은 맑고 아름다웠다.
“마당이 있어서 좋겠다. 이 마당은 재밌을 거 같아. 겨울에는 눈싸움도 할 수 있고.”
“맞아. 겨울에는 꽃은 없지만 눈이 내리는 날에는 동생하고 눈사람도 만들어.”
우주의 말을 듣던 해성은 굉장히 부럽다는 듯 우주를 바라봤다.
“난 눈사람 만들어 본 적 없어. 나도 눈사람 만들고 싶다.”
“이번 겨울에 놀러 와. 내가 눈사람 만들어 줄게.” 말하며 눈 굴리는 흉내를 냈다.
“눈이 올까?”
지구의 이상기온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어떤 해는 폭설이 쏟아지고 어떤 해에는 눈이 전혀 내리지 않고 비만 오기도 했다. 사계절이 뚜렷했던 대한민국의 날씨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눈사람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던 해성과 우주는 이후 만날 수 없었다. 소행성 트로이의 저지를 위해 해커 조직을 운영했던 해성의 아버지 구원은 사법 조치를 피할 수 없었다. 소행성을 폭파하려 계획했던 사람들만큼 엄격한 법적인 처벌이 내려졌다. 결국 그의 마지막 형량은 무기징역으로 판결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