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연세대가 아니라 서울대에 가기로 마음먹었어요.”
이 당돌한 말은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오랜 투병생활 끝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위해서 8살 때 내가 적은 편지 말미에 있는 문장이다. 여덟 살, 이 지구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이루어낼 수 있을 그런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서울대에 갔느냐고? 가지 못했다. 서울대가 평균 이상의 타고난 머리와 꾸준한 노력,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준 운까지. 삼박자가 골고루 맞아떨어져야 들어갈 수 있는, 말 그대로 ‘천상계 학교’라는 것을 어릴 때는 알지 못했다.
성적표의 숫자들로 모든 것이 평가되는 치열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산 너머 산인 인생. 노력 없이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 하나 없는 이 현실을 겪으면서 나는 이 사회에서 지극히 아주 평범한 사람 중 하나라는 사실을 씁쓸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20년. 나는 스물넷, 취준생이 되었다. 아직 이력서 한 장 내본 적이 없고, 자기소개서 작성도 이제야 시작하는 시점이라 내가 스스로 취준생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 좀 부끄러운 마음도 든다. 내가 생각해왔던 취준생은 하루하루 열심히, 목표를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인데, 과연 지금의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에. 어쨌거나 나는 사원증을 목에 걸기를 간절히 바라는 취준생이 되었다.
스스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또 내가 과연 월급을 받을 가치가 있는 성과를 낼 수 있는 능력이 되는지, 모든 것에 자신이 없어진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애틋하다. 내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큰 무리 없이 올해 안에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고,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자립이 가능한, 내 강아지 병원비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가 지불할 수 있는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과연 실무에서 쓸지 의문이 드는 엑셀 함수 계산 문제집을 펴고 자격증 공부를 한다. 합격 문자를 받는 그 날을 상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