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마음이 움직여

by 소원 이의정

#9

몸도 마음도 안정감이 드는 따뜻한 아침이었다.

충분한 휴식으로 컨디션이 많이 좋아진 나는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소파에 잠들어 있는 필릭스를 보며 나도 모르게 얼굴 앞에 다가가 앉았다. 도도한 듯 남성스럽게 각진 턱선으로는 금세 자란 수염들이 삐죽 나왔고 날렵한 콧날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갈색 속눈썹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지 가끔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헝클어진 풍성한 갈색 머리는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를 보니 심장이 급하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앞에서 지켜보는 것을 느꼈는지 한쪽 눈을 살짝 뜬 필릭스는 나지막하게 "굿 모닝"하고는 내 왼팔을 잡아당기며 몸을 휘감아 옆에 눕게 했다. 등으로 그의 심장박동이 느껴지고 귓불과 목선으로 그의 숨소리가 간지럽혔다. 필릭스는 단단한 두 팔로 나를 꽉 껴안고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뒤에서 안아주는 따뜻한 온기가 좋았다. 그가 느껴졌다. 약간 흥분한 느낌도 들었다.

나는 호흡을 고르게 하느라 그가 눈치채지 않게 천천히 호흡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필릭스 쪽으로 돌아 누우며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


"필릭스 우리 나가서 브런치 하는 건 어때? 병원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데."

필릭스는 왼손으로 턱을 받치고 자상하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럴까? 그런데 우리 이렇게 조금만 더 있자. 5분만.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갸름한 얼굴에 반달같이 생긴 커다란 눈 오뚝한 코와 섹시한 입술이 나를 미치게 한다고.'

나는 부끄러웠지만 그가 너무도 진지해서 그러자고 했다. 지금 물을 마셨어야 했는데 애석하게도 근처에 물도 없었고 아직도 5분 안에 포위당한 체였다. 그는 시계를 본 후 내 이마에 살포시 뽀뽀를 해줬고 까슬한 턱과 부드러운 입술이 온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전 날 유정은 한국팀 일정 때문에 급하게 우리가 묵고 있던 호텔로 닐과 함께 돌아갔었다. 나는 상황이 너무 궁금해서 전화를 했고 다행히 모든 일을 잘 처리한 유정은 집으로 돌아가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니,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어 컨디션이 아주 좋아졌어. 머리에 상처도 거의 아물었어."

"언니, 필릭스 아직도 거기 있는 거야? 한국을 간다고? 어제 닐이 그러던데. 닐은 말레이시아에서 남은 휴가 보내고 갈 거라 했어."

"어... 같이 한국 들어가자고 해서. 남은 휴가는 한국 관광하겠다고 하는데 그러라고 했지."

"언니, 필릭스 정말 멋지다. 언니 간호하는 모습 보니까 무슨 아기 다루듯이 그러냐. 언니 진짜 좋아하나 봐."

"어... 유정아 정말 고생 많았어. 나 때문에 두배로 힘들었지? 진짜 고마워."

"히히 언니 그런 소리 말고 나중에 이런저런 얘기 많이 해줘. 궁금해 죽겠네. 오늘 필릭스가 같이 간다고 하니 나중에 영상통화 하자."

"그래 유정아. 고마웠어. 한국 돌아가서 연락할게."


필릭스는 맛있는 브런치 카페를 찾아서 안내했고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그가 손을 잡을 때 내가 살짝 놀라자 그는 나를 살짝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오늘부터 나랑 사귀는 거야. 오늘부터 1일을 제안합니다. 어때?"

걸어가던 도중이었고 거리에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느낌이라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필릭스는 내 허리를 꽉 안고 멈춰 서서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오늘부터 1일. 나는...(필릭스는 장난치듯 더 꽉 안았다.) 나도 필릭스를 알아가는 날로 1일."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제야 그는 나를 풀어주었다.

드디어 카페에 도착했고 우리는 여유 있게 브런치를 먹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서로를 하나하나 알아가는 대화가 오갔다.


그는 런던에 있는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미디어학을 전공한 후 지금은 BBC에서 일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보다 편성이나 경영 쪽으로 관심이 많아 편성부서에서 일하는 중이라 했다. 며칠 전 저녁을 먹으며 필릭스와 닐이 영국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저 관광지에서 우연하게 마주친 사람들과 잠깐 시간을 갖는다는 생각, 어차피 이 시간이 지나면 헤어질 사람들이니 금방 잊고 있었다.

그런데 하룻밤 만에 그는 낯선 사람이 아닌 어쩌면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 10월에 런던으로 유학 가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진짜? 영국에 온다고? 정말이야? 휴우... 난, 내가 한국에 가서 일을 찾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거든."

"뭐? 벌써? 필릭스 나랑 겨우 5일 만났는데, 진짜 그런 고민까지 했다고?"

"만난 날짜가 뭐가 중요해? 난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눈을 뗄 수 없이 이끌렸어. 택시 사건 있던 날 기억나? 그날도 사실 나는 칵테일바에서 너만 바라보고 있었거든."

"어? 칵테일바?" 내가 첫날 말레이시아에 도착해서 유정과 함께 갔던 곳이다. 그런데 나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었다.

"너를 처음 본 그날 온통 네 생각뿐이었어. 다음 날 아침에 호텔에서 부딪혔을 때는 심장이 멈추는듯했다고."

나는 진지하게 열변을 하고 있는 필릭스의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뭍은 소스를 손끝으로 닦아 주었다.

'필릭스 너무 귀엽잖아. 바다에서 서핑할 때는 야수 같아 보이더니 이런 매력이 있었네.'


"필릭스, 난 얼마 전에 5년 만났던 남자친구와 헤어졌어. 난 그 사람과 결혼까지도 생각했었는데 그 사람은 아니었지. 난 사랑을 아니 남자를 믿지 못하겠어. 나에겐 큰 상처였거든."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우리는 아무 말을 못 했고, 그는 한참을 생각하는 듯했다.

"가은 그렇다고 사랑에 대해서 너무 냉소적일 필요는 없어. 가은이 나를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 거야. 내 인생에서 운명 같은 너란 빛을 발견하듯 너의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내가 녹여줄게. 나를 믿어줘. 그리고 나를 지켜봐 줘."

브런치를 먹으며 너무도 자연스럽게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갑자기 그의 속마음이 들렸다.

'가은이 그 남자한테 상처를 많이 받았구나. 도대체 어떤 놈이야. 자세하게 물어볼 수도 없고... 나도 과거 여자친구들 얘기를 해줘야 하나? 난 지금 가은과 사랑에 빠진 거 같아. 사랑한다고 말할까? 너무 가볍게 느낄까?'

'이 사람은 진심 같아. 나쁜 생각이 없어 보여. 어쩜 이렇게 순수하고 귀엽지?'


"필릭스는 여자친구 없었어?"

"난 3년 됐어. 여자 친구 없이 싱글로 산지. 부서이동하고 바쁘기도 했고. 1년에서 2년간은 주식공부하느라 외부활동을 많이 안 했거든. 가족들과 가끔 여행 가고 식사하고 그러면서 시간이 갔네."

"가족들 얘기 좀 해줘. 필릭스는 형제가 어떻게 돼?"

그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다. 남동생은 그보다 3살 어린 나와는 동갑인 30세였고 여동생은 26세라고 했다. 토요일 또는 일요일 점심은 온 가족이 모여 브런치를 먹고 골프, 승마, 테니스 등의 운동을 한다고 한다. 아버님은 대학에서 국제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고 어머님은 늦게 시작하셨지만 개인전까지 개최한 화가라고 했다.

'내가 영화에서 보던 그런 가족 구성원인가? 아무래도 한국과는 문화적 차이가 있으니까. 내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서가은 무슨 생각이야. 벌써 김칫국을 마시고 있네.'


영상통화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유정이었다.

"언니, 어디야?"

"어, 우린 카페야. (카페와 필릭스를 살짝 보여주며) 호텔에 맡겨둔 짐 찾아서 곧 공항으로 이동하려고."

"안녕, 필릭스."라고 말하며 옆에 누군가의 얼굴이 나왔다. 닐이었다.

"헤이. 닐."이라고 말하며 필릭스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유정과 닐은 점심시간에 잠시 만났고 저녁에 동해바다로 서핑을 간다고 했다. 둘은 급격하게 가까워졌고 오랜 연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유정아 잘 다녀와. 조심하고. 닐, 유정이 잘 부탁해."

옆에 있던 필릭스가 말했다. "닐, 유정 씨(레이디라는 표현을 썼다.) 잘 모셔. 다치는 일 없게."

"No problem at all. Everything's gonna be okay!"

요란하게 울렸던 영상통화는 요란하게 끝을 맺었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에서 짐을 찾고 공항으로 갔다.

3박 4일 출장이 4박 5일이 되면서 엄청난 일들이 있었다.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이 훈남이 나와 함께 한국으로 입국한다. 정말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한때는 절망이었던 내 삶이 지금은 가슴이 벅차온다.

이렇게 내 손을 꼭 잡고 있는 이 멋진 남자는 변치 않을까?

내가 남자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겠다 생각해서 나에게 이런 일들이 벌어진 걸까?

나는 이 남자와 잘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