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의 <효진>을 읽고
정세랑 작가의 단편 <효진>은 화자의 이름을 그대로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효진'이라는 이름의 유래에서부터 화자의 삶에 얹힌 부당한 중압감이 느껴진다. 효도 '효(孝)'자에 다할 '진(盡)'자를 쓴다. 더욱 환장할 포인트는 오빠의 이름에는 '효'자도 '진'자도 들어가지 않고, 항렬자가 사용됐다는 점이다.
유교강국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여자라면 여기까지만 읽어도 효진이 택한 '도망'의 이유를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대학을 보내주지 않겠다고 어깃장을 놓다가도 장남의 '남 보기 부끄럽다'는 설득에 못이겨 그를 서울로 보내주고, 그의 전 남자친구 중에는 자신의 가난을 모욕했다며 그녀의 사진을 인터넷에 유포한 이도 있었다. 이들을 떠나기 위해 효진은 서울로, 다시 도쿄로 떠난다.
이동의 서사는 흔히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자주 나타난다. 주변인이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나 사회 속에서 자신이 설 위치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을 뜻한다. 그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의 보편 규범, 가치 또는 행동양식에 순응하거나 포섭되지 못하고 중심 체제로부터 밀려나 소외된 이들이다.
유럽중심주의적 근대성이라는 가치 앞에 언제나 외부인이었던 식민지 지식인들도 주변인들이었으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적극적인 주체가 될 수 없는 많은 사회적 약자들 혹은 그저 남들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무리에서 배제되는 이들 또한 주변인이 되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주변성이라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는 이분법은 사회가 마련한 것이고, 흔히 보편적인 가치 체제라는 것은 그 체제에서 이득을 얻는 특권층이 만들어낸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성장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들도 스스로를 주변인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들과 환경을 떠나 자신답게 살 수 있는 곳으로의 이동을 통해 건강한 자기 인식을 이루게 된다. 공간 이동의 척도로 볼 때, 작게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님의 집을 떠나 허니 선생님의 집에 살며 가족이 되기를 선택한 마틸다부터 아예 인간 세계의 물리학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마법세계로 떠난 해리포터까지 이러한 이동의 서사는 다양하다.
최근에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으로 공개된 <반쪽의 이야기 The Half of It>의 주인공 엘리 추도 영화 말미에 한평생 살아온 마을을 떠나 대도시의 대학으로 진학하며 성장을 이루게 되며, 엘리가 짝사랑했던 애스터 또한 집에서 정해준 상대와 결혼해 마을에 정착하는 대신 미술학교에 지원하기로 한다.
누구에게나 떠나고 싶은 고향과 같은 존재가 있겠지만, 가부장제(남성중심)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있어 이동이란 단순히 개인적인 거취의 문제를 넘어 자기 자신을 지키는 행위이다. 누구도 나를 몰라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타지의 이미지는 도리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매일 마주하는 가족이나 눈감고도 걸어갈 수 있는 익숙한 동네 속에서도 여성은 자주 주변인으로 겉돌게 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 속 효진에게도 먼 타지인 서울은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다. 서울로 시집간 이모들이 보내준, 동네에서는 결코 구하지 못하는 고급 쿠키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상징하는 물건이자 효진의 궁극적인 이상향이 된다. 먹은지 한참 지난 과자의 맛을 복기하며 필사적으로 고향을 떠나 서울에 상경한 효진은 잇달아 해로운 관계들로부터 도망쳐 도쿄로 향하고, 도쿄에서는 연구실을 떠나 제과학교에 가게 된다.
효진은 자신이 끊임없이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것이 일종의 도망이라고 생각해 남들처럼 남아서 싸우지 않고 떠나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자신을 해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도망치는 것은 때로 확실히 도움이 되는 행위이다. 효진이 출국하기 전, 효진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며 고향에 내려와 살림과 간병을 하라고 한다. 이는 효진의 남자 형제에게는 요구되지 않는 몫이지만 효진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하게 부과된다. 효진의 '도망'은 일종의 홀가분한 탈출이며 자신을 억압하지 않는 새로운 가치 체계가 존재하는 곳으로의 모험이다.
이 작품이 여성 독자인 나에게 더 산뜻하게 다가온 이유는 효진이 자신의 선택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효진은 가족, 특히 어머니를 두고 홀로 빠져나왔다는데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안도감을 느낀다. 효진이 겪는 심적 갈등과 의문은 타인에 대한 부채감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다.
떠나온 곳에 남은 이들에게 대한 죄책감으로 얼룩지지 않고 그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여성 서사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필요했다. '나는 왜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도망칠까?'라는 그의 물음은 도망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도 꾸준히 좋아해왔던 과자를 만드는 일을 하며 해소된다. 효진은 드디어 자기 자신이 포기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가능성을 찾은 것이다. 스스로를 위한 선택을 기꺼이 할 줄 아는 화자가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을 괴롭지 않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지금껏 읽은 한국문학과 다르게 새롭게 느껴졌다.
혹시 나의 특장은 도망치는 능력이 아닐까? 누구나 타고나게 잘하는 일은 다르잖아. 그게 내 경우에 도주능력인 거지. 참 잘 도망치는 사람인거야. 상황이 너무 나빠지기 전에, 다치기 전에, 너덜너덜해지기 전에 도망치는 사람. 타이밍과 속도를 조절해서 도망치는 사람. 똑같은 타르트를 삼백개쯤 만들었을 때, 스스로에게 살짝 너그러워졌어.
효진이 도망쳐 택한 곳이 결코 낙원이라고 할수는 없다. 효진은 도쿄에서도 완전한 내부인이 되지 못한다. 이 단편이 시작되는 장면은 다소 서글픈데,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효진을 미워하는 선배가 효진이 쪼그려 재료를 꺼내는 동안 냉장고 위쪽 문을 열어놓아 효진은 모서리에 머리를 찧고만다. 하지만 이제 효진은 누구에게나 '적당히 차가운 곳으로 도망쳐 잠시 숨을 고르는 과정, 곧 휴지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거기서 얻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이제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도쿄가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자리가 있는 도쿄에서 잘 있을 것이다.
그봐. 나도 도쿄도 잘 있다니까.
* 참고문헌
오은교, <손절과 벤딩: 최근 여행 서사에서 나타난 동행의 장면들>, 문학3 9호: 2019년 3호.