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의 <알다시피, 은열>을 읽고
그렇지 않은 공상도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그랬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작년까지 나는 공상과학소설에 별 관심이 없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공상과학 혹은 근미래를 바탕으로 한 소설으로는 <멋진 신세계> 정도가 있었고, 미국에서는 팬픽션이나 콘벤션 (우리나라의 온리전 개념..) 같은 서브컬쳐를 주도했던 <스타트렉>이나 <스타워즈> 같은 영화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았다. 초등학생 시절 2,000권을 넘도록 책이라면 닥치는대로 읽은 나였지만 공상과학소설은 내 독서 리스트에 오르지 않은 것이 그저 내 취향인줄 알았다.
이제 나는 공상과학소설을 다시 읽고 있다.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시민들의 의식 또한 성장한 공상과학소설에서만 가늠해볼 수 있는 가능성들을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김초엽 작가의 SF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한참 읽다가 주인공격인 화자 '데이지'도, 그가 살아가는 유토피아적인 마을의 설계자 '릴리 다우드나'도, '릴리 다우드나'가 마을을 설계한 궁극적인 이유가 되는 '올리브'도 모두 여성인 것에 놀랐고 내가 놀랐다는 사실에 또 한번 충격받았다. <스타트렉>의 두 주역이 남성인 제임스 커크와 스팍인 것에는 단 한번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는데. 머나먼 미래의 배경에서 고뇌하는 주인공이 여자라니. 나는 한 번도 가진적 없는 유산을 찾아낸 사람처럼 신이 났다.
내가 유난히 더 짜릿함을 느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공상과학소설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SF는 우리에게 이미 널리 알려진 과학적 지식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아직까지 불명확한 영역에 대해서만 그럴듯하고 체계적인 상상을 제시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의 현상을 진단하고, 호메로스의 장엄한 서사시처럼 미래를 예언한다. 여성이 주인공인 공상과학소설을 읽을 때, 나는 응당 그렇게 펼쳐질 미래에 한 걸음 다가간듯한 감각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미래를 상상하고 미래를 가지려 하는가? 그것은 여태껏 당연히 누려야 할 역사-실제로 우리가 겪어온 역사이든, 글로 쓰여져 가공된 역사이든-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팔레스타인 출신 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지식은 이미 서구 사회, 즉 권력을 누려온 주류세력이 발신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발화자의 위치에 따라 그의 목소리가 가진 지식 권력은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객관적이고 타당한 지식이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알다시피, 은열> 속 주인공인 정효는 자신의 역사학 석사 졸업 논문이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가 되어버린게 아닐까 걱정한다. 그는 가왜(假倭)에 대해 조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사료 속 한 구절에서 만난 은열에 전율을 느낀다. 가왜란 가난과 수탈에 지친 조선의 백성들 중 일본인 해적 행세를 하며 약탈을 벌인 이들을 뜻한다. 정효가 발견한 은열은 짧디 짧은 문장 속에서 여성의 몸으로 가왜가 되어 왜인과 청인까지 끌여들여 코스모폴리탄적 공동체를 형성하며 세를 부리고 있었다. 정효는 그의 흔적을 엮어 논문을 쓰려하지만 은열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의 공동체가 가진 의미를 부연하기 위한 역사적 증거는 턱없이 부족하다.
'서쪽 섬들을 잠식하여 그 위세가 두려울 정도'였던 은열은 왜 정확한 생몰년도 없이 '무덤 속의 실 보풀' 같은 사료 몇 줄로만 남아야만 했을까? 인도의 식민주의 이론가이자 비평가인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은 '하위주체(subaltan)'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주류 사회에서 소외 당한 타자, 그 중에서도 제 3세계 여성의 목소리와 경험은 우리에게 쉽사리 전달되지 못하고 매몰된다고 설명한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했듯,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에게 텍스트로 전승되는 역사는 승리자들 그리고 지식 권력을 쥐고 있던 자들의 역사인 것이다. 정효의 연구에 의하면 은열은 홍경래의 난에서 살아남은 고아였다. 젊은 여성이며 또 고아였던 그의 목소리와 경험은 공적인 문서로 전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사료로 증명하고 주장해야하는 역사학자였던 정효에게 이는 치명적인 문제였다. 그 스스로도 한달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할만큼,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이 역사인지 소설인지 고민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이 '채울 수 없고 채워서도 안되고, 아무것도 규정할 수 없는 여백'을 가지고 하는 씨름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오직 자신만이 은열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으며 듣고 있다고 느낀다. 자신이 복원하지 않으면 의적이 되었을지도, 위대한 아나키스트 혹은 혁명가가 될 수 있었을 그 외로운 이야기는 어디도 갈 곳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테지만, 그래서 내가 외롭고 그들은 더욱 외로워지지만 이 이야기는 아무 곳으로도 가지 않는다.
스피박은 역사학자의 역할은 하위주체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라고 했다. '말을 거는 것'이란 대상을 타자화하여 한발짝 뒤에서 지켜보며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이 된 것처럼 그의 삶을 조명하는 것이 아닐까. 마치 '안테나'처럼 가장 낮은 자리에서 발생하는 수신호를 받아 여백과 여백을 이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정효는 은열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나머지 페티쉬에 가까운 상상도 서슴지 않지만 결국 은열과 그 무리, 왜인 시로와 청인 창량에게서 일본인, 대만인 그리고 호주인과 함께 힘겹게 밴드를 꾸려나가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있었다. 그 자신도 모르게 은열의 이야기를 받아 전하는 안테나가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써내려간다.
그래도 썼다. 겨울에서 봄까지, 환태평양 밴드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마음대로 써버렸다. 은열한 유구한 혁명정신의 계승자이자 시대를 앞서간 여성 영웅에 아나키스트였다고. 은열들의 독특한 범아시아적 우정을 재현하는 게 우리 세대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신분제의 벽을 넘어서서 만국의 고아들을 거두며 이상적 공동체 생활을 영유했으며, 진보적이고 전위적인 예술형식을 실험했던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시대의 한계에 부딪혀 좌초당하지 않았다면 근대의 선구자들이 되었을 푸른 젊은이들이었다고!
결국 그의 논문은 통과되지 못하지만 그 이야기에서 얻은 영감은 밴드 R.dashifi의 대서사시형 얼터네이티브 록 "Slow Burning"이라는 곡으로 재탄생된다. 정효에게 은열은 단지 과거의 조각이 아닌 현재의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이었으며 가능성이었다. 정효는 은열의 존재를 다시 살려냄으로써 마치 지금 여성이 주인공인 공상과학소설을 읽는 나처럼, 단지 터무니없는 상상이 아닌 개연성 있는 공상을 완성한 것이다. 정효가 쓰고자 했던 글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기록돼버린 것을 뒤집는 공상이며, 모두가 인정하는 명징한 사료보다도 더 공평한 역사가 아닐까.
참고문헌 :
조애나 러스 저, 나현영 역,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
가야트리 스피박 저, 태혜숙 역,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