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역에 도착하자 갑자기 할머니의 부고 메세지가 도착했다. 내 유일한 옷가지인 흰색 니트티를 입은 채로 멀뚱히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장례식장에 서둘러 도착하니 옆에 맥도날드가 보였다. 참 묘한 위치선정이군 싶다가, 장례식장엔 다 식은 육계장만 있겠지 싶어 쿼터파운더 버거와 맥너겟을 사서 장례식장으로 갔다. 왜 그 생각을 못했나 싶었지만 흰색 니트를 입고 맥도날드 종이봉지를 든 내 모습은 어떻게 봐도 장례식장과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덕분에 3일장 내내 ‘우리 태오가 서울사람이 다 돼서는 피자 햄버거가 아니면 밥을 안먹는다’는 작은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으며 육계장과 편육과 문어 숙회를 먹어야 했다.
부산은 언제나 그랬다. 판교 테크노벨리의 릴리, 제임스들과는 다른 ‘부산사람이면 회는 먹을 줄 알아야지’ 하는 정도의 촌스러움이 있는 곳. 엄마는 아빠 대신 몇 년 동안 할머니의 병수발을 들었고, 추석 하루 전인 엄마의 음력 생일에는 도망간 친척들 대신 혼자 제사를 준비했다. 전재산을 주식으로 날린 큰아버지는 식당으로 가족을 먹여살리는 큰엄마에게 큰소리를 지르기 일쑤였고, 외국인과 결혼을 할거라는 작은 사촌누나의 말에 가족 모두가 몸져 눕는 그런 곳. 큰 사촌누나는 결국 가족이 자기를 도와준 적 있냐며 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나는 아직 회를 못 먹는다.
그런 촌스러움 속에서, 나와 동생을 비롯한 사촌 형, 누나들은 모두 조금은 촌티를 벗어나며 커갔다. 게임만 한다고 다들 한심하게 여기던 큰 사촌형은 리니지로 수억을 벌더니 지금은 생선을 배달하는 스타트업으로 대박이 났고, 큰 사촌누나는 외국인 남편과 경력단절 없이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작은 사촌형은 꼰대들 무리에서 악으로 버티며 영업왕이 되어 아파트를 샀고, 여동생은 내 커밍아웃에 ‘그래서 어쩌라고’라며 자기 옷이나 사달라고 했다.
생전 모이지 않던 친척들이 그렇게 할머니 덕분에 십수년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촌스러운 누구들도, 촌티를 벗어나가는 누구들도. 둘째날에는 작은아버지는 말을 많이 하다 급체를 하셨는지 파랗게 질리셨다. 다들 각종 민간 요법들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하다가 바늘을 가지고 나타난 큰고모가 손가락을 땄다. 분명 손가락을 따는 게 의학적 근거가 없다는 이야기를 본 적 있었는데. 작은 아버지는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다시 누우셨다. 야만적인 민간요법이라며 촌극을 보듯 쳐다봤던 나는 머쓱해져서는 머리를 긁적였다.
3일장을 끝내고 발인을 하는 새벽, 할머니는 내가 고른 예쁜 캐딜락에 실렸다. 우리는 촌스러운 관광버스를 개조한 장의버스에 탔다. 나는 할머니가 불교였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청송까지 가는 몇 시간 동안 내내 ‘나무아미타불’이라는 6글자가 반복되는 노래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휴게소에 멈춰서자 맥도날드가 보였다. 나는 3일내내 먹었던 육계장과 편육과 문어숙회에 질려있던 터라, 쿼터 파운더 버거와 맥너겟을 시켰다. 따라 들어온 영업왕 사촌형은 맥플러리를 시켰다. 사촌형은 나에게 애인은 있냐고 물었다. 여자친구가 아닌 애인이라는 표현에서 영업왕의 센스에 혀를 내둘렀다. 사실 열심히 티를 내긴 한 덕분에 주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있다. 다만 부모님에게 말하진 못했을 뿐. 사촌형은 맥플러리를 다 먹고는, 술 한 잔 하자고 했다. 어렸을 적 내 첫 게이 야동을 발견한 아빠와의 목욕탕에서의 대화만큼 불편한 술자리가 될 것 같았지만, 제발 이루어지지 않길 바라며 알겠다고 했다. 적어도 아빠는 알고 계실까? 엄마는 알게되면 쓰러지실까? 아빠는 맥도날드 키오스크가 어색하셨는지 오지 않는 점원을 기다렸다. 난 아빠의 햄버거를 키오스크에서 대신 주문해 드렸다.
할머니는 무사히 청송에 도착하였다. 뒷산 고추밭이 있는 곳으로 관을 들고 갔다. 영업왕 사촌형은 이 고추를 자기가 심다가 디질뻔 했다며 궁시렁댔다. 인부들이 땅을 파고는, 흰 천으로 싸인 관 위에 돌아가며 흙을 한 삽씩 덮었다. 다들 슬프게 흐느꼈다. 인부들은 덮은 흙 위를 빙글 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듯 무덤을 완성해 갔다.
높아져가는 할머니의 무덤을 보며 으레 허무하다는 감정과 함께, 왜인지 몇 년 전 만났던 남자가 떠올랐다. 갑자기 딸이 두 명인 유부남이라고 했던 사람. 그 사람은 대학교를 다니며 성소수자 인권 활동을 했다고 했다. 어느날 아버지가 ‘너 남자 좋아하냐?’고 묻기 전까지. 그 날 후로 그 사람은 결혼을 했고, 같이 활동하던 친구도 결혼하여 옆집에 산다고 했다. 매우 화가나는 이야기였음에도 한편 나는 그늘 없는 그 사람의 얼굴이 신기했다. 눈치가 빨랐던 아버지는 지금 많이 아프셔서 병실에 계신다고. 당연히 커밍아웃은 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할머니의 무덤을 보며 왜 그 때의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할머니는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의 진심을 알고 가셨을까. 나는 언젠가 가족에게 말 할 수 있을까. 어느 것 하나 당위는 없었다. 그래도 꽤 슬프고 먹먹한 질문이긴 했다.
할머니의 관을 불로 태우고, 물품들을 정리했다. 할머니의 묘비를 세우는데, 저 멀리서 친척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짜가 잘못 세겨져 있다거나 하는 이야기였다. 난 헛웃음을 내뱉으며 뒷산을 내려왔다. 헛헛한 웃음과 함께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다시 부산역에서 분당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촌스러움을 벗어난다는 느낌이 아닌, 중요한 무언가를 두고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꼭 그것들을 찾으러 가야지, 하고 생각하고는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