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pajaroazul
Jun 18. 2023
사는 대신, 당신이랑 안 살 거야
정신과 일기 - 8
내 우울증에는 다양한 원인이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겹겹이 쌓여있다. 그중 하나는 여성으로서의 죄책감, 정확히는 '생물학적 여성임에도 문화적으로 충분히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죄책감이다. 다른 것보다도 인생의 남성상인 아버지가 이 부분에 크게 기여하셨다.
형제 중에 아버지에게 가장 많이 손찌검당한 게 나이고, 얼굴이나 몸매부터 작은 하나하나까지 직언을 가장한 폭언을 가장 자주 들었던 사람도 나다. 남이 보면 놀랄지도 모르겠다. '어떤 남자가 너 같은 애랑 살아주겠냐, '는 비웃음은 애교 수준이다. 나이를 먹어 굳은살이 생겼음에도 아프긴 마찬가지다.
방 입구 오른쪽에 서있는 서랍장 한 구석, 정신과 약이 수북이 쌓여있다. 요즘엔 몸도 안 좋아지고, 다치기도 해서 서너 가지 약이 추가되었다. 부모님은 당신 약이 얼마인지 아냐며, 나이 들어가는 부모 앞에서 아픈 척한다고 지청구 먹이시지만, 반대로 묻고 싶다. 내 나이 때 당신은 얼마나 많은 약에 취해있었냐고.
그래, 대내외적으로 그렇게 나쁜 남성상은 아니다. 세상엔 우리 엄마나 동생 같은 여자들도 많으니까. 그런 성격을 가진 이들과 잘 보완되는 분이라 생각한다. 다만 나는 절대 만나지 만나야 할 사람이다. 자기혐오를 가족에게 투영하는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는 상상을 해보라. 끔찍하지 않은가? 숨만 쉬어도 당신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 아이의 존재 자체가 짜증 난다. 사실 원인은 본인에게 있다. 자기가 자기한테 만족 못하니까, 자신의 부모와 형제가 싫으니까, 그런 걸 닮은 자식조차 미워죽겠는 거다. 그래, 나도 내가 미워 죽겠던 적이 있었다. 실제로 죽고 싶을 때도 많았고.
난 남성들과 친구로서 잘 지내는 편이다. 지인의 성별이 치우쳐져 있지도 않고, 여초인 집단에서 시간을 보낸 적도 거의 없다. (이대에 경기를 일으킨 사람 아니겠는가) 그들은 첫 만남에서 필자의 수수함과 직설적인 면, 방대한 지식에 놀라 금세 상대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물론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털털한 여성은 많다. 하지만 지인들은 내 방식에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남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고들 한다. 카톡으로만 연락하다 실제로 날 본 사람들은 군필자가 아니라 학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와 놀라곤 한다.
그래서 남성에게 눈물로 어필하는 방법 따위 모른다. 남성을 '여성'이란 생물학적 성을 이용해 당황시키는 방법도 모른다. 다만 그들과 경쟁하고, 어울려 살아남는 법은 잘 안다. 까다로운 남성의 비위를 맞춰주며, 묵묵히 견디는 훈련을 오랫동안 했기 때문이다. (그래, 남자도 만만치 않게 까다롭다. 결이 다를 뿐. 놀라셨나요?) 교묘한 눈치게임은 못해도 실력과 이성으로 찍어 누르는 법은 잘 안다. 그게 몇 배나 힘들었어도, 아무런 대가나 인정을 받지 못하는데도 익숙하다. 1995년생인 내가 아는 페미니즘은 여전히 클린턴의 그것에 머물러 있다. 꼰대 저리 가라지.
그런 날 어여삐 여겨 소개팅을 시켜주시겠다는 직장 동료 분도 있지만, 늘 웃어넘길 뿐이다. 난 안다. 내 뒤에 지고 있는 짐짝이 거대하다는 것을. 이를 받아달라고, 같이 나눠 들어달라는 부탁이 얼마나 염치없을지를. 그에 대한 대가로 여성만이 제공할 수 있는 무언가 - 애교든 미모든 뭐든 간에 - 는 죽어도 제공할 수 없음을.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내가 감정적으로 접근 불가능한 삶을 살며, 일적으로 성취를 이루는 것이 아버지와 나 자신에 대한 가장 큰 모독임을, 확실하게 엿을 먹이는 방법임을 잘 알고 있다.
아버지는 부모와 자신에 대한 혐오를 첫째인 내게 푸셨다. 하지만 본인은 결혼도 하고, 가정도 누렸고, 일도 하셨다. 나는 자기혐오를 내게 풀 것이다. 자식이 자기 손으로 인생을 불행으로 몰아가며 침묵하는 모습을 노년 동안 두 눈 뜨고 똑똑히 보셨으면 좋겠다. 내가 아버지보다 좀 더 잔혹하다는 것을 간과하신 것이 실수였다. 난 내 후손을 절대 남기지 않을 것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딸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