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jaroazul Jul 20. 2024

취업 후에 정신과를 가면

정신과 일기 - 11

의사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가끔 있는 일이다. 선생님은 진료 시작 시간 30분 전에 도착하시곤 하는데, 환자들은 이미 그 시간부터 10~20명 정도 대기하고 있다. 난 21번째였다.


오늘은 엘리베이터 안에 아무런 향이 나지 않았다. 세상 나만 열심히 향수 뿌리고 다니나 보다. 그의 머릿결은 정돈되어 있었다. 흰머리도 줄어 보였다. 으레 스트레스가 많은 업종들은 나이에 비해 새치가 나곤한다.


문득 생각보다 더 날씬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선이 등을 따라 연결된 팔뚝으로 이동했다. 건장보다 마름에 가까워 보이다니, 혼란스러웠다. 유니폼 입고 계실 때는 표준 같았는데? 살이 빠지셨나? 피곤하신가?


그 짧은 시간에 눈길 한번 안 주고(그런 척 한 거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석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진저리가 쳐졌다. 뻐기는 것 같지만 진실이었다. 몇 초 안에 셜록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을 분해하고 뜯어낼 수 있는 센스. 그나마 내가 재능 비스무리하게 갖고 있는 무언가.


신발은 어고노믹을 우선시한 캐주얼 구두였다. 오래 서 있으셔야 할 일이라도 있는 걸까. 주차장에 있는 차들 중 하나가 선생님 거 아니었나. 감히 추측컨대 테슬라일 거라고 빙글빙글 웃곤 했지. 궁금했다. 아내나 자제분이 지금의 모습에 얼만큼의 영향력을 미쳤는지.


아, 실은 자식이 있으신지 모른다.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대답도 듣지 못할 거다. 내담자와 상담자의 관계, 그 선은 꽤 신성하다. 적어도 양측이 본인들 인생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엊그제 머리를 피러 미용실에 갔다. 디자이너 선생님이 샴푸 중에 자꾸만 머리를 고르셨다. 별다른 말씀 없이 이런다는 건 내 새치를 슬쩍 뽑아내시고 계신다는 뜻이렸다. 문제는 갈수록 그 양이 많아지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가방 밑바닥의 립밤을 찾듯 모발을 뒤적거리셨다. 괜히 억울했다. 취업도 해서 이제 스트레스도 줄었는데-없을 텐데, 분명!-왜 새치가 늘어난 거지? 뜨듯한 물에 머리를 담근 주제에 오한이 들었다.


선생님은 모발이 많이 상했다며 헤어팩을 하라고 충고하셨다. 헤어팩과 린스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이젠 알아야 한다. 서른이 8달 남았다.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젊지만 어리지도 않다는 것. 목이 막혔다.


업무 중 잠에 헤매는 것이 싫어 프로작은 줄여달라할 작정이었다. 재낵스는 놔두라고 할 것이다.


서른은 편집증의 탈을 쓴 채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다. 세상에 취업 말고도 새치가 생길 이유가 차고 넘친다는 건 미칠 수많은 이유 중 또 하나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판도라의 상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