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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Dec 15. 2024

오늘 : 탄핵, 그다음 날

2024. 12. 15.

1.

아침에 늦게 눈을 떴다.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의 기쁨을 만끽한 다음날이다. 어제, 여의도에는 가지 못하고, 제주시청으로 차를 몰아 달려갔다. 체주시청에 제주도민들이 천여 명 정도 모여 있었다. 탄핵소추안 투표가 있기 바로 전에 도착했기에 시위의 열기가 뜨거웠다. 무료로 나눠주는 어묵과 초청가수의 노래로 몸을 녹이며, 탄핵안 가결의 시간을 기다렸다. (나는 220표 정도가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간신히 200표를 넘어) 아슬아슬하게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제주도민들은 일제히 '이겼다!'를 외쳤다. 나도 따라 외쳐본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조용히 읊조리고 있었다. 아직 산 너머 산이다.)

서귀포시 모슬포에서 제주시 시청까지의 거리는 제주를 종단하는 40킬로미터 길이다. 시간으로는 1시간 남짓 소요된다. 서울시민은 가까운 거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주도민들은 엄청 먼 길이다. (그래서 제주도민들은 남과 북의 왕래가 잦지 않다.) 간 만큼 돌아와야 하기에 탄핵의 즐거움을 적당히 즐기고 다시 모슬포로 돌아온다. 유튜브 방송에서는 비상계엄에서 탄핵안 가결의 시간까지 파노라마처럼 엮어 설명하고 있다. 1차전을 치렀으니 복기의 시간이다.


2.

과거 박근혜 탄핵 때에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거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였으나 승리의 전리품은 모두 민주당이 챙겨갔다. 시민권력의 장치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민주당 내 당원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성과를 보아 제 기능을 하고 있지만, 시민들의 목소리를 직접 반영하고, 시민의 권력을 직접 행사하는 제도적 장치 마련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악을 없앤다고 하여 선이 승리한 것 아니다. 선은 악보다 훨씬 나약하고 섬세한 것이라서, 민주주의처럼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그러나 완성의 방향으로 방향타를 잡는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정당에게 정치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정치기구로 작동할 수 제도적 장치를 꾸준히 마련하는 과정에서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선한 의지는 선한 제도로 표현되어야 한다.


매번 정치적 격변기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서, 민주주의를 일궈왔다. 이번의 계엄 해체와 탄핵 역시 시민들의 집단적 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제 그 힘을 위임하지 않는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느냐가 향후 개혁의 중요한 과제이다. 죽을 쒀서 개(?)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쑨 죽은 (개도) 함께 나눠 먹어야 한다. 대의제 간접민주주의만큼이나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는 중요하다. 민주주의 역사는 아마도 이 두 수레바퀴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느냐에 따라 전진과 후퇴를 거듭할 것이다.

폭압적 대통령을 몰아내고 민주적 대통령을 새로 선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폭압적 제도에 맞서며 더 진전된 민주주의를 실험할 수 있는 민주적 시민권력을 형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 권력은 이번에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 젊은이들이 주역이 될 것이다. (뭐 이런 생각이 두서없이 드는 탄핵 가결의 밤이었다.)   

3.

풍랑주의보로 가파도에서 모슬포로 나오면서 두 권을 책을 챙겨 들고 나왔다. 그 전날 배달된 한병철의 <관조하는 삶>과 <불안사회>다. 현재 <관조하는 삶>을 읽고 있는데, 부제가 '무위에 대하여'이다. 동양의 노장철학적 무위도 있지만, 서양의 무위 사상은 어떻게 표현되는지 사뭇 기대가 높은 책이다. 현재 반 정도를 읽었는데, 앞부분은 압도적이다. 내가 여태 읽어본 한병철의 책 중에서 가장 '한병철스러운' 책이라고 꼽을 수 있다. 좀 더 정밀한 독후감은 말 그대로 다 읽은 후에 쓰겠지만, 앞부분을 읽은 것만으로도 책값은 하고도 남는다.


오늘은 탄핵 후 첫날이다. 사나웠던 정신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책이나 읽으며 하루를 보내기로 한다. 해피 탄핵! 해피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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