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브랭 Oct 02. 2023

분위기 찾다가 위기가 찾아올지라도

워킹맘

명절연휴 부모님을 모시고 호기롭게 외식을 하자고 나섰다. 물가는 어찌나 올랐는지 외식 한번 제대로 하려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그래도 명절인데 콧바람이라도 쐬어볼라 했더니 비용이 살벌하다. 어른 4명에 유아 1명 외식비만 훌쩍 50만원이 넘는다. 이를 어쩌나. 50만원이면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데 싶어 고민하던 중이 있다.


정 그러면 그냥 집에서 해 먹자

시어머니의 더 무서운 말씀을 듣고 보니 고민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왕 외식을 하기로 했으니 분위기 있는 파인다이닝쯤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한마디 하면 더 과감하게 일을 벌어야 성미가 풀리는 사람이 바로 여기 있으니 말이다.


시어머니가 즐겨보는 티비프로그램에 나오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예약을 하고 이번 명절에는 외식을 한다고 명랑하게 통보했다. 시어머니는 무슨 옷을 입고 가면 좋을지 내심 들뜬 기색이었다. 자고로 명절이란 온몸을 기름냄새로 절여가며 4-5시간 동안 허리 부러지게 전부 치는 중노동의 기간이 아닌가. 명절에 외식을 말이라도 꺼내볼 수 있게 된 것은 천지개벽 수준의 중대사건이었다.


얼마 후 시아버지가 식당의 가격을 알고 노발대발하셨다. 당장 예약을 취소하고 집에서 밥 한 끼 차려먹으면 된다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시어머니의 못내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니 밀어붙여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취소예약금 핑계를 대면서 처음으로 명절외식 나가는 건데 좀 봐달라는 상냥한 멘트로 꼬장꼬장한 어르신의 분노를 녹였다. 매일 사치하며 사는 것도 아니니 이번기회에 한번 해보자고 꼬셨다.


눈 돌아가는 가격답게 메뉴도 대단했다. 자연송이, 꽃새우부터 해서 이름도 생소한 음식들이 줄지어 차려져 나왔다. 엄청난 크기의 집게발을 가진 킹크랩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을 정도로 그득히 쌓여있었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것도 저것도 먹어보느라 서로 이야기할 틈도 없었다. 잔소리 없이 오롯이 먹는 행위에 집중하는 엄청난 장점이 있었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고 했다. 내가 직장일을 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8할이 시어머니의 덕이다. 정말로 며느리를 딸같이 대해주는 시어머니가 있어 육아도, 살림도 유지가 되어 겨우 사람꼴로 살아가는 중이니 그 감사함은 끝이 없다.


분위기만 찾다가 지갑에 위기가 찾아올지라도 이 정도의 투자는 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요리 뒤에 눈 돌아가는 영수증이 따라붙은 것을 생색내며 평생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시고, 티비에 이 식당이 나오거든 며느리가 데리고 가줬다고 꼭 말씀하시라고 당부드렸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앞으로도 1년에 한 번씩 명절에 외식하자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본인도 해보니 좋았나 보다. 명절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결국 모두에게 득이 되는 일이었다.


회사일로 현타가 올 따마다, 이 돈 벌자고 고생하는 게 어이가 없을 때마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 그래도 쥐꼬리 같은 월급으로 이렇게 생색내며 대접받는 것 또한 직장이 있어서 가능했다. 워킹맘은 항상 자신의 취업동기를 확인받고 산다. 스스로도, 주변으로부터도 애를 키워야 할 시기에 왜 일을 해야 하냐고 묻는다. 이번 명절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 찾은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피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