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금사빠인가?
#10
전 세계 인구 78억 명 중에서 화학적인 반응이 일어날 나의 반쪽이 없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 당장 남자친구를 만들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남자, 갑자기 내 인생에 뛰어든 이 남자에게는 호감이 생기고 그의 행동에 감동을 받는다.
이 남자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진다. 선명하진 않지만 우리의 미래가 그려진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잊고 있었던 이성에 대한 갈구와 호기심도 강렬하게 느껴진다.
더 중요한 건 필릭스와 함께 있으면 머리에서 작동하기 전에 이미 몸에서 그를 느끼고 있었다.
순간순간 찌릿하게 느껴지는 이 감정이 혹시 사고 이후 더 민감해진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병원에 가볼까? 사고 이후 나에게 일어난 일을 솔직하게 말하고 치료를 받아야 할까? 그러다 실험실의 쥐가 되면 어떡하지? 지켜보면 사라질 수도 있으니 가만 기다려보자.'
오늘부터 3일간 나와 한국에 머물 예정인 필릭스는 최대한 우리 집과 가까운 호텔로 예약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집과 가까이 있지는 않지만 괜찮은 호텔을 예약했다. 필릭스는 공항에서부터 연신 놀라워했고 도심 속으로 들어갈수록 그 화려함에 감탄하고 있었다. 요즘 한류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한국 문화는 어느 정도 접했다고 했다. 한국음식, 한국가요, 지리적인 갈등에 놓인 민감한 부분까지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의 국제교류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박식한 그였다. 우리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지적인 대화는 공항버스에서 내릴 즈음 마무리가 됐고 그가 묵을 호텔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의 객실로 들어가기까지 가슴은 미친 듯이 콩닥거렸고 입술은 바짝 마르고 있었다.
'뭐야.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서가은! 아직은... 그런데... 그가 달려들면 어떡하지? 키스?...'
영화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이다. 이건 미디어의 부작용이라고나 할까.
객실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화장실로 바로 들어갔고 안에서 말을 걸어왔다.
"가은, 오늘은 금요일이잖아. 저녁 먹으면서 근처 관광 할까? 바로 집으로 가야 해?"
"이 근처 맛집 많아서 메뉴를 정해봐. 어떤 종류가 먹고 싶어?"
그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나도 큰 소리로 그에게 말하는 것이 귀찮아 핸드폰을 보며 근처를 검색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수건만 걸치고 나왔다. 순간 나는 호흡이 정지되는 느낌이었다. 구불거리는 젖은 갈색머리와 물기를 머금은 단단한 살결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흡!" 그의 복사근과 골반뼈에 눈길이 가자마자 바로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다. 내 몸에 찌릿한 전율이 흐르고 있었다. '휴우... 정신 차려 서가은.'
"어제부터 가은과 병원에 있었잖아. 샤워가 너무 간절했어. 미안. 오래 기다렸지?"
나는 눈길을 피하며 맛집 검색을 했다. "괜찮아. 메뉴 결정하고 있었어."
그는 속옷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고 하늘거리는 카키색 리넨 바지와 흰색 티셔츠를 빠르게 입고 나왔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와 핸드폰을 빼앗아 옆에 두었다. 그의 두 손이 허리와 다리를 감싸 안았다.
침대에 나를 눕히고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잠깐! Okay~. 그러니까... 뭐 먹을까? 나가서 정할까?" 말하며 침대 옆으로 굴러가듯 나와 일어섰다.
필릭스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나에게 다가와 진심을 다해 안아주었다.
"Okay! 우리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그렇지 가은? 어디로 가?"
"이 근처가 관광지라 나가서 고르기만 하면 될 것 같아. 갈까?" 한껏 들떠하며 말했다.
필릭스는 갑자기 내 왼손을 가져다 심장 근처에 대며 말했다.
"미친 듯이 뛰고 있는 내 심장이 느껴져? 심장이 이 정도야. 내 마음은 더 미쳐있어. 너 때문에."
'와우. 진짜 미쳤어. 심장아 나대지 마.'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휴우... 필릭스."라고 말하는 순간 그의 입술이 내 마음을 녹이는 듯했다. 어지러웠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강렬했다. 내 마음의 빗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입고 있던 옷을 빠르게 벗었고 속옷만 남겨두고 있던 나에게 다가와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순간 위, 아래 짝이 맞지 않는 속옷을 입고 있던 것이 떠올라 창피했다. 그렇지만 이런 감정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와의 시간은 그렇게 영원할 것같이 황홀하게 흘러갔다.
우리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는 너무도 부드럽고 강력했으며 매너 있고 섹시했다. 내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조화로움이었다.
'드디어 찾은 건가? 내 인생의 동반자? 영원한 사랑?'
그는 마치 축구 경기의 전반전을 뛴 선수같이 숨을 헐떡거리며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고른 호흡을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을 다 갖은 느낌이었고 금방 사랑에 빠진 나를 모두가 조롱한다 해도 필릭스가 너무 좋았다.
"가은, 사랑해. 영국으로 돌아가기 싫은데. 이번에 그냥 한국에 눌러살까?"
나는 투정 부리는 필릭스가 너무 귀여워 그를 꼭 안아주었다.
"몇 개월 후면 내가 곧 영국으로 갈 건데. 30년을 못 봤는데 3개월 못 기다려?"
"하하하 물론 기다릴 수 있지. 단지 그 3개월이 나의 시간으로는 3년 같이 느껴질 것 같아."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4박 5일간의 짧은 만남이지만 하늘이 맺어 준 인연.
어둠 속에 갇혀있던 나를 밝은 빛으로 인도해 준 내 남자. 너무 행복한 마음이 가득인지라 저녁은 생각도 없었지만 그에게 한국음식을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는 한국인의 소울푸드 삼겹살집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음식에 잘 적응하고 알려주는 대로 바로 해보는 필릭스가 사랑스러웠다. 후식으로 잔치국수까지 배불리 먹은 우리는 근처에 관광할 만한 장소들을 돌아다녔다. 필릭스에게는 보이는 모든 곳이 전부 관광지였다. 포토박스에 들어가 한국 기념사진도 찍었다. 두 손을 꼭 잡고 있던 필릭스가 걸어가던 나를 세웠다.
"오늘 나랑 함께 있어줄 수 있어? 월요일에 영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막막해서 아무 생각도 못하겠어."
"아... 그렇지. 월요일에 출국하지. 나는 공항도 못 나가겠네..."
"공항에 못 오는 건 괜찮아.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이라도 함께 있어줘. 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