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우미 Sep 11. 2020

1. 후추

식재료와 맛있는 글쓰기

내가 어렸을 때 동네 마트에서 파는 후추라고는 보통 우리가 순후추라고 알고 있는 오뚜기의 고운 가루후추뿐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블로그나 유튜브에 나오는 레시피를 보며 가정에서 다양한 나라의 요리를 해먹는 게 흔했던 시절은 아니라 나에게 후추란 곰탕에 뿌려먹을 때나 식탁에 올라오는 쿰쿰한 가루였다. 특유의 알싸하고 쎈 느낌이 국밥과 합쳐져 뭔가.. 아저씨의 조미료 느낌이 강했다. 몇 년 후에는 정다정 작가의 <역전 야매요리>에 나오는 "후추를 후추후추!"가 유행어로 등극했지만 나는 후추라는 향신료에 특별한 애정이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아저씨 느낌...


후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라인더 형 후추가 나오면서부터다. 스틸캔 같은 통에 담겨 툿! 하고 성의 없이 나오던 후추가 그라인더라는 새 옷을 입고 완전히 세련된 식재료 느낌으로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사실 어렸을 적에도 나는 그라인더에 담긴 후추를 본 적이 있다.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만 가던 아X백 등 패밀리 레스토랑의 테이블에는 조금 과장하자면 홍두깨만큼 큰 나무 그라인더가 놓여있었는데, 집과는 동떨어진 패밀리 레스토랑의 서양적 분위기에 취해있던 나는 그 멋진 나무 통에 들어있다가 삭삭 갈리는 소리와 함께 멋지게 스프 속으로 떨어지는 미지의 향신료를 우리집에 있는 흔해 빠진 '순후추'와 연결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라인더 후추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된 이후 요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때그때 갈아서 쓸 수 있는 그라인더에 든 통후추를 사용하게 되었다. 후추는 입자의 굵기와 열매의 색깔에 따라 풍미가 다르다고 한다.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재료에 어울리는 조리방식과 조화로운 재료를 매치시키는 일이다. 흑후추와 백후추, 그리고 통후추와 가루후추는 각기 어울리는 재료와 분야가 다른데 흑후추는 보통 육류에, 조금 더 향이 부드러운 백후추는 어패류와 어울린다. 가루후추는 통후추보다 향이 더 잘 날아가므로 위에서 말한 곰탕이나 국밥 같은 한식 국물 요리가 완성된 후 마지막에 뿌려주는 것이 좋다.


사실 나는 보통 후추 향이 풍부한 통후추를 그때그때 갈아 쓰는 것을 선호하고 가루후추는 그야말로 옛 추억의 정서를 느끼고 싶을 때 꺼내는 것 같다. 특히 경양식집 또는 한국식 돈가스집에서 먹는 밍밍하고 달고 뜨끈한 옥수수크림스프에는 반드시 순후추를 뿌려야 그때 그 맛이 느껴진다.



후추는 보통 향이 강한 고기와 해산물의 잡내와 비린내를 잡는데 쓰이곤 한다. 하지만 한 때는 화폐 대용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열매 한 알이 진주 한 알과 맞먹는 값어치를 지니기도 했던 획기적인 향신료답게, 후추는 향이 강한 음식의 파트너 뿐만 아니라 밋밋한 음식에 '킥'을 주는 주인공으로도 활약할 수 있다.


어느 추운 늦가을, 회사에서 지하철역으로 홀로 걸어가고 있을 때 날씨 때문인지 그날의 기분이었을지 걸쭉하고 따끈한 감자 스프 한 그릇이 먹고 싶었다. 마침 역 근처에 있던 브런치 카페에 가서 스프를 시켜 먹는데 크리미하고 포슬포슬한 질감이 반가운 것도 잠깐, 빵도 없이 스프만 퍼먹고 있으려니 조금은 지겨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계산대 앞 사이드 테이블에 후추 그라인더가 보였다.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만 비치되어 있어 대여섯번 열심히 돌려 후추를 뿌린 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놨는데, 웬걸, 그렇게 열심히 뿌린 후추는 숟가락질 두세번만에 사라졌다. 다시 후추를 가져와 분노의 양치질을 하는 차인표처럼 힘껏 후추를 뿌렸다. 후추는 또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후추를 뿌린 감자스프와 뿌리지 않은 감자스프는 너무도 풍미가 달라 귀찮게 왔다갔다 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때 후추에 관한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스프에 후추를 뿌리는 일은 꽤나 흔한 일이지만 후추는 생각보다 더 다양한 활용성을 가지고 있다. 이건 재작년 크리스마스 파티 음식을 하던 중 친구에게 배운 건데 와인 안주로 먹을 치즈 위에 후추만 살짝 뿌려줘도 훨씬 "요리스러워진"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저 비주얼적인 느낌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먹을 때도 훨씬 맛있다. (비싸지 않은 치즈일수록 효과가 좋다. 하지만 평소에 좋은 후추를 구비하도록 하자)


아보카도는 과카몰리, 덮밥 등 다양한 요리에 쓰이는 재료이다. 더운 여름, 불을 쓰지 않고 간단한 안주나 그럴듯한 (브이로그 용) 브런치를 만들고 싶다면 후추를 사용하자! 아보카도를 슬라이스 한 후 그 위에 후추를 갈아서 뿌린다. 생레몬이 있다면 더욱 좋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레몬즙을 툭툭 뿌려준 후 소금을 흩뿌려준다. 여기서 멈춰도 충분히 맛있지만 레드페퍼 플레이크를 뿌려주면 더 훌륭한 요리가 된다.


"ㅇㅇ야 후추 뿌려줄까?"라고 물으면 께름칙한 얼굴로 거절하던 어렸던 나는 이제 셱셱버거에 가서도 케찹보다 먼저 후추를 찾는 사람이 되었다. (셱셱버거 감자튀김에 소스바에서 기본 제공되는 후추를 뿌려먹어보라. 강력추천.) 향신료를 다채롭게 사용할수록, 식탁은 풍성해지고 소금의 사용은 조금 줄일 수 있다. 여러분도 후추를 후추후추, 해보시지 않겠어요?



작가의 이전글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